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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7화 (57/118)

제57화

하오의 햇살 아래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는 은발과 금안. 그렇잖아도 썩 좋지 못한 성격이 한층 더 고스란히 표출된 낯.

잔뜩 움츠려 있던 오필리아의 낯에서 긴장이 툭 풀리고, 버석한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알레이.”

그였다.

이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 * *

조금 전, 알레이의 방.

“마탑을 깨우느라 연구가 더뎌지고 있다면서. 마탑을 깨운다는 게 무슨 말이지?”

알레이가 재차 묻자 코르넬리는 우물쭈물하는 기색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레이가 추방당한 것과 동시에 마탑이 잠들었다고.

그리고 그것은 알레이에게 약간의 의문을 남겼다.

“마탑이 자아라도 있는 건가?”

“정확합니다. 마탑은 저희가 사는 공간인 동시에 생명체나 다름없습니다.”

예니트가 설명했다.

마탑은 거대한 마력 덩어리로 이루어진 생명체와 같아서, 마탑 내부의 조도와 습도 등을 관리하는 동시에 마탑 내의 일을 지켜본다고.

“그렇다면 마탑에 주인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생명체라고는 하지만 규율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다룰 사람이 필요하죠.”

“음…… 무엇보다 마탑은 환경을 가꾸는 것 외에는 범죄가 아닌 이상 관여하지 않아서요.”

코르넬리가 말을 받았다.

“심지어 그것도 경범죄는 건드리지 않아요.”

“정말 지켜보기만 하는 거군.”

알레이는 이쯤 되자 굳이 묻지 않아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내 기억을 봉인한 것은 마탑인 모양인데.’

알레이는 본인의 마법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걸린 마법은 알레이가 그 정체를 알아내는 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뿐더러 제대로 된 파훼식조차 만들지 못할 수준의 마법이었다.

‘처음 보는 개량 방식이었고.’

그러니 분명 예사롭지 않은 상대의 소행일 거라 생각했다.

상대가 마탑이라서, 말도 안 되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다.

알레이는 둘의 설명을 들으며 잠시 가늠했다.

‘내게 걸린 조건식 마법.’

그걸 한 게 마탑이라면, 마탑이 어떤 기준과 성향으로 움직이는지만 알면 생각보다 쉽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레이는 가볍게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탑이 중범죄에만 관여한다고 했지. 모든 형벌이 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죠. 하지만 결국 다 비슷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인 거죠.”

예니트의 설명은 간결히 이어졌다.

마탑의 목적은 교화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마탑은 형벌을 통해 벌을 받는 상대를 시험에 빠트린다고.

일례로, 마탑의 눈이 사방에 닿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

마탑은 절도죄를 저지른 이의 모든 재산을 압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후 다시 절도의 유혹에 빠졌을 때 이전과는 달리 범죄를 저지르지 않자, 그의 모든 재산은 사라졌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고스란히 돌아왔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형벌도 끝납니다.”

예니트의 시니컬한 설명에, 알레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느꼈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예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형벌을 끝내는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희열이 전신을 덮쳤다.

‘실마리를 찾았다.’

오필리아가 알면 정말 기뻐할 것이다.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오필리아의 것이라니 다소 우스운 이야기지만, 알레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둘러 오필리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심박수가 빨라진 것이 그 방증이었다.

알레이가 맥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펴는데, 예니트가 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레한드로 님께서 기억을 되찾으셨다니 분명 그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신 것이겠지요? 저는 정말 기쁩니다.”

“……아.”

그리고 거짓말처럼 박동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지금 누군가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 탓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모르는 예니트와 코르넬리는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알레한드로 님께서 마탑으로 돌아가실 때 저도 마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와! 역시, 너도 같이 돌아오려는 거구나!”

“역시 알레한드로 님이 계시면 나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알레한드로 님의 차 온도를 가장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내가 필요하실 거야.”

“그것보다는 네가 연구를 하고 싶어서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예니트가 시니컬하게 대답하며 코르넬리에게 눈을 흘기듯 픽 웃었다.

두 사람의 ‘알레한드로’에 대한 애정은 척 보기에도 대단했다.

감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레이, 자신이 그 자리에 끼어도 될까 의구심이 들 만큼 말이다.

다른 때였더라면 이런 자리에서 불편함을 호소하며 자리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겠지만.

‘그렇지만…… 오필리아의 말이 맞다.’

그들이 자신을 그만큼 그리워하고 있었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빨리 기억을 되찾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 했다.

‘알레한드로가 된다면, 그때는.’

그때는 이렇게 구겨지고 초라한 마음도 조금은 다림질을 할 수 있을까.

마침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를 손에 쥔 덕분에, 알레이는 제법 희망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때.

와장창-!

그런 알레이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래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아래쪽에서 난 소리 같은데.”

“등이라도 깨진 거 아냐?”

놀라서 두런거리던 중, 코르넬리가 툭 던진 말에 알레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얼마 전 하이다르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처음 오필리아의 방에 있는 샹들리에가 떨어져서 하이다르가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물론 진상을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일이기는 했지만.

본디 불에 데인 사람은 반딧불이를 보고도 놀라는 법이다.

‘바로 아래층이면 귀빈실인데.’

그쪽은 오필리아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알레이는 더는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그래진 코르넬리의 시선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왜 그러세요, 알레한드로 님?”

“아무래도 소리가 난 게 아래층이라는 게 좀 걸려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너희는 여기에 있어라. 금방 다녀오지.”

잠깐 확인만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별일은 아니겠지만.

* * *

그렇게, 다시 지금.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더니.’

이런 개 같은 상황이라.

알레이의 어금니 안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침의 불청객에게 손목이 붙잡힌 오필리아를 본 순간 이성이 뚝 끊어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눈물 한 방울이 오필리아의 뺨을 가로질러 떨어졌다.

이안이 손아귀 힘을 조절하지 못한 탓에 고통으로 찔끔 맺혔던 눈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지나치게 절묘했던 탓에 그 눈물은 그만 그 자리에 있던 두 남자 모두에게 오해를 사고 말았다.

한쪽에게는 오필리아가 정말 알레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오해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게는 마치 오필리아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울고 있다는 오해를.

후자는 알레이의 것이었다. 제대로 오해가 박힌 알레이의 낯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됐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겠군요.”

“너, 지금-”

알레이의 등장으로 잠깐 굳어 있던 이안이 입을 열려는 순간.

쿵-!

“큭!”

이안의 손이 오필리아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짓눌리듯 처박혔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를 짓누르는 것처럼.

그러나 이안 역시 평범한 사람 이상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그는 짓누르는 힘을 가까스로 이겨 내며 낯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열었다.

“알레한드로. 여기가 지금 네가, 큭, 끼어들 자리라고 생각하나? 내가, 컥!”

그리고 다시 한번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의 돌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져도 알레이의 염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점은 그런 가공할 만한 힘을 다루면서도 알레이가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오히려 너무 평온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누구고, 오필리아와 무슨 관계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좀 돌보셔야겠습니다.”

그대로라면 두 발로 걸어 나가기는 아무래도 많이 힘들어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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