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55화 (55/118)

제55화

어느 순간부터 오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은 그것이 오필리아의 시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또한 응수하지 않으려, 굳이 말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언젠가.

이안이 귀가해 평소처럼 오필리아를 찾았을 때, 그녀가 자리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빈방을 볼 당시만 해도 이안은 그다지 놀랍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필리아가 기껏해야 갈 곳이 침실과 집무실, 장서관이 전부였으니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성안을 여럿 돌아다녀 보아도 오필리아가 없자 이안은 기묘한 불안과 짜증에 사로잡혔다.

성의 사용인들에게 물어도 모르겠다는 얘기만 거듭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필리아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는 사용인이 없었던 탓에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 또한 없다는 것이 그날의 문젯거리였다.

‘사용인을 좀 데리고 다니라고 해야 하나.’

이안은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수행원이 상시 따라붙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오필리아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가끔 제가 불편을 감수하고 말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 마주친 어느 사용인이 그녀를 찾을 실마리를 준 덕에 심산이 너그러워졌던 까닭도 있었다.

“공비님이요? 글쎄요. 외탑에 계시지 않을까요? 평소에도 그곳에 자주 계시니까요.”

외탑은 성의 마법사가 연구를 위해 따로 지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알기로 성에서 기거하는 마법사는 예니트라는 괴짜 한 명.

그런 곳에 오필리아가 자주 있을 이유가 있나?

‘그 마법사와 친구라도 된 건가.’

이안은 깊게 의문하지 않고 외탑으로 향했다.

그러나 외탑으로 발을 들였을 때 이안이 마주한 것은 의외의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남자 목소리.

“마법으로 음식을 만들어 낼 수는 없냐니, 그렇게 편리한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왜 안 되는 거죠? 순간이동도 할 수 있고, 바다도 잠재울 수 있잖아요.”

“마력을 운용해서 움직이는 일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건 천지차이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마법식을 연구해 볼 생각은 없나요?”

“유감스럽게도 아직 저는 요리사들을 무직으로 만들어 원망을 살 마음이 없습니다. 악역 놀이가 하고 싶어지면 고려해 보죠.”

다른 한 목소리는 오필리아가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한 목소리는?

이안은 어쩐지 자신이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듯한 기분이 되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열린 문 틈 너머 벽난로에서 불이 타오르는 와중,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가 보였다.

예상한 대로 한 쪽은 오필리아였다. 오필리아는 손에 반쯤 읽은 책을 들고,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요리를 하기 싫다고 해요, 알레이.”

그렇게 말하며 오필리아는 웃었다.

대화 내내 오필리아는 편안해 보였고, 자주 웃기도 했다. 그녀가 이토록 쾌활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안은 기억의 뒤꼍에서 겨우 꺼내왔다.

제 앞에서 그간 보였던 모습과, 지금 그녀 사이의 괴리가 이안을 헛웃음 짓게 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제 예상대로 오필리아는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이안을 찾지도, 그의 부재에 아쉬워하지도 않고.

그것을 늘 바랐지만 이토록 부아가 치미는 이유가 뭔지.

문 너머에서 웃고 있는 오필리아가, 여전히 이 관계에서 전전긍긍하는 게 오직 자신뿐이라는 방증 같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정말 그녀가 싫었더라면 굳이 찾아 짜증을 낼 게 아니라 그냥 신경을 끄면 될 일일 텐데.

짜증을 냈다는 것부터가 그녀를 놓지 못한다는 증거나 다름없는데도 당시의 이안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레이라는 그 마법사를 주시하고, 오필리아와는 정말 단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눈을 뗐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필리아는 그의 아내였다. 제가 돌아오면 있을 사람이었다.

오필리아는 여전히 이안의 경계선 안에 있었다.

제 짜증의 근원도 찾지 못한 채 이안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오필리아가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매일 곳이 사라지자 바람은 다시 광야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안은 오필리아가 눈을 뜨지 못한 이후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상대가 오필리아였기에, 또 그 무언가의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저 흘려보냈다.

혼란과 비탄에 시간을 보내도 이안은 일국의 군주였다.

그는 여전히 마물을 해치우러, 또는 무역을 하러 나가야 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은 덤이었다.

하여 이안은 평소대로 지냈다. 분주함에 유사처럼 몸을 내맡기면 원인 모를 침울함은 잠시 잊혔다.

그리고 돌아오면 기다리고 있던 우울이 그를 삼켰다.

“오필리아.”

이제는 습관보다는 애원이 되어 버린 그 이름을 주워 삼키며.

이안은 눈물 흘렸다. 오필리아가 언젠가 눈을 뜰 거라는 기대를 저버렸던 어느 날이었다.

그제야 그는 오필리아가 제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아무것도 앗아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이안을 돌려놓았을 뿐.

그녀가 돌려준 것은 허무였다.

이안이 이 지난한 생에서 오필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늘 느껴왔던 것.

그리고 오필리아를 만나 이후로는 느낀 적이 없던 것.

오필리아가 사라지자 허무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오필리아는 이안의 욕망이었고, 사랑이었고, 삶의 이유였다.

죽을 거라 생각했던 표류의 끝에서 마주한 것이 그녀였던 탓에.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격랑으로부터 살아 돌아갔고, 끈덕지게 마물을 죽였다.

그토록 짜증스러워도 그 회귀성만큼은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3년 사이 이안의 몸에는 수도 없는 흉터가 생겼고, 달처럼 빛나던 눈에서는 생기를 잃었다.

눈을 감으면 오필리아가 살아 있을 적의 기억이 그를 찾아왔다.

기억들 속에서 오필리아는 울었고, 때로는 황량한 낯으로 앉아 있었으며, 이안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그 모든 원인은 제게 있었다.

그래서 이안은, 오필리아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가 투신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오필리아가 눈앞에 있었다.

허무와 공허로 가득 찼던 심장이 다시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도저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오필리아가 아무리 거절의 말을 내뱉어도 좋았다.

제게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둘러도. 자신이 싫어서 미치겠다고 해도.

전부 감내할 수 있었다. 오필리아가 제 곁에 있기만 한다면.

그는 이제 그녀가 없는 세상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안은 오필리아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채 수없이 애원했다.

제발, 오필리아.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그러나 애원이 무색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오필리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싫어요.”

그녀는 완전히 질렸다는 눈으로 이안의 손을 털어냈다.

“이안, 당신이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내 거절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렇게는 안 돼.”

그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이안은 터지는 둑을 막으려는 사람처럼 다급히 오필리아의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힘 조절을 할 여유도 없었던지, 우악스러운 힘에 오필리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서둘러 힘을 풀었으나, 그는 여전히 오필리아를 놓지 못했다.

“오필리아, 제발…….”

이미 수없이 울어 짓무른 이안의 눈에서 다시 알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여유를 가장할 수는 있어도, 오필리아와 있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안정을 찾질 못했다.

그가 무엇을 해도 관조적인 오필리아와 달리.

한결 차가워진 오필리아의 눈이 그를 훑었다.

무릎 꿇고 울고 있는 남자. 그 수려한 외관은 고작 그 정도에 무너지지 않았지만, 한때 그저 높고 날카롭게만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와는 괴리가 컸다.

오필리아는 도저히 이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은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이후에도 그랬다.

그토록 감정이 깊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굴게 된다면, 진작 알아차렸어야지.

제가 살아 있을 때는 못 견디게 미워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하는 꼴이 초라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사랑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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