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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49화 (49/118)
  • 제49화

    “순간이동으로 조금씩 거리를 이동하는 걸 우리끼리 짤짤이라고 합니다. 이마저도 물 위에서 쓰기는 위험하니까 뭍으로 먼저 가는 시간이 또 걸렸겠지만.”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마탑과 이곳에는 제법 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위치를 발설할 수는 없어도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는 모양이다.

    오필리아는 잠시 머릿속으로 해역을 가늠해 보다 물었다.

    “그럼 얼마나 더 걸릴까요?”

    “글쎄요, 빠르면 오늘 안으로도 도착할 텐데? 그나저나 성은 어느 쪽인가요? 아무것도 못 먹고 와서 배가 많이 고프네요. 로넨 대공님도 얼른 살려 드려야 할 거 같고.”

    하암. 예니트는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인 로넨 대공의 생사 여부는 처음부터 그녀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다행히 속인 것에 대해 추궁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오필리아가 예니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오필리아.”

    산테가 조용히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성 쪽에 낯선 마력이 느껴지는데. 가 보는 게 좋지 않겠나?”

    “낯선 마력이요?”

    “그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너는 아닐 것 같아서.”

    산테의 말은 옳았다.

    낯선 마력이라면, 예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코르넬리 듀랑.

    ‘그렇잖아도 오래 비우기는 했지.’

    오필리아는 지나온 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아무래도 더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산테가 미소 지어 화답하자, 오필리아는 가볍게 목례하는 것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산테는 이 숲에 올 때부터 세이렌들만 확인하고 둥지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었기 때문에, 작별은 거창할 게 없었다.

    “그럼 나중에 또 일이 생기면 보죠. 알레이, 예니트 씨. 그만 돌아가요.”

    “방향은 이쪽인가요?”

    “맞지만, 마력의 자취를 따라오는 게 빠를 겁니, 아니, 빠를 거다.”

    익숙지 않은 하대에 알레이가 약간 버벅 대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금세 사라졌다.

    숲을 숨죽이게 만들던 이들이 사라지고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공간에, 산테는 무슨 생각에선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세이렌들이 날개를 애용할 거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편견이었다.

    나무가 울창한 이런 숲에서라면 큼직한 날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산테는 지평선이 가슴께를 덮칠 듯 가까워지고, 사방에는 바위밖에는 없는 공간이 나올 때까지 걸어갔다.

    두 팔을 양껏 벌려도 다 닿지 못할 해역이 숨통을 턱 막히게 할 것만 같은 모습.

    그러나 산테에게는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는 사나운 파도가 치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주저 없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그 아래 조각배보다도 작은 암초 위로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산테가 날개를 거두어들이자 빠진 깃털 하나가 수면에 살랑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주워 드는 손이 있었다.

    산테가 주워 든 깃털을 살피는 이에게 툭 말을 건넸다.

    “그런 깃털에는 마력이 없어. 물속으로 가져가면 그리 예쁘지도 않을 테고.”

    “알아요. 그냥 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신기해서 그래요. 나는 마른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젖은 깃털을 바라보던 상대, 아리엘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 * *

    산테는 오필리아에게 그 대화를 듣자마자 바로 그녀에게 왔노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도중, 흥미를 좇는 그의 습성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오필리아가 다시 아리엘을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하고.

    예상치 못한 만남을 만들어 주면 오필리아가 또 칭찬을 해 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인어 공주들이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근처를 지나던 소라게를 붙잡았다.

    -이봐, 집이 좀 작지 않아?

    -게는 만족해요. 게는 몸집을 줄일 거예요. 게는 먹는 걸 줄였어요.

    작고 어린 생물들은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아, 대개 3인칭으로 말하곤 했다.

    특히 세이렌 같은 포식자를 눈앞에 두면 공포심에 질려 더욱 어휘가 짧아졌다.

    -게는 이 집이 좋아요. 놓아주세요.

    -있어 봐. 누가 잡아먹는댔나. 내가 좀 더 큰 집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더…… 큰 집?

    -그래. 말 하나만 전해 주면 이 큰 소라 껍질을 주지.

    -큰 소라 껍질!

    붙잡힌 게의 집게발이 기쁨으로 파닥였다.

    평생 새로운 집을 찾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숙명의 소라게에게 적당히 큰 크기의 소라 껍질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산테의 손에 들려 있는 소라 껍질은 바로 그 이상적인 크기에 해당했다.

    소라게의 동그란 눈이 열망으로 빛나는 걸 보며, 산테는 씩 웃었다.

    -자. 이걸 줄 테니 가서 막내 인어 공주를 여기로 불러와.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해.

    -알겠어요, 알겠어요!

    산테가 놓아주자마자 소라게는 잽싸게 집을 바꾸고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소라게는 새집에 대한 값을 톡톡히 했다.

    산테는 이 숲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절벽 아래의 아리엘을 느낄 수 있었다.

    ‘정작 오필리아가 시큰둥해하는 바람에 혼자 만나러 와야 했지만.’

    불렀으니 얼굴은 비춰 줘야지. 산테는 암초에 걸터앉아 턱을 괴었다.

    아리엘은 젖은 깃털의 맵시를 살려 주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늘 젖어 있으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물 밖의 것들은 너무 신기해요.”

    “성인이 될 때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했던가? 한 번도 나와 본 적이 없어?”

    “정말 그랬겠어요? 한 번은 있죠. 들켜서 엄청 혼났지만.”

    막내 인어 공주 아리엘에 대한 이야기는 바다를 주 거점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제법 친숙한 것이었다.

    몇십 년 전, 수가 적은 인어들의 수장이자 실질적인 바다의 지배자인 인어 왕이 아내를 잃은 사건.

    인어 사냥꾼들에 의해 왕비를 잃은 인어 왕이 몇 날 며칠 내리 비탄에 잠겨 있느라 바다가 한 시도 잠잠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바다가 잠잠해질 즈음에는 왕비가 남긴 마지막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왕왕 떠돌았다.

    몸이 약한 탓에 마력으로 만든 보호막 안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몇 년 째 숨만 쉬고 있던 어린 아이가 눈을 떴다고.

    어머니와 아내를 빼앗긴 비극을 겪은 인어들이 그 아이를 끔찍이 싸고돈다는 것도 함께 들려왔다.

    그런 환경이니 아리엘이 갑갑함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터다.

    “아직 물 밖에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를 때였어요. 언니들이 나 몰래 어디로 가기에 살짝 따라가 봤거든요.”

    아리엘의 세계는 그날 뒤바뀌었다.

    오로지 푸른 물로 가득 차 있던 세상을 살던 아리엘은, 그날의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둘로 뚝 쪼개진 것 같았어요.”

    물이 없는 세상이라니. 천지가 개벽한 듯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아리엘은 금세 물이 없는 세상에 매료되었다.

    아가미를 비집는 부피감 없이도 호흡할 수 있었다. 언제나 몸을 휘감던 압력이 없어 팔을 마구 휘두를 수도 있었고, 수면에서 물방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파문을 그리는지도 볼 수 있었다.

    태양은 둥글었고, 구름은 희었다. 물빛을 한 하늘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언니들은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해서 뭍으로 가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계기일 뿐이에요.”

    “실은 아주 전부터 뭍으로 가고 싶었다는 말인가?”

    “그렇죠. 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산테는 티 없이 맑게 방긋 웃는 아리엘을 가만 보며 타성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비현실적인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아리엘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깃털을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어쩐지 다른 누군가를 덧그리게 되어서.

    -난 마탑으로 갈 거예요.

    부푼 듯한 목소리가 여전히 뇌리를 떠돌았다.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감각.

    오필리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묘하게 속이 답답했다.

    ‘흥미를 좇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말이지.’

    어쩌면 오늘 자신이 기대한 만큼 오필리아의 반응을 듣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산테는 그 감정을 가볍게 치부해 넘겼다.

    마침 아리엘이 깃털을 내려놓고 본론을 꺼내 든 탓도 있었다.

    “그럼, 이제 나를 왜 불렀는지 물어봐도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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