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42화 (42/118)
  • 제42화

    깨어나지 않는 오필리아 앞에서 알레이는 이안과 다를 바 없이 비탄에 젖었다.

    그 사실이 이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제가 대체 오필리아의 무엇이기에 남의 아내의 사고에 저렇게 슬퍼하는가?

    하는 것만 보자면 당장 소생술을 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놈이 정말 뭐라도 한 건지.’

    이안은 빈손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도로 폈다.

    이유야 어쨌든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 역시도 최대한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알레한드로도 떨어트려 놔야겠어.’

    그의 촉이 알레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경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오필리아의 방에서 나오는 알레이를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오필리아가 알레이와 같이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부아가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말이 없으니 이용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좋으련만.’

    아쉬운 게 있다면 그것이었다.

    어떻게 구해 볼까, 이안이 고민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대공 각하?”

    낯선 부름이 들렸다. 눈을 굴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정말 각하시군요! 돌아와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나 몰라요! 조난을 당하셨다면서요!”

    연한 밀색 머리칼의 여자.

    바로 릴리스였다.

    * * *

    조금 전.

    “그러니까, 전하께서 그…… 그분을 해변에서 구해 오셨다고?”

    “조난당한 모양이더라고요.”

    하녀장의 말에, 릴리스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사실 이안을 본 직후 내내 그랬다.

    복귀 후 층계를 오르다,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안을 목격했을 때.

    이런 남부에 있을 리 없는 새카만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이 있기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서 흘끔 바라보았는데.

    문제는 그 상대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이안 카를레 로넨.

    혹시나 해서 근처를 지나가던 하녀장이 보이기에 물어보았더니.

    “로넨 사람은 처음 보는데, 정말 잘생겼죠.”

    그녀의 눈은 빗나가지 않았다.

    릴리스는 저도 모르게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로넨 대공이 조난을 당하다니.”

    거기다가 그걸 구해 온 사람이 바로 직전에 그와 스캔들이 났던 오필리아라니?

    “배를 자주 타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일이 아니라던데.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죠.”

    하녀장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지만.

    릴리스는 확신했다.

    카델리아에게는 이 일이 분명 중요한 문제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카델리아 전하께 빨리 이걸 알려야 해!’

    그럼 카델리아가 분명 난리를 칠 테고, 일을 잘한 자신을 치하하며 이 한직에서 꺼내 줄 것이 분명했다.

    생각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는 기분이다.

    릴리스는 등 뒤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편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일을 황궁에 전해야겠군. 혹시 황녀 전하께서 먼저 연락하셨나?”

    “아니요. 대공께서 정신을 차리면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시던걸요? 그분의 의사를 여쭈어야 할 것 같다고.”

    “아, 옳으신 말씀이야.”

    평소 까칠하게 굴던 것과 상반된 공손한 태도였다.

    물론 속까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의사를 묻기는 무슨.’

    본인이 대공을 가로채려고 그러는 거겠지.

    릴리스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오필리아는 대공과 구면이었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스캔들도 있었고.

    당시에도 오필리아가 로넨 대공에게 꼬리를 쳤다는 여론이 우세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라며, 릴리스는 속단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릴리스는 웃는 낯으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대공께서 혹 어느 방에 묵고 계시는지 아나?”

    “이 층의 끝 방에 계실 거예요.”

    릴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고는, 서둘러 이안을 찾아갔다.

    ‘카델리아 님께 이걸 잘 알리면 이 시골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하는 알량한 기대와 함께.

    * * *

    그렇게 다시 현재.

    이안은 제 눈앞에서 종알대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황궁 연회에서 한 번 뵈었었는데.”

    묘한 기대로 상기된 얼굴.

    조잘거리는 낯이 제법 익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머잖아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릴리스 메일리, 라고 했던가.”

    “어머, 정말 기억하시는군요!”

    물론 기억한다. 오필리아의 직속 부하였으니.

    이안은 릴리스에 대해 말하던 오필리아의 목소리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릴리스 그 애는 황실의 감시자예요. 내 부하라고는 하지만 날 눈엣가시로 여기거든요.

    -그래? 이젠 줄을 잘 서야 할 텐데.

    이안은 그때 그렇게 답했다. 오필리아가 제 연인인 이상 오필리아가 여태 받아온 멸시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오필리아는 그때 웃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평화로웠던 한때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낯 위로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다시 만나 반갑군.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황궁에 연락을 좀 취하고 싶은데. 가장 빠른 편으로.”

    “물론 괜찮죠. 마침 저도 연락을 드릴 일이 있었거든요! 가장 빠른 편이면 전서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 여긴 인편이 느려서 말이에요.”

    “좋을 대로.”

    이안이 잘 재단된 미소를 지으며 릴리스를 안으로 들였다.

    머잖아, 라딘 성의 창문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 * *

    그날 오후.

    “로넨 대공과 구면이냐고요?”

    “예. 아는 분이십니까?”

    질문을 받고 오필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마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 틈이 곧 증명이었다.

    ‘구면이신가 보군.’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 남자가 오필리아를 부르는 건 몹시 익숙해 보였으므로.

    알레이는 손등에 턱을 올려놓은 채 손끝을 까딱이며 오필리아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어쩐지 속이 거북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 불청객이 돌아간 이후 알레이는 침상이 아닌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가 알레이의 속을 죄 뒤집어 놓아 차마 그 앞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정 궁금하면 오필리아에게나 물어보지 그래. 내가 그녀와 무슨 관계이고, 너는 뭘 모르는지.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의 멱살이라도 붙잡아 묻고 싶었지만, 알레이는 충동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논리를 좋아했다. 기억이 없어도 취향은 확고했던 탓에, 마법에 통달하게 된 것 역시 그 취향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될 만큼.

    마법은 모든 부분이 규격화되어 있었고, 오로지 식이라는 정리된 틀 안에서 소통했다.

    굳이 복잡한 감정이나 대화가 필요 없어도, 기호를 알아볼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식을 보고 시전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레이는 그 정돈됨을 좋아했다. 연구에 몰두하는 감각 역시.

    현재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일반인은 알아볼 수 없는 기호가 난잡하게 적혀 있는 종이가 여럿이었다.

    모두 알레이가 마법식을 연구하느라 소비한 종이들이었다.

    ‘조건식 마법의 조건을 알아내는 건 아직도 멀어 보였지만.’

    알레이가 연구하는 마법식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의 기억을 앗아간 조건식 마법의 파훼법.

    오필리아에게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오필리아에게 설명한 조건식 마법과 알레이에게 걸려 있는 것은 조금 궤가 달랐다.

    보통의 조건식 마법이 소망을 잠시 이뤄 주고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마법의 시효가 끝나면 그 대가를 앗아가고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에 반해.

    알레이에게 걸려 있는 마법은 여타 조건식 마법과 달리 시효가 없었다.

    대신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내야 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수차례 스스로의 몸에 탐지 마법을 걸어 알아낸 결과, 아무래도 형벌의 일종으로 개량된 방식으로 보였다.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만 끝이 난다는 점에서 조건식 마법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지.’

    그러니 그 역시도 기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알레이는 마법식의 연구를 통해 파훼법을 찾고자 했다.

    문제는 그것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