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왜 많은 것들은 시기를 놓치고서야 결말에 다다를까.
오필리아는 등불 없이 복도를 되돌아갔다. 석조 건물의 회랑을 울리는 발소리에는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조급했다.
눈물이 말라붙은 낯, 여전히 안개가 낀 듯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의 상황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안이 무릎을 꿇고 오필리아가 울었던 그 난장.
이안은 오필리아의 눈물이 제 고통이라도 되는 양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기만도 그런 기만이 없었다.
정말로 그가 오필리아의 눈물에 고통받았다면, 그가 오필리아의 눈물에 조금이라도 감화되었다면 진작 자리를 떴어야 했다.
오필리아가 울다 못해 결국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하, 하. 이 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오필리아가 날카롭게 실소했다.
-대체 어떻게?
-무엇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라는 말이 더 나올 게 있어요?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지는 나도 묻고 싶은 일이야. 눈을 뜨니 라딘이었어. 나는 분명 로넨에서 당신을 잃었는데.
오필리아는 그가 자신을 언급할 때마다 그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자신을 두고 무슨, 대단히 소중한 것이라도 잃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구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랬더라면 예니트를 이리로 데려올 수 없었겠지.’
게다가 오필리아는 아무리 이안이 미워도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둘 만한 성정이 못 되었다.
다른 이의 손에 넘기고 갈 수는 있어도.
‘대체 아리엘은 무엇을 원한 거지?’
무엇을 원해서 이안에게도 과거의 기억을 돌려주었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안에게 내 계획을 들켜서는 안 돼.’
오필리아가 눈물을 멎을 즈음 그녀는 제법 이성을 되찾은 상태였다.
과거의 이안을 다시 마주한 그 직후에 이성을 잃고 울며 웃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
그 한 마디에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손발이 차가워진 탓이었다.
사랑한다는 이안의 말. 그 말은 오필리아에게 있어 일종의 경고음이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간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거라는.
지금의 오필리아는 이안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끊어 낼 수 있는 것이었던가.
얽힌 증오와 원망이 오필리아를 다시 이안의 발치에 묶어 놓을 수도 있었다.
이안의 사랑한다는 말이 오필리아의 미련이 될 수도 있었다.
생각이 그즈음에 이르자 오필리아는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차가워졌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거야.’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누군가를 구원처럼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온전한 나의 삶. 처음부터 그것을 위해 마탑에 가려 했으므로.
그러나 이안은 오필리아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증거로 이안은 오필리아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나를 구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해도, 내게 구원자는 당신뿐이야.”
대체 누가 그따위 것을 바란다고.
대체, 내가 거기서 무엇을 더 깎여야 나를 놓아주려고 당신은 이번 생에서까지 나를 이렇게 얽매려 하는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한 그 눈빛과 말투가 싫었다.
후회하는 듯한 태도가 싫었다. 새로운 시작을 쉽게 읊는 그가 싫었다.
이안의 태도는 정말 기묘했다. 도저히 자신과 마주치기 싫어 온종일 성으로 돌아오지 않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리엘의 비늘을 삼키고 나서 깨어나지 못하자, 그제야 깊은 후회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더 우습지.’
살아 있을 때는 얼굴 한 번 보지 않으려 하다, 죽고 나니 이제야 후회하며 무릎을 꿇는다니.
그건 분명 최악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하여 오필리아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이안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묻지 못했다.
자신이 예상한 최악의 경우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다면 그때는 정말로 이안을 후려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점은, 이안이 그렇게 오필리아에게 얻어맞고도 오필리아를 놓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안을 사랑한 만큼, 변심한 그가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큼 이안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 은안이 기묘한 열망 앞에 얼마나 거침없이 타오르는지.
모든 배는 오직 한 가지 지표만을 가지고 항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므로.
뱃길에 오른 이들에게 항로란 오직 한 가지뿐.
그리고 이안은 그런 바다의 논리와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난파에서 살아남아 이안에게로 가장 먼저 돌아온 그의 심복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고.
-저는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를 저분을 감시하는 게 일이었죠.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은 오필리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오필리아에게 매여 버린 이안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 좀 불충한 일이지만, 저는 각하께서 언젠가는 사고를 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전하를 만나기 전의 각하는, 뭐랄까. 폭풍 전야 같았거든요.
그의 부관은 이안보다 바다 위를 떠돌았던 경험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폭풍이 오기 전의 바다가 얼마나 불길하고 불안한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고요한 것은 맑은 날하고 비슷한데, 바람이 다릅니다. 저 멀리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가장 두려운 것은 당장 내 발밑이 안전하다는 거죠.
그 막연한 공포심을, 그는 종종 이안에게서 느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오필리아를 만나서 아주 잔잔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처럼 변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기실 이안을 잘 알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목적 없이 타오르던 이안의 열망이 오필리아에게로 옮겨 갔다고.
속된 말로, 오필리아에게 그가 단단히 꽂혔다고.
‘그때는 멋모르고 웃었지.’
그저 그만큼 이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 눈에도 보이는가 보다,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든 기묘한 집착에 속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이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고작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꽂힐 수 있는 사람.
그 누군가가 정말로 어떤 인물인지는 그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오필리아를 구원자로 착각했을 때 그토록 쉽게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사실 그가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토록 쉽게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그런 이안이.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돌아와서 다시 제게 사랑을 말한다고?
‘절대 안 돼.’
그는 욕심이 많은 오필리아의 아버지보다도, 걸핏하면 심판을 내리겠다며 설치는 신전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운 방해물이 될 것이다.
특히나 오필리아가 독신이라면 더더욱.
이안은 오필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제발 로넨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함께 새롭게 주어진 기회를 붙잡자고.
“오필리아, 제발. 당신도 내가 필요하잖아.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내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그럴 수는 없어요.”
기회는 그것을 원하는 이에게나 주어지는 단어다. 그러니 오필리아에게 로넨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회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아니, 애초에 돌아간다는 말이 다 무어란 말인가.
로넨은 이안에게나 고향이고 집이었지.
오필리아는 그곳을 단 한 번도 제집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그걸 전부 설명해 이안과 논쟁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안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와 언쟁할 기력은 더더욱 없었다.
하여 그녀는 말했다.
“나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안, 내가 당신의 말에 넘어갈 정도로 당신을 원했더라면 죽음을 택하는 짓 따위 하지도 않았을 거야.”
“오필리아.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사과할게. 당신에게는 정말 미안해.”
“그거 알아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유일하게 들은 사과가 방금 그거라는 거. 당신은 여전히 당신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을 대체 내가 왜 사랑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