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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48화 (48/118)
  • 제48화

    그는 세이렌들이 떠난 뒤 예니트에게 예의차 가볍게 미소 지어 주었다.

    “상당한 실력자 같은데, 죽이지 않아 준 건 고맙군. 세이렌을 바닥에서 뒹굴게 한 건 썩 마음에 들지 않다만.”

    “척 봐도 어리기에 살렸습니다만, 수장이 직접 올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부드럽게 대할 걸 그랬네요.”

    “오, 날 아나?”

    예니트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레한드로 님과 종종 함께 계셨잖습니까. 기억합니다.”

    “나는 그쪽을 기억 못 하는데, 유감이군.”

    “일 없습니다. 나는 알레한드로 님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산테에게서 무심하게 등을 돌린 예니트가 알레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알레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시니컬한 태도가 다 거짓이라는 것처럼, 그녀는 조금 감격에 겨운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알레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기라도 할 것처럼, 마치 수식을 낱낱이 훑어보는 것처럼 오래도록 알레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정말……, 알레한드로 님이시군요.”

    그 말에 담긴 경애에, 알레이가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이 이름과 경칭이 어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름과 경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익숙함이 생경하다.

    ‘심지어는 이 여자도 익숙하다.’

    그녀 역시 그의 과거에서 필히 제법 무게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본 순간 불가피하게 깨달았다.

    맹렬히 도망치고 싶은 기분과 함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기에.

    -이 칼만 있으면, 아리엘이 인어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 아이는 누굴 찌를 생각은 하지도 못할 아이인데…….

    -왜 하필 수컷 인간을 사랑해서…….

    비탄에 잠긴 인어들이 단검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동생의 선택을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동생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눈들은 어떤 결의에 차 있기까지 했다.

    -반드시 찌르게 할게요.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약속한 대로 당신이 궁금해한 걸 알려 줄게요. 아리엘은 아직 어려서 물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 모르겠지만, 우리는 물 밖을 다니면서 마탑에서 쫓겨난 이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탑주 알레한드로.

    -금기를 어긴 죄로 봉인을 걸어 내쫓았다고 했어요.

    -마탑은 모든 시공간의 위에 있어요. 마탑을 속일 수는 없어요…….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만나야 해요.

    -그들이 해결책을 줄 거예요.

    인어들의 대화는 그 목소리 때문인지 어딘지 노랫말처럼 추상적인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감정적으로 북받쳐 있는 상태였기에 더욱 그러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기억의 단편은 거기서 끝이 났으므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은 으레 두통을 수반한다. 여전한 두통에 알레이는 미간을 좁혔다가 천천히 풀어냈다.

    당장은 기억에 신경을 쏟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눈앞에 감격에 겨운 마법사가 있기에 더욱.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누군지 기억이 나시나요?”

    “……예니트.”

    오필리아가 알려 준 이름을 뱉자, 상대의 낯이 더욱더 환해졌다.

    “맙소사, 정말 기억하시는군요! 그런데 왜 마탑으로 바로 오지 않으셨던 거죠?”

    “기억을 찾기는 했지만 온전치 못해서……. 기억을 전부 찾을 때까지는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

    지금 알레이가 뱉고 있는 말들은 모두 오필리아와 사전에 정해 둔 이야기였다.

    -자, 알레이. 마탑에서 사람이 오면 이렇게 말해요. 기억을 찾기는 했으나 일부라고. 그래서 당장은 마탑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통하겠습니까?

    -물론이죠. 당신이 아무리 연기에 형편없어도, 당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축제를 벌이려고 할걸요.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그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그리워했는데요, 알레이.

    그 말에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어 오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가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추억하기라도 하듯, 라딘 성에서는 어느 방을 가도 보이는 바다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것은 알레이가 눈치챈 오필리아의 몇 안 되는 습관 중 하나였다.

    바다를 향해 있던 낯이 시선을 느끼고 알레이를 향했다.

    -거짓말 같나요? 내가 당신을 그리워했다는 게.

    -……당신이 내게 거짓을 말할 거라 믿지는 않습니다.

    -알아요. 당신이 날 신뢰하는 것. 참 기묘하죠. 나도 당신을 그렇게 신뢰했거든요. 별 이유도 없이.

    오필리아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알레이, 나 당신을 정말 오래 그렸어요. 다시 만났을 땐 정말 기뻤고요.

    그러니 당신을 믿어 보라며, 오필리아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본인의 일에는 웃지 않으면서 알레이를 독려할 때면 유독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미소가 알레이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덕분에 알레이는 제법 능숙한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예니트는 알레이를 만났다는 기쁨에 겨워 알레이의 어색한 대사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탑은 늘 의뭉스러운 일만 하니 그럴 수 있겠네요. 알레한드로 님께서 선택하신 일이 맞는 거겠죠.”

    “그, 그렇지.”

    “그럼 알레한드로 님께서는 여기서 마법사로 일하고 계신 건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 직속 마법사로 일하고 계시죠.”

    그때 오필리아가 끼어들었다. 알레이를 향할 때는 순한 양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던 시선이 오필리아를 향하자 조금 전처럼 다시 차가워졌다.

    “……당신은 누구죠? 아무리 봐도 마법사나 세이렌으로는 안 보이는데.”

    “평범한 인간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가 죽을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안쓰러울 정도로 뻣뻣해진 알레이를 자연스럽게 제 뒤로 밀며 예니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개가 늦었네요. 오필리아 밀레세트에요. 편히 오필리아라고 불러 주면 좋겠고.”

    “예니트 루헨입니다. 당신이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군요?”

    “맞습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알레이 못지않게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가지셨네요.”

    “뭐라고요?”

    잠자코 듣던 예니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 지금 장난해요?”

    “……무슨 문제라도?”

    “제가 감히, 알레한드로 님께 비할 바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말 말도 안 된다고요!”

    “아하, 그쪽이었군요.”

    “알레한드로 님은 천재예요! 타고난 마력 양부터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마법 수련을 시작할 즈음에 알레한드로 님을 처음 뵈었는데, 그때 느꼈죠. 제가 모실 분은 저분 한 분이시라고.”

    “그럼 마탑에서 예니트 씨는 알레이와 가깝게 지냈나요?”

    “제가 알레한드로 님의 보좌를 맡았죠. 넬리 놈은 여전히 상급반 졸업을 못 했지만!”

    “그렇군요. 대단하시네요.”

    오필리아가 빙긋 미소 지으며 예니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예니트가 알레이의 보좌였다니.’

    예상치 못한 월척이었다.

    * * *

    오필리아는 예니트의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로넨 성에서 함께 지내기는 했으나 성은 넓었고, 오필리아의 시야는 좁았으므로.

    예니트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괴짜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겪은 것은 처음인 셈이다.

    괴짜라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코르넬리 듀랑의 상대를 하는 것 정도고.’

    오필리아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세이렌들이 뒹굴었던 자리를 훑었다.

    본디 빳빳이 서 있어야 할 풀들은 세이렌들의 흔적으로 짓뭉개져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선지 그 자리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니트 씨. 얘기를 들으니 코르넬리 씨와 친분이 있으신 것 같던데.”

    “없다고는 못 하겠네요. 예.”

    “그분이 언제쯤 도착하실지는 혹시 듣지 못하셨을까요?”

    “조금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적어도 저희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온 사람이 없었죠.”

    오필리아의 말에 예니트가 쾌재를 불렀다.

    “역시! 제가 빨랐군요. 하긴, 그 애는 짤짤이로 올 테니 좌표가 있는 저를 이길 수는 없겠죠.”

    “짤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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