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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6화 (56/118)
  • 제56화

    발목까지밖에 오지 않는 물에 빠져 죽으려 했던 제 잘못을 탓했더니, 그는 아주 잠겨 버려 스스로가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느 쪽이 더 한심한 꼴인지 굳이 견줄 이유도 없다.

    짧은 것끼리 대어 본다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날 놓아주는 것 하나뿐인데. 그거 하나 못 해 준다니 당신 사랑도 알 만하군요.”

    오필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 깨진 자기 조각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있는 이안을 흘긋 바라보았다.

    엉망인 바닥과, 눈물로 짓무른 낯의 이안은 퍽 잘 어울렸다.

    오필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때 자신이 그토록 그렸던 낯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당신을 구했던 그 인어 공주.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번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오고 싶어 하고.”

    아마 그대로 두면 과거와 똑같이 죽겠지. 그건 예정된 미래였다.

    “그리고 나는 그걸 막았으면 해요. 그녀가 우리 때문에 죽어야 했던 건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래서. 무얼 원하는데?”

    “당신이 그녀를 한 번 만나 보면 좋겠어요.”

    진짜 구원자에게 감사 인사도 할 겸.

    그리고, 당신의 감정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 알아볼 겸.

    ‘그때는 마음이 좀 바뀔지도 모르겠지.’

    어차피 이안이 제게 가진 감정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뿐일 테니.

    아리엘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게 있지 않을까.

    ‘나나 아리엘에게 미안해서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그 둘을 만나게 해서 아무도 불행하지 않게 한다는 게 오필리아의 계획이기도 했고.

    “그리고 나 같은 가짜한테서는 관심을 꺼 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오필리아, 나는. 나에겐 날 구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구원자는-”

    “아뇨. 난 당신을 구한 적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엮일 이유조차 없다. 오필리아는 짧게 잘랐다.

    구원이니 뭐니. 그런 거창한 단어를 쓰기에 오필리아는 너무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부디 당신이 누굴 신경 쓰고 누굴 놓아야 할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네요.”

    오필리아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목소리는 평이했으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한낮에 마주한 이안이 생각보다 더 불안정해 보였던 탓이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가 자신을 가로막는 들불이 되기 전에 서둘러 알레이의 기억을 찾아야 했다.

    오필리아와 알레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사슬.

    당장 제 것은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알레이의 것은 해결해야만 했다.

    ‘이렇게 발목이 잡혀서 로넨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오필리아는 이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서리가 날카롭게 손끝부터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제 죽음 이후 그가 후회한 것은 예상한 대로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 감정의 격변 없는 오필리아의 속내는 이안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해일을 만들었다.

    울렁이는 속 때문에 찻잔을 쥔 손이 떨렸다. 차가워지는 몸과 뜨거워지는 머리가 서로 판이하게 오필리아를 괴롭혔다.

    그제야 오필리아는 자신이 이안을 만나 그토록 일렁였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스러진 미련과 슬픔, 트라우마와 옛 사랑에 대한 향수가 범벅이 되어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

    마음 같아서는 그 멱살을 틀어쥐고 물었을 것이다.

    지금 그 얘기를 내게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이안은 결국 스스로가 중요하지.’

    오필리아가 필요한 이유 또한 그의 삶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런 사랑이 기꺼운 누군가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오필리아는 아니었다.

    오필리아 역시 그녀 스스로가 중요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안은 안 되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말과 손짓에 쉽게 고개 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그녀에게 연연해 못 하겠다고 혀 내두를 만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

    그녀가 먼저 손을 놓기 전까지는 한사코 그녀의 곁에 있다가, 손을 놓으면 방해 없이 떠나 줄 수 있는…….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오필리아는 걸음이 붙들렸다.

    뒤를 돌자 어느새 몸을 일으킨 이안이 일그러진 낯을 하고 오필리아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남자 때문인가? 당신이 내게 이러는 것.”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알레이는 이 일과 관련이 없잖아요.”

    “정말 관련이 없나? 당신이 로넨에 있을 때 늘 그와 있었다는 걸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이안의 말에 오필리아의 낯이 희게 질렸다. 제게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더니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신이 나갔군요. 그와 나는 단순한 친구였어요. 내가 그와 시간을 많이 보낸 건 어디까지나 내가 편하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었던 탓이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럼 단순한 친구와 밤늦게까지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오필리아가 황당함에 입을 연 순간. 손목이 붙들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이안이 오필리아의 손목을 붙든 것이었다.

    “당신의 충실한 감시자가 그러더군. 당신 침실에서 남자 목소리가 나더라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알레한드로 그놈이 당신 침실에서 나왔지. 뭐가 더 있나?”

    릴리스는 이안과 이야기를 나누며 전서구에게 매달 편지를 쓰는 도중, 오필리아에 대한 험담을 빼놓지 않았다.

    -각하께서 오필리아 전하와 그런 소문이 있으셨으니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행실이 정말 나쁘셔요. 매번 추문이 따라다닌다니까요.

    -……추문이라니?

    -얼마 전에는 라딘의 영주님께서 오필리아 전하와 시간을 보내다 사고를 당하셨고요, 심지어 밤중에도 종종 전하의 침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어디 말하기도 그래서 함구하려 했는데, 각하께서 혹시라도 그런 식으로 나쁘게 얽히면 안 되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릴리스의 말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뱉는 문장 역시 악의로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사실인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안은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다시 만난 오필리아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필리아는 제 곁에 있어야 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리고 이안은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거라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필리아가 이안을 잘 아는 만큼, 이안 또한 오필리아를 잘 알았으므로.

    그녀는 감정에 약했다. 애정에 약했고, 자신을 원하는 손길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제가 다시 손을 내밀면 그녀는 분명 그걸 놓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보다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안의 어금니가 으득 갈렸다.

    “……알레한드로. 그가 당신을 꼬여 낸 거군.”

    “뭐라고요?”

    “내 말이 잘못됐나?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나를 버릴 이유가 없잖아.”

    그래. 그게 아니라면 오필리아가 자신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알레한드로의 탓이다.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었다.

    눈이 돌아간 채, 이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오필리아의 낯이 형용할 길 없이 질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안과는 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미쳐 있었다.

    오필리아는 자신을 붙든 이안의 손을 떨쳐 내려 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달리 이안은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안, 이거 놔요!”

    “내가 당신을 놓으면 또 그놈한테 갈 테지.”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당신이 내게 없었으니까.”

    조금 전까지 화가 난 듯 보이던 이안의 낯이 다시 허물어졌다.

    “오필리아, 당신이 내게…… 너무 오래 없었어. 그러니 내가 그때와 같은 사람이길 바랄 수는 없지 않겠어?”

    그 3년의 간극이 너무 많은 괴리를 만들었다. 이안은 제가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지 않을까.

    오필리아를 죽게 내버려 둔 과거와 제가 같아야만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지옥이리라.

    변한 만큼, 과거의 과오는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오필리아만 알아주면 됐다.

    이안의 손아귀가 다시금 오필리아의 손목을 옥죈 순간.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날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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