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흰 이불 위로 흐트러진 붉은 머릿결이 노을을 닮아 있었다.
제 곁에 아주 찰나만 머무른다는 점이 특히나.
약 한 시간 전, 알레이는 좌표 계산을 끝냈다. 좌표 계산이 오래 걸렸을 뿐, 이를 보내는 데에는 일각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에 이러고 있느냐면.
“알레이, 오늘 언제쯤 잠에 들 것 같나요?”
일을 끝내고 방을 나서기 전 오필리아가 이렇게 물어왔었다.
원래도 불면 기질이 있는 데다 오필리아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기에, 알레이는 무던히 답했다.
“동 틀 즈음에나 눈 붙일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오필리아가 드물게 반색했다.
“그럼, 혹시 내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을까요? 힘들진 않을 텐데.”
“방금 그 부탁보다 힘든 부탁이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혹시 오늘 밤만 나랑 같은 방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알레이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는 투에 더 가까웠기에 더욱.
어쩐지 방금 그 질문으로 알레이의 심장은 한 뼘쯤 내려앉은 것 같은데 말이다.
인상이 구겨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알레이는 그것을 제외하고서는 표정 관리를 잘 하는 편이었다.
그 또한 평이한 투로 물었다.
“말씀대로 힘든 건 아니긴 합니다만, 이유가 뭡니까?”
“오늘 악몽을 꿀 것 같아서요.”
“그런 것도 파악이 됩니까?”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기 마련이잖아요.”
오필리아는 밤공기에 드러난 맨팔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가, 이어 말했다.
“어제도 악몽을 꿨어요. 오늘도 분명 꿀 거예요. 그래서 괜찮으면 같은 방에 있다가,”
“같은 방에 있다가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깨워 달라는 뜻입니까?”
“맞아요. 깨워 주지 못해도 사실 괜찮고. 그냥 있기만 해도 돼요.”
오필리아는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혼자일 게 두렵다고 했다.
보통은 악몽에서 깨어나면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고 안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아한 말이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더 두렵다는 것은 현실이 꿈보다 지옥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불안정하던 오필리아의 모습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된 이상 알레이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값은 비싸게 받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렇게 알레이는 오필리아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이동해 왔다.
아마도 오필리아는 알레이가 잠든 자신을 두고 마법식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했던지.
-혹시라도 잉크가 모자라면 내 걸 써도 돼요.
라는 말을 하고 비몽사몽간에 잠들어 버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손에 일이 잡힐 리 만무하다. 알레이는 잠든 이의 침묵을 핑계 삼아 침상 옆에 의자를 가까이 두고 앉았다.
깊은 수면과 죽음은 굉장히 닮아 있어서,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심해를 파헤치려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닮아 있는 것은 역시 알레이의 기억 속 첫 번째 장면일 것이다.
달빛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이불처럼 덮고 이름 모를 숲에서 눈을 떴던 그때.
조각배를 끌고 망망대해에 던져지면 그런 기분이 들까.
눈을 뜬 순간부터 혼란의 연속이었다.
숲. 나무. 이따금 동물들이 지나다니며 내는 소리들이 알레이를 에워쌌으나 무엇도 알 수가 없어 두렵기만 했다.
게다가 밤이기까지 했고, 알레이는 스스로가 누군지 사유할 틈도 없이 허둥지둥 막연히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끝에 잡힌 비린내가 이끼 썩는 냄새나, 밤이슬에 젖은 흙냄새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깨달은 탓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알레이는 서둘러 그 장소를 벗어났다.
방향을 찾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이동해 갔다.
물론 모든 과정에는 마법이 함께했다.
마법은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팔다리처럼 존재했다.
다른 이들이 걷기 위해 다리를 내딛는 것처럼,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물 흐르듯 움직여 갔다.
그러나 워낙 숲이 넓었던 탓일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길 잃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탓일까.
마력이 거의 떨어질 즈음에서야 알레이는 도시에 도착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것은 알레이의 첫 번째 기억이자,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공포이기도 했다.
미지에 던져지는 것.
시간이 지나고 차차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조금씩 알아간 것들이 있었지만, 숲 한가운데서 알레이는 스스로에 대해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사용한 게 마법이라는 인식도, 하물며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지조차 몰랐다.
-황실 마법사로 지원하러 오셨다고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 알레이, 알레이입니다.
그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이었다.
사람들 틈에 지낸다는 것은 곧 수많은 정보값이 던져진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시에 입성한 뒤 알레이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게 밀레세트 제국에서 쓰는 언어라는 점도.
이곳이 밀레세트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밤 동안 건너온 숲이 동부 연합과 맞닿아 있는 숲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빛이 연달아 터지듯 기억은 그렇게 돌아왔다.
경험과 몸에 밴 습관들이 그에게 지식을 되돌려 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숲에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이런 경험을 되새길 기회가 없었더라면 어떨까.
그는 여전히 본인의 이름조차 깨닫지 못한 채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었을 터다.
무엇이든 경험해야만 얻을 수 있다.
그 미지가 알레이에게는 공포로 작용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숲에서 눈 뜨는 것은 생각보다 잔혹한 경험이었고, 세상일이라는 게 늘 경험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필리아.’
알레이는 여명을 등진 채 제게 혼란을 주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이름을 곱씹었다. 빗물 맛이 났다.
제게 혼란과 짜증을 매번 선사하는 이의 이름치고는 밋밋한 맛이었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나을 텐데.’
오필리아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과 맞닿아 있었다.
겪고 나면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있겠지만, 차마 겪기가 무섭다.
겪고 나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다. 쉽게 격랑이 이는 이 치졸한 마음을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결국 겪어 봐야 알겠지.’
푸른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듯, 이 감정에 대한 것도 겪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두렵고 소슬해서, 그러나 마냥 낯설지만도 않아서.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곁을 오래도록 지켰다.
-가기 전에는 깨워 줘요.
잠들기 전 이렇게 말했던 오필리아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제 오랜 불면이 도움이 다 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 즈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필리아. 안에 있나?”
의아한 일이었다.
오필리아는 황녀였고, 그런 그녀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인간들의 신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산테 정도였으므로.
‘그렇다면 산테인가?’
하지만 날개를 가진 세이렌이 과연 발코니의 창을 두드릴까, 저렇게 정직하게 복도에 서서 방문을 두드릴까.
설령 산테라고 해도 이런 이른 아침부터 오필리아를 찾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레이는 침묵을 택했다. 가만히 두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가겠거니.
그러나 알레이의 예상은 빗나갔다.
대답이 없는데도 방문 앞의 인기척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자꾸만 문 앞을 서성거렸다.
오필리아가 없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이러다 깨겠는데.’
물론 문은 잠겨 있었지만, 오필리아가 깊게 잠든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알레이는 그게 제법 성가셔졌다.
결국 알레이는 갈등 끝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필리아가 잠든 침대 곁으로 방음막을 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문 밖에 서 있던 것은 인간이었다.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인간.
그러나 어째서인지 사나운 기운이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흑발과, 형형해 보이기까지 한 은안의 사내.
눈동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얼굴은 익숙했다.
“왜 오필리아의 방에서 나오는 거지?”
그는 오필리아가 어제 구해 온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