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52화 (52/118)

제52화

“거기 적혀 있는 건 거의 제가 하긴 했는데, 자문을 구하긴 했죠.”

코르넬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문을 구한 이름 몇 개를 술술 읊어 냈다.

그러나 개중에 메르시아는 없었다.

“다들 열심히 도와주셨어요.”

“그래 봤자 알레한드로 님이 안 계시니 연구가 지지부진했겠지.”

“그게 일반적인 속도거든, 예니트.”

“우린 그걸 느려 터진 속도라고 부르기로 했어.”

예니트와 코르넬리가 옥신각신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알레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뭔가요?”

“연구에는 모든 상급 마법사가 참여하나?”

“아, 아니요.”

코르넬리가 고개를 저었다.

“대개 장로분들이나 연구에서 손을 떼신 분들은 참여하지 않으세요. 물론 정말 소수지만요.”

“물론 그 사람들이 손을 보탠다고 연구 속도가 도약을 하는 건 아니라서 굳이 끼울 생각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요즘에는 마탑을 깨우느라 연구가 더뎌지는 것도…… 아.”

코르넬리의 말이 점차 느려지더니, 결국 끝맺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리고 화기애애하던 테이블에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고요를 깬 것은 알레이였다.

툭. 테이블을 짚어 적막을 툭 깨트린 알레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 얘기, 다시 듣고 싶은데.”

* * *

‘알레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오필리아는 흘긋 위쪽을 바라보았다.

알레이가 머무는 곳은 일반 손님용 방으로, 귀빈실보다 한 층 높은 곳에 위치했다.

알레이가 예니트와 코르넬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을 테니 아마 본인의 방으로 갔으리라는 짐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그리 길지는 않았다.

오필리아의 맞은편으로 다가온 상대가 테이블에 차 두 잔을 내려놓았던 까닭이다.

탁.

가벼운 소리에 오필리아는 시선을 도로 돌렸다.

그믐밤을 닮은 검은 머리칼과 월광을 닮은 눈동자.

“당신이 먼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그녀의 맞은편에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뻔했지만, 금세 도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손안에 찻잔을 쥐자 뜨거운 감각이 정신을 가다듬게 했다.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도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날 두고 그렇게 가기에, 내가 찾아가야만 만나 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언질도 없이 찾아온 건가요?”

“당신 개가 그렇게 말하던가?”

이번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개가 아니에요. 알레이가 누군지 당신도 알잖아요.”

“알지. 지금은 한갓 말단 마법사일 뿐이고. 당신이 잠든 침실이나 지키는 신세지. 내 말이 잘못됐나?”

“사람을 개라고 비유하는 시점에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렇게 공정히 헤아릴 수 있는 공주님이시라면 내가 그놈을 그만큼 나쁘게 말하고 싶은 것도 헤아려 줘야지.”

이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여전히 사늘한 감이 남아 있는 낯은 그 지위만큼이나 권위적이었고, 또 그만큼 권태로웠다.

월광이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지금은 한낮인데도.

“오필리아. 그를 가까이하지 마. 언젠가는 당신을 떠날 사람이야.”

“그리고 당신은 이미 날 버린 사람이죠.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보이네요.”

“그래. 당신 말도 맞아.”

“웬일로 이렇게 순순히 물러서는 거죠?”

“그야.”

이안이 느슨히 턱을 괴며 운을 떼었다.

“당신하고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데, 겨우 그딴 이야기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검은 머리칼을, 창밖에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가볍게 훑고 갔다.

바람을 따라 소금 섞인 비누 냄새가 코끝에 감기고,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쏟아진 머리칼이 흔들렸다.

평소 손목까지 내려오는 셔츠나 정복을 깔끔히 차려입은 모습과 달리 지금의 그는 선원들처럼 짧은 팔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둥근 어깨 아래 잘 짜인 근육과 맨 팔이 여과 없이 드러나며 육감적인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럴 때의 그는 대공이라는 지위와, 그에 응당 따라붙는 격식과는 거리가 지극히 멀어 보였다.

축약하자면,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오필리아. 난 당신하고 마주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꿈같아.”

그 사실에 숨이 막혔다. 오필리아는 짧게 끊어 말했다.

“악몽이겠군요.”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는!”

찻잔을 움켜쥔 오필리아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대체 당신이 무슨 낯으로 날 이렇게 대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 당신이 왜 갑자기 이렇게 바뀐 건지 모르겠어요. 날 싫어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왜? 싫어했던 내가 죽으니 후련하지 않던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이안의 낯이 그 대목에서 일그러졌다.

“당신은 내가 당신이 죽으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나?”

“당연하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필리아.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어. 오히려 그 반대를 바랐지. 나는-,”

이안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잠깐 주저하더니, 낯을 쓸어내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이었다.

“……나는, 당신이 잘살 줄 알았어.”

하. 오필리아는 차게 웃었다.

“낙관적이군요.”

“낙관적이었지. 이젠…… 후회하고 있어. 만회하고 싶고.”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인 아미에 주름이 잡힌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지워져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다시 기회가 생겼잖아.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어. 기회를 줘, 오필리아. 나는 아무리 해도…… 당신밖에는 사랑하지 못하겠어.”

내겐 당신밖에 없어.

이안은 간절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의 사랑 고백은 이제 오필리아에게는 어떤 감흥도 줄 수 없는 말일 뿐이었다.

이제 와서 사랑이라니.

도대체 그의 시간이 자신과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는 몰라도, 오필리아는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성의 문제였다.

오필리아는 그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토록 열렬했던 불씨가 어떻게 꺼지는지 그녀는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하여 오필리아는 의문했다.

여기에는 장작이 없는데 대체 이안은 무엇을 태우고 싶어 그토록 뜨거운 걸까.

당신이 사랑했던 여자는 이미 전부 타 버려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해가 안 돼.’

오필리아는 이안의 태도를 상실감으로 치부했다.

뭐든지 잃어버린 뒤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런 감정은 도로 소유하는 순간 사라지기 마련이다.

영원한 감정은 없다. 영원한 약속도.

‘살짝만 일깨워 줘도 금세 알아챌 사실이지.’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필리아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그녀를 사랑한 이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디에서든 사랑받고 싶어서, 그 어떤 종류의 애정이라도 좋으니 마음 붙일 곳을 찾고 싶어서 평생을 떠돌았다.

그럼에도 결국 얻지 못했던 것을, 이안은 고작 한 번의 눈 맞춤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러니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평생을 바랐고 또 더없이 열렬했던 처음을.

그 낯을 사랑했다. 그 표정도. 행동과 몸짓, 목소리까지도.

덕분에 그것들이 비록 제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오필리아는 사랑에 빠진 이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딘가 불안정하기만 해.’

그런 상태로 제게 사랑? 말도 안 된다.

차라리 악몽에 갇히고 말지.

오필리아는 식어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가 놓으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오필리아가 그를 찾아온 것은 그와 재결합이나 논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처럼 무던한 표정으로 오필리아를 바라볼 뿐.

“그러니 그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당신을 찾아온 이유가 있어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봐.”

흔쾌한 승낙에 오필리아가 찻잔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아침부터 어디로 편지를 그리 급히 보냈나요?”

이안의 표정이 일순 굳어 들었다.

“당신이 이곳에 체류 중인 이상 무슨 편지를 보내든 나를 한 번 거쳐야 하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오필라아의 첨예한 시선이 그 의중 모를 낯에 머무르다, 천천히 돌아 다 식은 찻잔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검지가 툭, 찻잔의 테두리를 건드렸다.

“조심했어야죠. 나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으면.”

낙숫물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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