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잠들어 있을 때도 상당한 체격이라 생각했는데.
의식을 찾은 그는 가히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거칠게 깎인 암초를 연상시키면서도, 어딘지 노기 어린 광기가 엿보이는 낯.
알레이는 스스로가 사람의 첫인상을 바로 짚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 조금 놀랐다.
그는 지극한 개인주의자였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만큼 그 인상에 대해서도 별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는 편이었으므로.
그런데도 이렇게 명확히 짚어 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그러한 면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그런 점을 굳이 짚는 게 더 우습긴 했다.
지금 사내는 누가 보기에도 당장 알레이의 멱살을 붙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상대가 인내심을 한계까지 쓴 게 역력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묻는 말에 대답 안 하나? 네가 왜 오필리아의 방에서 나오느냐고.”
“상사의 명으로 잔업 하다 나왔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썹 하나 까딱할 알레이가 아니었다.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어쨌든 부탁을 들어주다 온 것이니 따지자면 잔업이다.
상대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하, 차게 웃은 남자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시각에, 굳이 오필리아의 방에서 잔업을 해? 추문 날 것은 생각 안 하나?”
“추문 날 걸 걱정하시는 분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십니까?”
“찾아오는 것과 방에서 나오는 건 다르지. 오필리아와 무슨 관계이기에?”
“그냥, 부하입니다.”
대답하고 보니 입이 좀 쓴 것 같기도 했지만, 자유분방한 입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사실 오필리아가 잠들어 있는 방에 끼어든 불협화음으로 조금 짜증이 나 있었던 탓에, 그렇잖아도 썩 둥근 편이 아닌 알레이는 지금 유난히 모난 상태였다.
‘황궁이 아니니 몰랐다는 말로 무례를 얼버무릴 수 있기도 하고…….’
얼추 상황을 가늠한 알레이가 등 뒤로 문을 닫으며 한 발짝 상대에게로 다가갔다.
굳이 위협적인 면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그가 마음먹으면 도륙내지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은 언제고 그에게 여유를 위협처럼 두를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작 감정 때문에 번민한 적 없다는 것처럼 마냥 차갑고 날카로운 알레이의 시선이 상대에게 꽂혔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누구시기에. 이 아침부터 추문 날 위협을 무릅쓰고 제 상사의 방을 두드리셨으며, 또 멀쩡히 잔업 하던 제 멱을 잡지 못해 안달이신 건지.”
“은인에게 인사하러 오는 데에도 사족을 붙여야 하나. 아니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제가 알아야 할 사람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쪽은 아닌 것 같군요.
태연한 거짓말에 상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레이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
“당신 얼굴은 압니다. 어제 황녀 전하께서 바다에서 건져 왔다기에 제가 간단히 치료해 의원으로 넘겼으니까. 어떻게 보면 제 쪽이 당신 생명의 은인인 셈이겠습니다.”
“이젠 개나 소나 내 은인을 하겠답시고 나서는군.”
“그게 기껏 치료해 준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타인의 호의가 없었으면 지금쯤 물고기 밥이나 되었을 분이 애써 살려 놓으니 뻐끔대는 걸 제법 잘하십니다.”
누구신진 몰라도 물에 한 번 빠지시더니 물고기한테 좋은 걸 배워 오셨습니다.
알레이가 픽 웃으며 말하자, 상대의 눈썹이 더욱 날카롭게 치켜세워졌다.
“오필리아가 날 구해서 네가 치료한 건데, 겨우 그걸 두고 유세 떨 셈인가?”
“생색내는 데는 흥미 없습니다. 은혜도 모르고 날뛰는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지. 용건이 없으면 돌아가시고, 있으면 제게 말씀하세요. 후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건방진 놈.”
“칭찬은 좀 아껴 두시고.”
“하하.”
조금도 우습지 않은 얼굴로 남자가 건조하게 웃었다.
“용건은 후에 내가 직접, 전하지. 꼴 보기 싫은 놈을 봤다 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였군.”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분이 알레이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알레이는 처음으로 인상을 썼다.
“……내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그걸 내가 말해 줄 만큼 상냥해 보이나? 정 궁금하면 오필리아에게나 물어보지 그래. 내가 그녀와 무슨 관계이고, 너는 뭘 모르는지.”
그리고 이번 말 또한 알레이의 정곡을 찔렀다.
“난 이만 가 보지. 잔업 힘내시고.”
불청객, 이안은 처음과 달리 소태라도 씹은 듯 일그러진 알레이의 표정을 유유히 응시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의 표정 역시 밝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저놈이 오필리아의 방에서 나와?’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5년 뒤에는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치게 될 그 남자.
그리고, 오필리아의 죽음에 이안만큼이나 동요한 유일한 사람.
이안은 층계에 서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오필리아의 방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젯밤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해서 오늘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착잡함이 묻은 이안의 머릿속에서 어제 오필리아가 그를 찾아왔던 일이 다시 재생되었다.
불빛에 눈을 떴던 때부터, 오필리아가 자신을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것처럼 바라보던 것까지.
감추지 못한 설움과 원망이 진흙처럼 잔뜩 묻어 있던 시선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선을 마주할 때면 매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자신이 그리던 사람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눈동자의 원망이 제 숨통을 틀어쥐는 까닭일까.
어느 쪽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안에게는 오필리아를 만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무래도 오후에 다시 와야겠군.’
이안은 걸음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와 거세게 문을 닫았다.
라딘에서 지낼 때 묵었던 이 방은 딱 5년의 시간만큼 낯설었다.
오필리아와 만났던 바로 이 장소.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여, 여기가 어디지?
-밀레세트의 라딘이에요. 정신이 드시나요?
-라딘? 설마 내가 표류한 건가?
-네, 맞아요. 황녀 전하께서 다행히 발견하셨다고 하시던데.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밀레세트에 라딘, 황녀 전하까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으므로.
상황을 조금만 파악하자 기다렸다는 듯 기억들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바다에 빠져 기억을 잃기 전까지의 조각난 기억 몇 가지.
밀레세트 황궁 연회에서 투신한 여자와 눈이 마주친 일.
그리고 그녀를 따라갔던 것.
-……로넨 대공.
-나를 아나?
-모를 리가요. 오늘의 귀빈이신데.
오필리아의 떨리는 목소리와 그 손에 끼워진 반지가 기억 속에 또렷했다.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당신의 구실이 되어 줄 사람이라면 조금만 눈 돌려도 많이 있을 테니.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제게서 도망쳤다.
그 뒷모습에서 느껴졌던 묘한 아쉬움과 흥미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오필리아.”
그녀 역시 과거로 돌아온 거다. 이안은 확신했다. 무지한 상태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어도, 그녀를 알고, 그녀의 죽음을 알고 있는 그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의 안도를, 희열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필리아.
속으로 곱씹는 이름이 썼다.
‘이제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안은 처음으로 믿지도 않던 신께 감사했다.
이건 제 과오를, 모든 어긋남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다.
‘오필리아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는 정말 그까짓 것은 상관이 없었다.
오필리아가 다시 제 곁으로 와 준다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오필리아가 나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제 쪽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한 판국이다.
‘듣자 하니 영주가 사고로 병중이라 하던가.’
과거에는 없었던 상황이다. 물론 오필리아의 개입이 있었으리라.
물론 과거와 달라진 점들이 이제 와 새삼스럽게 의아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필리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자신과 결혼한다는 선택지가 아니라면 크센트의 늙은 왕과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설마 그것을 선택할 리는 없고.’
알레이가 오필리아의 방에서 나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안은 오필리아의 소식을 듣고 마탑에서 곧바로 로넨 성까지 달려왔던 알레이를 기억했다.
그는 이안이 했던 짓을 그대로 답습했다.
오필리아가 잠든 침대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오필리아.
잠긴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안은 그 이유를 불현듯 깨달았다.
탄식을 닮은 그의 목소리가 제 것과 같았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