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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4화 (54/118)
  • 제54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호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행동마저도 그만두면 정말로 오필리아가 제게서 떠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손 틈으로 흘러내리는 유사를 주워 담으려는 어떤 발악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는 언젠가 그 부름이 응답받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오필리아가 눈을 뜰 거라고. 그러한 기대를 차마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우습지만 정말 그랬다.

    오필리아는 어떤 보살핌 없이도 잠든 상태 그대로를 유지했으니까. 마치 마법이 그녀의 시간을 그대로 멈추어 버린 것처럼.

    이 세상에 더는 살아 움직이는 오필리아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씩 침몰해가는 이안과 달리 잠든 그녀는 지극히 고요하고 또 그만큼 한결같았다.

    그 앞에서 이안은 여전히 제 꿈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오필리아와의 첫 만남.

    바다에 빠진 기억을 끝으로 눈을 떴을 때 마주했던 그 붉은 머리칼.

    “정신이 들어요?”

    오랫동안 감겨 있던 눈꺼풀 탓에 유난히 요란했던 햇살 사이. 크게 뜨인 벽안이 맑은 호수처럼 느껴졌다.

    오필리아는 자신이 눈을 뜨자 서둘러 제 상태를 확인했다.

    그 부산스러움이 정적인 제 상태와 대비되었다.

    “손에 힘 한 번 줘 볼래요?”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을 닮은 목소리.

    손에 무언가 닿는다 싶었더니 그녀의 손이었다.

    이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또랑또랑하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머, 멀쩡하네요. 이만 놔줄래요?”

    그제야 이안은 제가 경황이 없어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을 빼고 손을 드니 얇은 손이 붉어진 채 제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제게 붙들려 있는 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즈음에서야 이안은 입술을 뗐다.

    “당신은 누구지?”

    “오필리아 밀레세트예요. 당신을 구한 사람이고요. 이제 정말 놔주지 않겠어요?”

    그 물음이 정중한 만큼 정확히 반대의 행위를 하고 싶으니 이상한 일이다.

    이안이 조금만 더 예의를 몰랐더라면 그는 오필리아를 필히 당겨 제 품에 한 번 안아 보았을 것이다.

    한 번도 누군가를 원해 본 적 없는 몸뚱이가 기이하리만치 그녀에게만큼은 이끌렸기에.

    그 붉은 머리칼이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이끌림의 일종이겠거니.

    이안은 오필리아의 손을 놓아주며 생각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그 추상적인 이끌림을 단어로 명명하게 된다.

    사랑이라고.

    그걸 깨닫게 된 것 또한 그리 평탄한 일은 아니었으나, 제 감정에 대해 토로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결국 그 단어밖에는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안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그는 오필리아의 둥근 눈매에 입 맞추고 싶었다.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담길 바랐고,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것이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오필리아를 품에 안으면 바다에 처음 올랐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사랑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안의 감정이었을 뿐.

    이안의 갈망과 달리 오필리아는 이안을 사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랑의 언어를 속삭여도 오필리아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날 사랑해, 오필리아?”

    “그럼요.”

    가볍게 뱉어지는 긍정을 신뢰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잔잔했다.

    호수 같다는 말은 옳았다. 그녀는 파도치지 않았다.

    격랑 이는 바다처럼 사랑한 이안과 달리 오필리아는 바람 한 점 없는 담수에 가까웠다.

    청혼을 받을 때도, 그를 허락할 때도. 그녀는 언제나 잔잔했다.

    그래도 이안은 그녀의 말을 신뢰하려 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요?”

    만약, 그녀가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를 듣지 못했더라면.

    상대는 남자였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당신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그렇게 결혼하면 당신은 분명 후회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는 데 내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안이 날 사랑하는데.”

    그 이후의 대화는 듣지 못했다.

    차마 들을 자신이 없어 돌아 나왔기에.

    오필리아의 말은 분명 제 사랑을 이용하려 드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굳이 두 번까지 들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안은 오필리아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녀가 나를 구했으니, 나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자신을 이용하려 했던 것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빚진 것을 갚는다 생각하면 그리 뼈아프지도 않았다.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그녀도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러나 결혼 이후.

    자신을 정말로 구했던 것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기껏 버텨 왔던 것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이안은 그 단발 인어들이 울며 말하던 막냇동생을 알았다.

    붉은 머리에 파란 눈은 흔치 않다.

    언젠가 해변을 산책할 때 길을 잃은 듯 보이기에 인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이 있었다.

    아직 소녀 태를 전부 벗지 못한 듯 보이는 여인이었다. 방긋방긋 웃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오필리아를 닮은 것이 신경 쓰여 도와주었는데, 성격이 정반대라 놀랐던 기억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구했던 사람이고, 그 사실을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기에 죽었다니.

    그 죄책감이, 보답받지 못한 사랑이, 자신의 그릇된 선택이 이안을 짓눌렀다.

    인어의 죽음이 오필리아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를 마주할 때마다 그것들이 되살아나 숨통을 조여 와서, 이안은 그녀와 마주 서 있는 것마저 힘겹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오필리아는 어차피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제 지위만을 사랑해 로넨으로 왔으니 자신이 없어도 잘 지내리라.

    로넨에 온 직후 종종 자신을 찾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발길을 끊었던 것 또한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오필리아는 나를 이용하기만 했다.’

    로넨의 공비가 되어 제 쓸모가 없어지니 이제 더는 찾지 않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오필리아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 오필리아의 앞에서 이안이 깨달은 것은 한 가지였다.

    사랑이 끝났다고 여겼던 것이 그의 방만이라는 사실.

    이안은 오필리아가 잠든 침상을 지키며, 처음 1년간은 이유 모를 비탄과 혼란에 젖어 있었다.

    오필리아가 깨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왜 이토록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그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오필리아가 죽기를 바랐던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그녀가 없는 삶이 이토록 연기 같이 느껴질 거라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기에.

    5년간 이안은 오필리아와 함께하는 것을 극히 꺼려 왔다. 그 소식조차 듣고 싶지 않아 했다.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오필리아를 아주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애초에 로넨은 험준한 곳에 위치한 탓에 북방의 마물들을 처리하러 가야 할 일도 많았고, 무역일로 해상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도 많았으므로.

    물론 성에서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밖에 나가려 한 것은 이안의 결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가 꼭 그렇게 나갔다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오필리아를 찾았다.

    이유는 없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나누어 끼듯, 혹은 철새가 회귀하듯.

    자신을 반기지도 않는 아내를 보아야 떠나 있던 내내 텅 비어 있던 세상에 빛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마주하는 동안 느껴지는 죄책감의 깊이와는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다만 이안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오필리아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회피하려 했으니까.

    “이제 돌아오셨으니 공비님을 만나러 가십니까?”

    언젠가 그의 부관이 이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이안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처음 몇 번은 이안이 와도 깨진 암초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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