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의아할 만큼 명료한 욕망이었다.
‘아마도 시야가 넓어진다는 게 이런 의미겠지.’
로넨에서 바뀌지 않는 것들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어느 공비는 결코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마력을 느낀다는 것은 오감을 제외한 또 다른 감각을 얻는 것과 같았다.
오필리아는 이제 알레이와 산테가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를 이해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편의 절벽 쪽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태풍의 눈이 가장 고요하듯, 고요의 중심에 억눌린 소란이 있었다.
감각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당신들이 말하던 게 저 부근인가요?”
“맞아.”
훌쩍 땅으로 내려온 산테가 말했다. 그는 어딘지 의아한 듯, 혹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오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지, 전에 나한테 끼웠던 것 맞지. 마력을 차단하는 거.”
“맞아요. 아리엘의 마력이 내게도 흐르고 있으니 차단해 둘 필요가 있어서 끼고 있었죠.”
“그건 알지만, 흥미롭군. 단순히 마력을 풀었다고 이런 장소의 마력을 바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밀레세트의 황족은 마력 친화도가 높으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자리를 이동해 온 알레이가 오필리아에게 다가오는 산테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산테는 그것이 불쾌한 듯 느슨히 무기질적인 시선을 알레이에게로 옮겼다가, 이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인간에 대해서라면 네가 잘 알겠지. 그보다, 아직 알아챈 사람은 없나?”
“무엇을?”
알레이의 물음에 산테가 서편을 가리켰다.
“저기에 막이 있다는 것 말이야. 아마 아까 그 마력 파동을 만든 놈의 소행인 것 같은데.”
“탐지 마법을 시도하지 않아서 몰랐습니다만, 세이렌은 그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인어만큼 탐지에 능하진 않지만, 느껴지니까. 억눌린 느낌이 있거든.”
무언가 억눌린 느낌. 오필리아가 느낀 것과 정확히 같았다.
‘설마?’
오필리아는 홀린 듯이 걸어 나갔다. 그녀의 오감을 제외한 또 다른 감각이 이끄는 대로.
걸어 나갈수록 마치 들끓는 파도를 통 안에 가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주변의 고요함이 의아하게 느껴질 만큼 거세게 요동치는 무언가를 억누른 듯한 괴리.
탁. 오필리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손을 뻗자, 투명하게만 보이던 공간에 무언가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 든다.
찾았다.
확신에 찬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부르기 위해 몸을 튼 순간.
“이런 보호막에는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오필리아.”
등에 무언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은 팔도.
귓가에서 속삭여진 알레이의 나직한 말소리에 오필리아가 아, 하고 소리를 뱉은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부유감이 들었다. 막에서 무언가의 폭발이 일고, 그 여파로 오필리아가 튕겨 나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튕겨져 나갈 뻔’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보호막은 방범을 목적으로 하기에, 건드려지는 순간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필리아는 부유한 그대로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허공으로 날아오른 알레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놀란 오필리아와 달리 알레이는 태연했다. 아니,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에 없이 날카로운 표정을 한 알레이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손을 뻗었다.
“보호막이 있다는 걸 들었으니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오필리아가 이렇다 할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알레이가 손을 뻗었다.
우수수.
근방의 나뭇잎이 일제히 흔들리며 밀밭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큰바람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찰나가 지나고,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바닥에 짓눌린 어린 세이렌 셋과, 그들의 앞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짧은 곱슬머리의 여자 하나.
오필리아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로넨 성의 마법사, 예니트였다.
* * *
붉은색의 짧은 곱슬머리를 한 로넨 성의 괴짜, 예니트는 오늘 아침 편지를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근래 기묘한 일들을 겪고 있었다.
첫 번째. 그녀를 찾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며칠 사이에 편지가 세 통이나 오다니,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 달 내내 연락이 한 통도 없었던 적도 있는데 말이지.’
예니트는 마탑 출신이었다. 그 사실은 곧 바꾸어 말하자면, 이 메이너드 대륙에 그녀를 아는 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간혹 어렵사리 마탑의 위치를 찾아내 마탑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또 어떨지 몰라도, 예니트는 마탑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으므로.
굳이 말하자면 마탑이라는 작은 섬나라에서 살다가 대뜸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땅덩이에 터를 잡은 경우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게 해도 관계를 만들며 지내는 사람들은 있다지만, 예니트는 정말 전형적인 마탑 사람이었다.
마법 연구와 탐독에 빠져 주변과의 교류를 등한시하는 사람.
마법 실력과 사회성을 등가 교환한, 세간에서는 흔히 괴짜라고 표현되는 경우.
그게 예니트였다.
‘그 사실도 마탑을 나와서야 알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마탑에는 예니트보다 더한 괴짜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예니트 정도면 상당히 무던한 축에 속했던 탓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예니트 본인의 생각이기는 했다.
예니트는 책상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향초를 만 궐련을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비뚤어진 안경 너머 무심한 눈이 뿌옇게 물들어가는 허공 위로 회상을 덧그렸다.
마탑에서 나가기 위해 짐을 싸던 중 유일하게 친구라고 할 법한 이와 나누었던 대화.
“예니트, 뭐 하러 마탑을 나간다고 해? 그렇잖아도 교역 때문에 이제 막 들어왔으면서……. 좀 쉬었다 다시 생각해도 좋잖아. 고향인데.”
“어, 여기 돌아오니까 바다 냄새랑 마력석 가루 냄새 매캐한 게 딱 답답하고 좋더라. 다 맡았으니까 이제 가려고.”
“그러니까 왜? 나가서 살고 싶은 곳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런 건 없는데 한 번 나갔다 오니까 마탑이 얼마나 답답한지 느껴지는 것 같아서. 교역하러 간 곳에 정착할까 싶어. 거긴 공기가 차고 맑거든.”
“정말 그 이유뿐이야?”
예니트의 친구는 생긴 건 더럽게 말랑하고 성격도 덜렁대는 주제에 이상한 데서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예니트는 울망한 표정으로 자신을 붙드는 친구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가만두면 계속 오해할 거 같으니까 일단 이건 짚고 넘어가자. 나는 전부터 마탑이 답답했어. 괜히 교역자로 나가겠다고 지원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건 알아, 하지만.”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는 땅도 넓어. 창밖을 봐도 물이 아닌 땅이 있는 곳이 있다니까? 멋지지 않아?”
“난…… 난 잘 모르겠어. 그 사람들은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오히려 박해하고. 밖에 나가면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테고, 지금처럼 모여서 연구할 수도 없을 텐데.”
“나 없는 동안 알레한드로 님이 추방당하셨다면서.”
조잘거리던 친구의 입이 우뚝 멈추었다. 순식간에 풀이 죽는 것이 예니트의 눈에도 보였다.
“……맞아. 마탑의 결정이었어.”
“제 주인을 내쫓는 집이 어디 있냐? 알레한드로 님이 안 계시면 나는 이곳에도 별 흥미 없어.”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예니트와 그녀의 친구를 비롯해 다른 많은 마탑의 사람들과 달리 마탑의 바깥에서 들어왔다고 알려진, 불세출의 천재.
원로들은 어떨지 몰라도 마탑의 젊은 층은 모두 그를 존경했다.
그것은 비단 알레한드로가 좋은 지도자라서는 아니었다.
마탑의 서로가 동료이자 경쟁자이며, 동시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레한드로가 개발한 마법식만 벌써 두 손을 넘었다.
그가 개량한 마법식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마법식을 보는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자체적으로 가진 마력 역시 세이렌의 수장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했다.
게다가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연구를 남들과 공유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그를 시기하던 자들도 점차 그 남다름에 고개를 수그리게 되었다.
무릇 질투란 자신과 엇비슷하게 잘난 자에게 향하기 마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