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그 얘기를 안 했나? 수상한 마력 파동이 느껴져서 말이야. 디안, 못 느꼈어?”
“절벽이 있는 쪽이라면, 내가 굳이 탐지 마법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각은 참 무디다니까. 나는 한참 더 떨어진 해안에서도 느꼈는데.”
산테가 으쓱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마력 파동이야 별로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만. 무슨 재밌는 일이 있나 하고 어린 세이렌들이 튀어 나가서 돌아오질 않기에 좀 잡으러 갔지. 일단은 우리가 개체수 적은 종족이라.”
“그래서 잡았나요?”
“가다 얘기를 듣고 이리로 왔지.”
“개체 수가 적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로 죽는 약한 놈은 무리에 필요 없다.”
산테의 말에 알레이와 오필리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오필리아 쪽이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걸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것 같네요.”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 봐야 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신은 어때요, 알레이?”
“수상한 마력 파동이라면 갈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오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산테가 지나쳐 온 곳에 분명 무슨 일이 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 파동의 정체를 어쩐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올 때가 됐지.’
마탑에서 온다던 코르넬리 듀랑, 혹은 예니트.
과연 누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오필리아는 흘긋 창밖을 보았다.
해가 제법 기운 시각. 다행히 필요한 일은 얼추 해 두었고.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릴리스가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
와야 할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부분일까.
오필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한 번 가 보죠.”
* * *
청록색 숲.
우습게도 이것이 오필리아가 향한 숲을 부르는 말이었다.
정확한 명칭이 따로 없이, 숲이 바다 인근에 있어 푸른빛을 먹어 청록빛을 띠는 탓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물살이 세고 파도가 센 절벽까지 쭉 나 있는 숲은 나무가 사람 키 정도로 보일 즈음부터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인가와 동떨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하기에는 이만큼 좋은 곳이 또 없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만큼 위험하지만.’
가끔 사냥꾼들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오필리아는 제 몇 배는 되는 나무를 짚고 서서 나무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은 숲을 둘러보았다.
쏴아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자 오필리아의 붉은 머리칼이 단풍잎처럼 흩날렸다.
‘고요한 숲이군.’
오필리아가 이 숲에 와서 느낀 감상은 이러했다.
그녀에게는 그저 바다 특유의 짠내와 풀냄새가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하기까지 한 숲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테와 알레이에게는 느껴지는 바가 다른 것 같았다.
“거의 다 왔군요. 저 부근입니까?”
“확실히 느껴지지? 그보다 존댓말은 슬슬 그만두면 안 되겠나? 네게 존대를 들으려니 어색한데.”
“싫습니다. 오필리아,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그보다 뭐가 느껴진다는 거죠?”
“숲이 숨죽이고 있습니다.”
오필리아가 선 곳으로 성큼 다가온 알레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려오는 걸 도우며 말했다.
“숲이라면 그에 걸맞은 소란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토록 고요하다는 건 소란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경험으로 알게 된 건가요? 아니면 마력을 통해서?”
자박, 자박. 두 사람의 걸음에 맞추어 소리가 났다. 휘익 날아 뒤따라온 산테가 나뭇가지 하나를 뚝 부러뜨리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둘 다지. 마력을 느끼는 건 육감 쪽의 문제라, 그런 쪽이 예민하면 자연히 느끼게 돼. 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
“글쎄요…….”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끼워진, 마력을 차단하는 반지.
문득 그게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필리아는 반지를 천천히 뺐다.
그리고.
“……아.”
단순히 반지를 뺐는데 이토록 숨통이 트인 느낌이 들 수 있을까?
그저 암녹색의 스산한 수림이었던 숲이 어떻게 변모하는지가 시시각각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바람에 섞인 조잘거림이, 나무 둥치에 난 이끼의 이슬이 오감을 간질이는 기분.
그것은 결코 상쾌하기만 한 감각은 아니었으나, 그 변화 자체가 새로웠다.
몇 발짝 다가온 알레이가 말했다.
“황족은 마력에 대한 친화도가 높으니 분명 무언가 느껴지실 겁니다.”
“……느껴져요. 이게, 이 숲의 마력인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인적 드문 곳은 느끼기가 쉽죠.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감각이 흐려지기 마련이라.”
“그래도 당신은 느꼈을 것 아니에요. 이런 것들.”
매번 마력이 어떠니 이야기를 했으니까.
오필리아처럼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산테나 알레이는 이런 것들을 늘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들은 정말,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군요.”
모르는 것들을 알아갈수록, 좁았던 시야가 넓어질수록 세상은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빛을 띠었다.
오필리아는 문득 그 빛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 마법을 배울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어.’
산테가 오기 직전, 오필리아가 알레이와 마법식 연구 자료들을 앞에 놓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마법에 대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울 용기를 냈다고 해야 할까.
신전의 마법 탄압 때문에 세간에 마법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대부분 눈에 드러날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몇몇 양성소로 들어가 마법사가 되어 나오는 정도.
그러니 그런 쪽에서 재능을 보이지 못한 오필리아는 처음부터 마법을 배우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었는데.
지난밤 계기가 생겼다.
알레이와 조건식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던 때.
-조건식 마법은 무슨 결과를 내든 모두 식이 하나입니다.
알레이는 종이 한 장을 끌어와 그 위에 길게 수식을 적었다.
오필리아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로만 이루어진 수식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사이사이 비어 있는 공백들을 확실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원래 비어 있는 건가요?
-여기가 결괏값이 들어가는 부분이고, 여기가 범위와 대상자를 설정하는 부분, 여기는 시전자를 규정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마법식이라면 이 상태로 마법을 시전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혹은 대참사가 일어나거나.
그 말을 들으며 오필리아는 문득 낮에 들었던 코르넬리 듀랑에 대한 산테의 말을 떠올렸다.
-그놈이 글쎄, 모래를 유리로 바꾸는 마법식을 실험해 보다 실수로 범위 계산을 안 해 둔 바람에 마탑의 유리창을 죄 모래로 바꾸었다더군.
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되는 건가 했더니.
마법식을 보고 나니 오필리아도 어느 정도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식이 여기서 모여야 하는데, 범위를 설정하는 부분이 빠져 있으니 모이지 못하고 전부 빠져나가겠어요.
그리고 시전자를 규정하는 부분이나, 결괏값이 들어가는 부분도 그렇다.
어째서 이 식이 이토록 불완전해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잎맥 없는 나뭇잎, 바닥없는 호수를 보는 기분.
분명 아는 것인데, 뭔가 중요한 것 하나씩이 빠져 있었다.
오필리아는 잠깐 식을 보는 것에 골몰하다, 문득 상대가 대답이 오래 없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알레이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인 거지? 오필리아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뭔가를 잘못 말했나요?
-그 반대입니다. 이 식의 구성이…… 보이십니까?
-구성이라면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아요. 평면적이지는 않은 구조 같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수식이라는 형태로 나열하지만 마법식은 사실 입체적인 구조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알레이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선천적인 시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황족은 마법에 대한 친화도가 높은 핏줄이라 알려져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수롭지 않은 투로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부분은 오필리아의 숨겨진 재능이 아니라 조건식 마법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러니 이 화제에 너무 오랜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말에 고무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마법에 선천적인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니.’
마법식에 대해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