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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39화 (39/118)
  • 제39화

    오필리아가 호기롭게 말을 끝냈다.

    그녀의 말은 명료했다. 알레이에게 좌표를 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알레이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좌표를 써 달라니.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라 함구했었는데.’

    확신에 찬 오필리아의 낯을 죄인처럼 보던 알레이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기억을 잃고도 본인이 마법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알레이였으나, 그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바로 이동 마법진의 좌표를 만드는 일이었다.

    대개 좌표를 계산하는 것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말단인 알레이에게로 넘어오곤 했다.

    하여 알레이 또한 황궁에서 근무하며 이동 마법진의 좌표를 계산해야 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이게 뭡니까? 설마 이걸 좌표라고 가져온 겁니까?

    -맞습니다만.

    -알레이. 이게 순간이동 마법인 줄 알고 있는 겁니까? 계산법은 썼어요?

    -예. 계산법을 사용해 도출한 좌표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맙시다. 그 식을 썼는데 이딴 게 나온다고요? 시간도 없어서 허덕이는데 이런 일로 당신 같은 말단과 입씨름해야겠습니까?

    그의 상사는 그렇잖아도 촉박한 일정으로 짜증이 치솟아 있던 중이었기에, 알레이는 그에게 된통 깨져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알레이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명 자신이 가져간 것은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계산법을 이용해 도출한 좌표였다.

    그러나 어느 마법사를 찾아가도 그 좌표와 계산법은 터무니없다고 했다.

    기억이 있었더라면 그에 대한 해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던 알레이도 대다수의 부정 앞에 결국 의견을 굽혔다.

    제 기억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그 사건은 단순히 계산법에 대한 의심을 넘어 제 모든 기억에 대한 의심마저 심어 주었다.

    자신이 그나마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잘못되었을 가능성.

    그 앞에서 알레이는 위축되었다. 그가 몇 년간이나 제 실력을 숨기고 말단으로 있었던 이유 또한 같은 선상에 있었다.

    그는 중책을 맡기에는 차마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높아서 아닌 척하고 있었을 뿐.

    이 순간에도 그의 자존심은 굽히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오필리아가 알레이와 마주할 때면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대단하네요, 알레이.

    그 목소리에 굴곡이 없었던 만큼 더 진솔하게 다가온 말이었다.

    기억을 잃었던 5년간 알게 모르게 바닥까지 내려갔던 자신감에 뿌려진 단비 같은 말.

    알레이는 굳이 거래가 아니어도 오필리아의 요청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한마디 듣는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부탁받았다.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니 목 안쪽이 부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속일 수도 없는 일인지라, 알레이는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오필리아. 사실 나는…… 이동 마법진의 좌표를 만들지 못합니다. 아니, 만들 수는 있지만. 내가 만든 좌표는…….”

    “쓸 수 없는 좌표라고, 다들 말했죠?”

    돌아온 반문에 알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당신의 방식이 특별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흔한 범재들이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 뿐.

    “그리고 우리가 좌표를 보낼 상대는 당신의 좌표를 분명 알아볼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장담할 수 있어요. 편지를 받을 상대는 마탑에서 온 마법사고, 당신의 방식은 마탑의 방식이니까.”

    오필리아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물론, 알레이의 좌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로넨에서 그가 기억을 찾고 떠나기 전 예니트와 나눈 대화를 들은 탓이었다.

    예니트는 제법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가 카랑카랑한 톤으로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좌표가 여태 잘못된 줄 알아서 이동 마법진을 쓰지 않았다고요? 그게 말이나 돼요? 한 번 시도나 해 보지!

    -뭐, 마법진을 그릴 만한 장소도 없었고, 일도 바빴고. 은연중에 당연히 실패할 거라 생각 했으니 실패할 일에 기력 쏟고 싶지도 않았지.

    -그래도 한 번만 시도해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저희가 좀 더 일찍 만났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게, 네 말이 맞다. 왜 하지 않았지. 그땐…… 그랬어. 그냥.

    답답해하는 예니트에게 알레이는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어물쩍 말을 돌렸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어쩐지 알레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실의에 빠진 거다.

    무얼 해도 실패할 것만 같은 기분.

    종이에 손끝만 베여도 제가 하는 모든 일이 다 그렇게 망쳐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는 상태.

    오필리아 역시 겪어 본 것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가 본인은 깨닫지 못했어도 실의에 잠겨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최대한 알레이가 어려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물론 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탑에서 곧 마법사가 올 테니 그를 먼저 파악해 놓고 예니트를 차례차례 맞이하고 싶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오필리아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조금 전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쳐 왔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손끝에서부터 피가 식었다.

    차라리 자신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이안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동요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필리아는 볼 안쪽을 꾹 깨물었다가, 알레이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알레이. 날 봐요. 내가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기억해요?”

    알레이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건 갑자기, 왜…….”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실패해도 괜찮다는 얘기예요. 당신이 실패해도 당신에게는 해가 없을 테니까,”

    “내게 해가 없을 테니까 마음 놓고 하라고?”

    일그러진 알레이의 낯이 묘한 노기를 띠었다.

    그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실패해도 그에게는 해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가 그를 더욱 그 경계로 내몰았다.

    “오필리아, 당신은.”

    숨을 억눌러 참은 탓에 말이 끊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필리아가 알레이의 손을 쥐고 있었더라면, 이제는 잡는 쪽이 바뀌어 있었다.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손을, 손목을 잡았다. 마디 하나는 족히 차이나는 탓에 그녀의 두 손은 쉽게 결박되었다.

    꼭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알레이는 화가 난 건지, 괴로운 건지 모를 낯으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나보고 당신을 사지로 몰지도 모르는 일을 하라는 건가?”

    “당신이 사지에 떨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아니. 나는 그게 더 두려워.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잃을까 봐…….”

    당신을 잃을까 두렵다.

    알레이의 말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 순간 알레이의 안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맞추어진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어째서 그동안 그토록, 오필리아에게 짜증을 느껴왔던가.

    그것은 오필리아가 언제고 그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서였다.

    차라리 민들레 홀씨를 움켜쥐려 했다면 나았을까.

    그 갈망이 언제고 스러질 수 있는 대상을 향한 것이었기에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툭 힘이 빠진 알레이의 손에서 오필리아의 손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도로 알레이의 두 팔을 붙들었다.

    “알레이.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지 알겠어요.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요.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건 당신이 아니어도 많다는 걸.”

    하지만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요.

    “오직 당신뿐이에요.”

    청염의 속삭임에 알레이는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혔다.

    자신을 오롯하게 바라보는 벽해 같은 두 눈동자. 자신을 붙든 그 손아귀에 고개를 떨어트리며 알레이는 막연히 생각했다.

    끊임없이 육지를 탐하는 파도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고.

    * * *

    그믐이 기울었다.

    알레이는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방 안으로 돌렸다.

    그가 있는 곳은 그의 방이 아니었으며, 또한 침대 위에는 잠든 이가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듣는 것은 소슬하고도 익숙한 감각이다. 알레이는 침상 옆에 앉은 채 달밤을 끼고 잠든 이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알레이를 사로잡던 그 푸른 눈동자를 눈꺼풀 아래 감춘 채 잠든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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