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38화 (38/118)
  • 제38화

    가까운 사람의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이 역겨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쓸모 있었더라면 오필리아가 자신을 더 신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산테 대신 자신을 불러 줄 일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고민에 잠길 일도 없었으리라.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는 데 서운함이나 느끼고 있고…….’

    이렇게 한심할 데가 있나.

    자기혐오에 가슴이 옥죄는 것을 느낄 때면 으레 생각이 닿는 구석이 있었다.

    이토록 한심하고 초라한 자신과는 달리 언제고 반짝이는 사람.

    오필리아 밀레세트.

    오필리아에게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밤바다를 닮은 그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기묘한 열망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어쩐지 결박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때 느끼는 것이 단순한 결박이라면 이토록 난처한 기분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어떤 이끌림에 가까웠다.

    그 감정은 해안선을 덮치는 파도를 닮아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뭍으로 끌려온 바다를.

    제 의사와는 관계없는 이끌림이 알레이의 부아를 돋웠다.

    고작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과거의 저 역시 겪지 않았을 게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짜증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서도 환히 웃고 있는 오필리아가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 순간부터 어쩐지 알레이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는 깨달음과 더불어, 어딘지 가슴 안쪽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울림을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막연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지우길 몇 번.

    이 우둔한 짓거리도 그만하고 마법식 연구나 마저 하자,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 했는데.

    -알레이.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생겼어요.

    이 짜증의 원인이 이 밤중에 돌연 그를 찾아온 것이다.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거기에 조금 전과 달리 유난히 불안해 보이는 분위기에, 갑작스러운 소식까지.

    ‘붙잡으려는 이가 있어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니.’

    그 말은 곧 알레이가 서둘러 기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오필리아는 붙잡으려는 이가 무슨 연유로 그녀를 방해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알레이는 차마 그에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필리아는 황녀였고, 그런 그녀가 마탑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하여 지난밤 오필리아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알레이, 나는 마탑으로 가지 못하면 최악과 차악 중에 골라야 해요.

    알레이가 순순히 물러섰던 이유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었다.

    하나는 정략혼일 테고, 하나는 죽음일 테지.

    단지 알레이는 그 둘 중 과연 무엇이 그녀에게 있어 최악에 해당하는지 물을 용기가 없었다.

    오필리아는 제 이야기를 꽁꽁 감추는 것에 반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므로 분명 쉽게 대답해 주겠지만.

    그는 그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돌아온 대답이 가벼워도 무거워도 그는 짓눌릴 게 뻔했다.

    함구하려는 속내가 낯에 비친 걸까.

    알레이의 어두운 낯을 본 오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그런 표정할 것 없어요. 아주 심각한 상황은 면했으니까.”

    “……아주 심각한 상황이 뭡니까.”

    “글쎄요. 계획을 들키는 것?”

    오필리아가 농담조로 말하며 책상 위 빈손을 꾹 움켜쥐었다.

    “아직 그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요. 문제는 내가 아는 대부분을 그도 안다는 거고, 수상쩍은 낌새를 보이면 어렵지 않게 계획을 들킬 수 있다는 거겠죠.”

    오필리아의 검지가 툭툭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멈췄다.

    제가 무턱대고 찾아온 상대가 얼마나 착잡한 낯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던 탓이다.

    사실 따지자면 이건 오필리아의 연유일 뿐이고 알레이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텐데.

    자신이 너무 겁을 준 걸까.

    오필리아는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너무 걱정할 건 없어요. 당신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당신은?”

    “음?”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압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잖습니까.”

    “그렇죠. 정말 정략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늙은 왕의 재취 자리와 이안 중에서 선택할 처지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위험해지면 그냥 도주를 할 수도 있겠지.’

    그녀는 세이렌의 수장, 그리고 기억을 잃은 마탑의 주인을 데리고 있으니 도주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실 그게 문제였다.

    오필리아의 계획은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닌, 정말로 그 누구의 추격도 받지 않고 마탑으로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으므로.

    “만약의 상황에 도주하려면 아무래도 내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가야겠지만, 붉은 머리는 분명 눈에 띄어요. 인적이 아예 없는 곳으로 갈 게 아니라면 숨길 수 있는 건 찰나에 불과할 거예요.”

    “마법으로 머리색을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그러고 살 수는 없잖아요. 마법이 무한히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색을 바꿔줄 수 있는 당신이 내 곁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눈치채지 못한 채 오필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 죄인처럼 비굴하게 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논쟁을 가르는 말이었다.

    그녀가 마탑이 아닌 곳으로의 도주를 계획하지 않는 이유.

    그것은 오필리아가 지난 5년 로넨에서 보낸 세월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안에게서 외면받고 로넨에 동떨어져 살았던 시간.

    그 시간들이 괴로웠던 이유 중에는 오필리아가 스스로를 죄인처럼 느꼈던 것도 있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오필리아는 누군가를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고, 누군가를 속인 셈이 되었다.

    그것이 제 탓이 아니라고 한들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메아리치는 죄책감 속에서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이건 제가 감히 제 자리가 아닌 것을 차지한 벌은 아닐까 하고.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잔재와 맞닥뜨리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겨우 멎어 든 울렁거림이 다시금 되살아나 오필리아의 발끝을 적셨다.

    떨리는 손끝으로 마른 낯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얘기가 잠깐…… 샜는데. 아무튼. 그래서 당신 도움이 좀 필요해요.”

    “그건 거래입니까?”

    오필리아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알레이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기로 한 거래.

    오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있으니 걱정 말고. 지난번 이동 마법진에 대해 물었던 것 혹시 기억해요?”

    “기억합니다. 날 시험해 보기 위해 한 질문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당신의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이동 마법진을 쓸 수는 없을까 싶었거든요.”

    “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게 세이렌 말고 더 있었던 겁니까?”

    “겨우 산테 한 명에게 모든 기대를 걸기엔 무겁잖아요.”

    “마법진에 대해 묻는 걸 보니 상대는 마법사인 모양이고.”

    “전부터 느꼈는데 머리가 상당히 좋네요.”

    “그러는 당신은 칭찬을 기쁘지 않게 하는 데 재능이 있으신 것 같고 말입니다.”

    한숨을 내쉰 알레이가 이어 말했다.

    “상대가 마법사여도 이동 마법진을 쓰기는 힘듭니다. 마법진을 쓰려면,”

    “마법진을 쓰려면 이동하려는 곳의 좌표와 그 거리에 상응하는 크기의 마법진이 필요하죠. 둘 모두 구하기가 쉽지는 않고요. 알아요.”

    순간이동마법과, 이동 마법진은 비슷한 듯 다른 결을 띠고 있다.

    순간이동마법의 경우 시전자가 원하는 장소를 간단히 지정할 수 있지만, 마법진이라는 규격화된 형태로 쓰여야 하는 이동 마법진의 경우 이동하려는 좌표가 명확해야만 발동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좌표를 만드는 방법이 아주 까다로워서, 이동 마법진은 쉽게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오필리아가 종이와 펜을 알레이의 책상에서 가져왔다.

    “뭘 하려는 겁니까?”

    “마법진에 좌표가 필요하다면 좌표를 만들어서 보내 주면 되잖아요. 물론 마법진을 그리는 데 시간이 꽤 들겠지만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보단 덜 걸릴 테고.”

    물론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좌표를 전달하는 시간과 좌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또 필요했겠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빠른 연락책도, 훌륭한 마법사도 있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