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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3화 (53/118)
  • 제53화

    얼마 전, 숲에서 세이렌들을 만났을 때.

    -우린 그냥 다리에 종이를 매단 새가 있기에 잡으려고 했을 뿐이야!

    세이렌들의 항변이 오필리아의 머릿속을 깊게 꿰뚫고 지나갔다.

    다리에 종이를 매단 새라면 연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으므로.

    ‘전서구.’

    물론 다른 이들도 이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세이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오필리아가 전서구에 그토록 날카롭게 반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라딘에서는 전서구를 날릴 사람이 없어.’

    황실조차도 쉽게 개입하지 못할 만큼 동떨어진 영지, 라딘.

    이곳은 사람이 오가기가 워낙 번거로운 탓에 멀리 떨어진 곳에 소식을 보내기 위해서는 인편보다 전서구 쪽을 더 선호하는 곳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 먼 곳과 급하게 소통할 때 쓰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먼 곳과 급하게 소통할 때 쓰이는 방법을 쓰고 싶어 할 사람이, 당장 라딘 성내에 이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하지만 황궁과 오갈 수 있는 전서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필리아와 릴리스 단 두 사람뿐이다.

    결국 가설은 한쪽으로 쏠린다.

    ‘아직 복귀하지 않은 릴리스가 나 몰래 황궁으로 소식을 전했거나.’

    혹은 이안이 릴리스의 도움을 빌려 전서구를 썼을 것.

    어느 쪽이든 상황을 파악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확인을 위해 라딘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안을 찾아갔다.

    물론 알레이가 마탑의 마법사들과 충분히 경계심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안배하려던 의도도 있고, 아직은 그 마법사들을 어떻게 다룰지 판단이 서지 않아 자리를 피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의도는 경고였다.

    ‘그리고 무슨 꿍꿍이인 건지 좀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건 실패인가.

    오필리아는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상대방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굳었던 것이 거짓이라는 것처럼 태연히 턱을 괴고 있었다.

    “……8년이 넘게 지난 일이라. 깜빡 잊었군.”

    “보내기는 보낸 모양이군요?”

    릴리스가 어디로 샜나 했더니.

    이안이 왔다는 소식을 일찍 듣고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오필리아의 질문에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알다시피 나는 누구 아래 있는 게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정말 잊은 것뿐인가요?”

    “그럼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보낸 편지의 내용을 알려 주면 고려해 보죠.”

    “내가 여기, 당신 보호 아래 있음을 당신 부친께 알린 것뿐이야. 귀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당신이 하지 않았어도 내가 할 일인데. 새삼스럽군요.”

    오필리아의 대꾸에 이안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경계 풀어, 오필리아. 내가 설마하니 편지에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라도 했으려고.”

    그의 말에 오필리아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이안은 턱을 괸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는 여유로웠다.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리고 불안정했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평정이 무색할 만큼.

    “……내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당신은 나를 선택하게 될 텐데.”

    이안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낯으로.

    오필리아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테이블 아래 이안의 손은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필리아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그녀가 거절의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는 손 안의 공허를 견딜 수가 없어졌다.

    현재의 오필리아와 죽은 듯 변화 없이 누워 있는 오필리아, 그리고 울면서 자신을 붙들던 날들의 그녀가 쉼 없이 뇌리를 오고갔다.

    -이안, 제발 나랑 얘기할 때 인상 좀 안 쓰면 안 돼요? 당신이 그렇게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아…….

    언젠가의 울음이 또 이안의 미간을 눌렀다. 오필리아는 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하자며 이안의 시간을 가져가 놓고는 몇 마디 하지도 않고 투정을 했다.

    결혼 이후 수습할 일들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이안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는지.

    이안은 당연히 짜증을 냈고, 오필리아는 나란히 언성을 높이다 눈물을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로넨 성 안의 그 누구도 오필리아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어느 날까지는.

    제 편 하나 없는 타지에서 오필리아가 붙들 수 있는 구명줄이 오직 자신뿐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까지는…….

    연상되는 기억들에 다시 낯이 일그러질 뻔했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폈다.

    복잡한 그의 심경과 달리 목소리는 다행히 떨림 없이 나갔다.

    “모든 건 과거와 같이 돌아갈 거야.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날 선택하게 될 거고, 우린 같이 로넨으로 가겠지.”

    “제정신이에요? 방금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거죠? 난 당신을-!”

    와장창!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테이블이 옆으로 넘어지며 그 위에 있던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안이 테이블을 옆으로 세게 밀어 버린 탓에,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침없는 태도로 그는 성큼 다가와, 테이블이 한 다리로 서 있던 자리에 섰다.

    아니, 무릎을 꿇어앉았다.

    일국의 군주라는 이는 오필리아의 앞에서 무릎 꿇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있기만 하면 돼.”

    이안은 오필리아의 두 손을 잡았다.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환한 빛 아래 이안의 낯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월광이 새겨진 눈.

    달을 닮은 한 쌍의 눈동자는 그 우울도, 광기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제야 오필리아는 불현듯 스쳐간 위화감을 곱씹었다.

    조금 전 오필리아의 추궁에 그가 대답했던 말.

    -8년이 넘게 지난 일이라. 깜빡 잊었군.

    오필리아가 로넨의 공비로서 살았던 기간은 5년이었다.

    그것도 햇수를 다 채우지 못한 5년.

    ‘그런데 8년이라고?’

    오필리아의 등골 위로 불안이 내려앉은 순간, 이안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나는…… 당신이 없는 시간을 다시 견딜 자신이 없어.”

    그는 이제 오필리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필리아의 손을 붙든 자신의 손 위로 이마를 묻었다.

    도저히 오필리아를 보고 더는 표정을 무던히 둘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흐느끼듯 말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게 꿈 같아…….”

    이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기를 바라며.

    * * *

    오필리아가 인어의 비늘을 삼킨 뒤.

    정확히 말하자면 오필리아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뿐.

    “진찰하기로는 의식을 잃었다기보다는 잠든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깨어나지 않으시는 건, 아무래도 마법의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의원은 제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게 돌려 말했다.

    이안의 눈치를 본 탓이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잠든 오필리아의 앞에서 도통 낯을 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아한 기색이 자리한 모양이기도 했다.

    분명 로넨 대공이 공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성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어째서 그는 공비의 사고에 이토록 슬퍼하는가.

    아니, 그걸 슬퍼한다고 해야 할까? 그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에 더 흡사해 보였다.

    도저히 이 상황을 믿지 못해 어떻게든 부정하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모양새.

    듣자 하니 로넨 대공이 영지 시찰을 떠난 탓에 공비의 사고를 알아차린 것 또한 이틀가량 늦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 탓에 시작된 비애일까.

    묻고 싶은 것은 많으나 차마 묻지 못하는 것이 이안의 눈에까지 보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오필리아가 깨어나지 못하게 된 이후 그는 반미치광이로 지냈으므로.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이안은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곧 일어나겠지. 그리고 또 잘 지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속인 전적이 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해프닝이 아닐까.

    “관심이 필요해서 그런 거겠지. 며칠 지나면 일어날 거다.”

    당시 이안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오필리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늘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누워 숨만 쉴 뿐.

    제가 관심을 주지 않아서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탑의 주인과도 친분이 있었으므로 제 관심을 끌기 위해 죽은 듯 보이는 마법을 거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안은 그때부터 오필리아에게 시간을 내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생전에 그토록 원하던 이안의 시간을 죽어서야 갖게 되었다.

    “오필리아.”

    그리고 이안은 그제서야, 대답 없는 상대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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