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아예 자신들과는 태생부터가 남다른 것 같은 알레한드로는 처음부터 질시의 대상조차 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붙어서는 10년 넘게 걸리는 연구를 몇 달 만에 끝낸 분이 안 계신데 무슨 발전이 더 있겠어? 나는 나갈 거야. 돌아오시면 그때 돌아올게.”
제법 매정한 말이었으나 본심에서 가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니트의 친구 역시 마법식의 대가였지만, 발상이 독특할 뿐 실력은 예니트와 엇비슷했다.
그는 예니트가 마탑에 남을 만한 이유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렇게 예니트는 짐을 싸서 교역자로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곳, 로넨 성으로.
마법사는 어딜 가나 환영받는 인력이었기에 정착이 어렵지는 않았다.
로넨은 북쪽 사람들 특유의 무관심이 팽배한 곳이라 예니트가 적응하기 더욱 쉽기도 했다.
‘그렇게 벌써 5년짼데.’
시작은 어제 도착한 친구의 편지였다.
예니트가 궐련의 재를 툭 털며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세워 책상 위의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코르넬리 듀랑.
그 특유의 산뜻하고 톡톡 튀는 성격이 다분히 묻어난 편지의 내용은 분명 길었으나, 요약은 한 줄로 줄일 수 있었다.
[예니트, 알레한드로 님께서 기억을 되찾으셨대! 내가 그분을 모시러 가기로 했어!]
처음 받았을 때는 정말 놀라서 심장을 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어디에 계신 거냐고, 나도 함께 가겠다고 당장 답장을 썼지만 대답이 없었고.
그렇게 흥분에 젖어 있을 때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마법사님, 편지가 왔네요.”
“누가 보낸 건가요?”
“그게, 안 쓰여 있어서요. 로넨 성의 마법사에게 온 편지라고만 쓰여 있네요.”
처음부터 수상한 편지. 열어 본 봉투에는 ‘오필리아 밀레세트’라는 거창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부러 발신자를 봉투 겉면에 적지 않은 것이다.
그 수상쩍은 편지의 내용 역시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넨 대공이 난파를 당해? 위독?”
로넨 대공, 이안 카를레 로넨은 따지자면 예니트의 고용주였다. 그러니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당장 타지로 가야 했다.
하지만 밀레세트 제국이라니. 멀어도 한참은 멀었다.
로넨 공국은 밀레세트 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메이너드 대륙에서 가장 끝자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륙으로 향하는 길에는 험준한 산맥이 자리하기까지.
그 탓에, 로넨에서 밀레세트를 오려면 육로보다 해로가 훨씬 빠르고 간편하다는 특이점이 생겼다.
다만 빠르다는 것 또한 상대적인 개념이라, 둘 사이에는 짧아야 일주일가량의 거리가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순간 이동만으로는 갈 수 없는 이상 예니트는 배편을 이용해야 했고, 당장 채비해도 떠나기까지는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책상 위에 또 다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사용인이 두고 간 건지, 이틀 만에 세 통이나 편지가 오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예니트가 하품을 하며 편지를 열었을 때는 다시 같은 발신자가 보였다.
오필리아 밀레세트.
왜인지 알 수는 없어도 참 거창하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내용은 낮에 온 것과 얼추 비슷했다.
로넨 대공이 위독하니 서둘러 와 줄 것.
그러나 서두른다고 해 봐야 일주일이 걸릴 거리이기에, 예니트는 무던히 편지를 버릴 종이 무더기에 던지려 했다.
만약 그 밑에 적힌 추신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하여, 그대의 도움이 현재 절실합니다. 받는 즉시 준비해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보다 빠른 이동을 위해 이곳의 좌표를 수식화해 보냅니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는 출발하는 지점의 좌표와 도착하는 지점의 좌표 수식이 필요했다.
대개 이 과정이 번거롭고 어렵다.
장소를 수식화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법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상하게 날아든 편지와 순간 이동용 좌표 수식이라니?
예니트의 시선이 마지막 편지의 추신에 첨부된 수식을 훑었다.
언젠가 알레한드로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알레한드로 님의 좌표는 굉장히 독특하네요.
-그런가?
-네. 세 축에 해당하는 기호들이 없는데요. 이게 어떻게 제대로 먹히는 건가요?
-아마 방식의 차이겠지. 어차피 마법식은 말이 통하기만 하면 되니까.
다소 규격을 벗어나더라도 그 장소를 마법식에 제대로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고 알레한드로는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틀림없는 알레한드로의 수식이었다.
‘분명해.’
알레한드로 님이 돌아오시는 거다.
예니트는 기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다 타 버린 연초를 던져 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에 편지를 구겨 넣은 채, 서둘러 가운을 걸치는 모습이 상당히 조급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식을 그리러 가야 했으므로.
벌컥 문을 열고 나간 예니트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시종장, 오늘 출항은 취소라고 전해 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사님? 대공님께 가는 게 아니셨어요?”
“가긴 갈 거야!”
“지금은 또 어딜 가시는데요?”
“공터!”
마법식을 그리려면 건물 한 채 정도의 크기의 공터가 필요했다.
아마 며칠은 꼬박 쉼 없이 그려야 전부 그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무슨 기막힌 우연인지, 예니트는 그간 이동 마법진의 개량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그 말은 곧, 좌표가 비워져 있어 조금만 고치면 바로 사용이 가능한 이동 마법진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예니트는 신이 났다. 그녀는 정말 모처럼, 소리 내어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코르넬리보다 내가 먼저 그분을 만나러 갈 거야!
아침부터 유쾌한 웃음소리가 로넨 성을 울렸다.
* * *
그렇게 다시 현재.
“그래서 제가 먼저 온 거죠. 개량 중이던 식을 고쳐서 썼더니 어디가 잘못된 건지, 이런 숲에 떨어지고 말았지만요.”
예니트는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끝냈다.
어쨌든 본인이 라딘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오필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의문했다.
“알레이.”
“예.”
“혹시 마법사들은 다 저런 괴짜인가요?”
“다들 저를 괴짜라고 많이들 부르기는 하더군요. 저는 마탑에서 지극히 평범한 축에 끼었는데 말입니다.”
“저 정도면 저 역시 평범하다고 느낍니다, 오필리아.”
“나는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니 말을 아끼지.”
오필리아는 불현듯 이들 틈에 있다가는 평범함의 기준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받았지만.
“……그렇군요.”
무시했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일단은 조금 전까지 예니트가 바닥에 꿇려 놓은 세이렌들의 항의가 만만찮기도 했고 말이다.
“나를 바닥에서 뒹굴게 하다니!”
“산테, 인간은 다 이렇게 세?”
“날개가 꺾이는 줄 알았어!”
예상은 했지만,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킨 것은 오필리아의 연락책들이었다.
제일 어린 딜로가 제일 우는 소리를 했고, 아셀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삐죽이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 산테가 아니었지만.
“너희가 약한 걸 이제 알았냐? 알았으면 적당히 둥지로 돌아가. 그러게 뭐 하러 애먼 놈을 건드려?”
“아냐, 산테! 우린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야! 마력 파동이 궁금해서 온 거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둘째인 딜로가 억울하다며 소리쳤다.
“우린 그냥 다리에 종이를 매단 새가 있기에 잡으려고 했을 뿐이야!”
“맞아, 종이를 살짝 엿보려고 한 거 말고는 한 게 없어!”
“그러다가 저 암컷이랑 부딪히긴 했지만, 일부러 부딪힌 것도 아니었고!”
“나쁜 뜻은 정말 없었다고!”
“그래서 나도 나쁜 뜻 없이 잡았습니다. 여기가 라딘이 맞나 궁금해서.”
예니트가 손을 탁탁 털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정말 세이렌들에게는 조금도 악의가 없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가는 방법만 좀 듣고, 가능하면 좀 데려다 달라고도 하려고 했는데 죽어라고 울어 댄 게 누굽니까.”
“붙들린 건 처음이었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릴 거라고도 했잖아요.”
“그건 당연하지! 죽여 버릴 거야!”
반성의 기미란 조금도 없는 세이렌들의 태도에, 예니트가 거 보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예, 뭐. 대충 그런 일이었습니다. 세이렌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겁만 주고 돌려보내려고 했죠.”
“뭐가 어쨌든 약한 놈이 잘못이지.”
산테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자, 세 세이렌들의 시끄러운 입이 딱 다물렸다.
어딘지 기시감이 드는 듯한 모양새로, 세이렌들은 숲에서 내쫓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산테는 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