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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37화 (37/118)

제37화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한결 명료해진 기분이 들었다. 끝난 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기분.

“한때 당신은 내게 있어서 정말, 정말 내 인생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주어 보니 알겠더군요.”

당신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기에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과 로넨에 돌아갈 일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

오필리아는 단호했으나, 상대는 오필리아의 예상대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이안은 오필리아의 말에도 그녀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필리아, 당신은 내가 아니면 정략혼을 해야 할 텐데. 내가 싫다고 그쪽을 택하겠다는 건가?”

그건 당신도 싫잖아. 애원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오필리아의 속을 건드렸다.

그의 말대로, 머잖아 오필리아는 원치 않는 정략혼을 할 처지에 놓인다.

크센트 왕의 재취 자리.

늙은 왕은 죽을 날이 머지않았음에도 독신인 것은 견디기가 싫은 모양인지. 크센트의 왕세자가 오히려 오필리아와 나이대가 비슷할 텐데도 그는 양심 없이 밀레세트에게 황녀를 요구했다.

그리고 밀레세트는 고작 국혼 하나를 거절해서 크센트와 같이 호전적인 나라와 척을 지는 일을 원치 않았다.

사람 한 명을 팔아서 유지될 수 있는 평화라면 팔지 않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크센트로부터 구혼장이 도착했을 때 그런 양측의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안 역시 그러했다.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보단 나을 텐데. 나를 이용해, 차라리. 당신에게라면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테니.”

“……그래서, 나보고. 당신과 다시 결혼하라고?”

그리고 오필리아는 정말 기가 찼다.

정략혼을 당하기 싫을 테니 그를 이용하라고?

대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알아야 저딴 말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기가 차고 우스워서, 오필리아는 물었다.

“이안. 당신이 내게 이 결혼이 정략혼의 일종이 아니냐고 물은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해요?”

이안은 대답이 없었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대답할 염치가 없는 건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똑같이 화가 났을 테니까.

“나는 당신이 순전히 나를 모욕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당신이 날 그렇게까지 얕잡아 보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이안이 아니었으면 고작 정략혼에 팔려 갈 처지였던 오필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거리낌 없이 제안하는 걸 보니까, 그게 진심이었다는 건 알겠네요.”

“하지만 당신이 정말 그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나를 선택했을까.”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뒤바뀐 시야가 잠시 낯설었다.

어쩌면 이안이 여태 본 것 중 가장 상처받은 낯을 하고 있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암초처럼 날카롭고 다소 거칠어 보이는, 유려한 이목구비가 괴로움을 띠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이마를 덮고 있었던 탓에, 그는 그림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안과 다시 마주한 이래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저 이유 모를 짙은 슬픔이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기도.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원하지 않았잖아. ……나와 달리.”

그의 말이 옳았다. 오필리아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이안이 그녀를 아무리 원한다 한들 오필리아의 대답은 같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필리아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유가 없었으니까.

반쪽짜리 고귀한 혈통은 그저 족쇄일 뿐.

어딜 가도 어울릴 수 없고, 누군가를 편히 믿을 수 있을 만큼 온난한 생활을 영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이안을 구하기 바로 며칠 전에도 오필리아는 하이다르의 연회에서 조롱받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당신이 어떻게 이해할까.

당신은 겪어 본 적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이 일들을…….

오필리아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이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이 날 원하지 않는대도 이제는 상관없어. 그냥…… 난 당신만 있으면…….”

그는 낯을 일그러뜨리고 우는 아이처럼 횡설수설했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제야 오필리아의 눈에 현재의 이안이 어떤 상태인지 보였다.

‘불안정해.’

불안정하다. 자신이 알던 이안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단어였다.

그는 위태로웠다. 그리고 그만큼 그 기묘한 열망이 더욱 집착적으로 비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었다.

더 이상 이안을 후려치게 될까 두렵다기 보다는, 그것을 듣고 나면 어떤 선을 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가 이 찰나의 감정을 영원처럼 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쑥 뇌리를 치받았다.

‘절대 안 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는 탐욕스러운 오필리아의 아버지보다도, 걸핏하면 심판을 내리겠다며 설치는 신전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운 방해물이 될 것이다.

특히나 오필리아가 독신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리엘을 살릴 수도 없어.’

아리엘은 분명 이안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안을 만나기 위해 뭍으로 나오려 할 테고, 끝에는 어떤 식으로든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자명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이안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 안의 명명 못한 감정들도 함께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이안을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로넨의 공비로서 지내온 세월이 여전히 진흙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더 이야기하면 그에게 말려들 것이다.

오필리아는 직감했다. 그리고 곧장 이안에게서 도망쳤다.

마지막까지 제 손을 놓지 않으려던 이안의 손을 잡아 떨쳐 내고서…….

“…….”

오필리아는 회랑 한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마디 하나는 족히 큰 그의 손을 붙잡아 떨쳐 냈던 순간이 여전히 머릿속에 있었다.

한때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열망했던 이의 손이었는데.

뿌리치던 순간 허망해지던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자신이 절벽을 붙든 손을 떨어트려 놓아도 그렇게까지 망연하진 못할 것 같았다.

그 낯선 표정에 놀라기는 했으나, 의아하지는 않았다.

오필리아를 한 번 잃었던 기억이 그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들었으리라.

‘내가 죽어도 그다지 달라질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변화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참을 그렇게 멈추어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가 향한 곳은 본인의 방이 아니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에 머잖아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도 오필리아와 함께 있었던 사람.

그녀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곁에 머물렀던.

“오필리아?”

“……알레이.”

뭍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오필리아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불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쉬는 게 버겁게 느껴졌는데.

저 낯을 마주한 순간 이유 모를 안도가 드니 참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찾은 이유는 고작 이런 값싼 안도나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필리아는 아직도 쿵쿵대는 가슴 위를 한 번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생겼어요.”

* * *

“그러니까, 당신을 붙잡으려는 이가 있고. 상당히 성가실 예정이니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는 겁니까?”

“요약을 잘하네요. 맞아요.”

“칭찬을 듣고도 기쁘지 않기는 또 처음입니다.”

어째서인지 조금 전보다 한참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가볍게 털어내며, 알레이가 인상을 썼다.

정말로 그의 미간은 근래 오필리아 때문에 펴질 날이 없었다.

오필리아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약 한 시간 전 오필리아가 돌아간 이후 알레이는 내내 고민에 잠겨 있었다.

오늘 그녀가 해 준 얘기들이 그를 심란하게 한 탓이었다.

물론 오필리아가 그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달랐다.

오필리아가 조건식 마법에 대해 언급하게 된 계기.

-예전에 인어의 비늘을 삼켰어요. 인어를 만난 건 그걸 해결하기 위함이었고요.

인어의 비늘 때문에.

오필리아와 조건식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오필리아의 낯은 조금씩 굳어 들어갔다.

이야기 끝에 제가 도움이 되었다며 뛰쳐나가던 그녀의 표정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떠난 방 안에 앉아, 알레이는 망연하게 직감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정말로,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한심하군.’

그리고 알레이는 그런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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