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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35화 (35/118)
  • 제35화

    쿵. 오필리아의 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손끝이 떨렸다.

    방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이 무슨 마개라도 되었던지.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슬픔인지, 설렘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일지 모를 감정으로.

    “날 찾으러 온 건가?”

    이어진 목소리에, 검은 물이 다시금 찰랑였다.

    오필리아는 그 순간, 도망치고 싶어졌다.

    깨어 있는 상태의 이안을 마주하기 힘들 거라 했던 오필리아의 판단은 옳았다.

    목소리만으로도 이렇게 떨리는데, 대체 어떻게 마주하겠다고.

    그러나 마냥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다.

    오필리아는 끝내 몸을 틀었다.

    비스듬하게 깎인 불빛이 침실을 갈랐다.

    검은 머리와 은색 눈. 암초를 닮은 듯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그 푸른 시선.

    눈이 마주쳤다. 연회장에서 투신하기 직전처럼. 심장이 뛰었다. 불꽃을 맞이한 순간처럼.

    날 선 분위기가 오필리아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네게 위험하다고.

    대체 왜?

    오필리아는 그 불안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물 바닥을 더듬듯 불분명한 손짓이었다.

    헛손질에 정신이 팔려 대답하지 못한 사이 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토록 말이 없는 상대인 줄은 몰랐는데, 오필리아 밀레세트.”

    그제야 오필리아는 의미 없는 헤엄을 그만두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바로 알아볼 줄도 몰랐고.”

    “이런 붉은 머리는 흔하지 않지.”

    당신의 말이 옳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오해했지.

    당신이 의식을 잃어갈 때 어렴풋이 보았던 붉은 머리가 나일 거라고.

    “당신 같은 사람도 흔하지 않고.”

    “진부한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당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고 있나요?”

    “중간에 한 번 일어났었어. 하녀가 말하더군. 내가 밀레세트로 돌아왔고, 날 구한 건 그 황녀라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요.”

    “이미 물었지. 나 말고는 구조된 사람이 없는 모양이던데.”

    이안의 설명은 명료했다. 어딘지 비탄에 잠긴 것 같은 기색은 숨길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 간결함이 오필리아에게는 더욱 거북했다.

    묘한 위화감이 자꾸만 발등을 간지럽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답답한 기분.

    이것이 이안에 대한 감정 때문인 건지, 아니면 온전한 위화감 때문인지조차 불분명해 더욱 그러했다.

    오필리아는 쥘 것이 없어 허공을, 등불을 꾹 움켜쥐었다.

    이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기껏 잊은 로넨에서의 생활이 되살아나 발목을 붙드는 것 같았다.

    이안 한 사람만을 보고 로넨으로 갔던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지.

    당시 오필리아에게는 이안 말고는 소중한 상대가 없었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는 오필리아보다 소중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 구조된 후 깨어났을 때 일주일가량은 비탄에 잠겨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타고 있었던 범선에 함께 탔던 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넨과 교신하고 밀레세트의 황실과 편지를 주고받아도, 망망대해 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이안은 매일같이 바닷가에 나가 흰 물보라 이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일주일 뒤, 어떤 상단의 범선에 의해 그들이 사상자 하나 없이 모두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로넨으로부터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주변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지.’

    그는 좋은 군주였고, 좋은 주인이었으나 좋은 연인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것이 많은 상대를 사랑하면 상처 입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각자 사랑하는 대상의 개수가 비슷해야 상처 또한 엇비슷할 텐데, 이안과 오필리아는 이미 그에서부터 지나치게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오필리아가 이안에게 매달릴수록 이안은 오필리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그녀를 성가셔했다.

    그러니 필요 이상의 관심을 요하지 않는 업무로 자꾸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그러나 그 당연함은, 그 모든 기억들은 제게만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원망도, 슬픔도, 애정도.

    오필리아는 생각이 그즈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비늘을 삼킬 당시 무엇을 원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를 바랐구나.’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다.

    그를 구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았던 처음으로.

    깨달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조건이 뭐지?

    바랐던 그대로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게끔 만들기?

    다시 알레이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나. 오필리아가 잠깐 생각에 골몰한 사이 몸을 일으킨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재회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이어 말했다.

    “당신에게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

    “……고마워할 것 없어요.”

    “왜? 당연한 일이라?”

    “아뇨. 그 반대예요. 이유 없는 호의가 아니었어요.”

    “이유라도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기지.”

    “그리고 당신을 구한 건 내가 아니에요. 감사 인사는 그녀에게 하는 게 좋겠군요.”

    “인어 공주?”

    오필리아는 우뚝 멈추었다.

    아리엘이 인어 공주라는 것은 그날 해안에서 그녀의 언니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러니 저것을 이안이 말한다는 것은 곧.

    “…….”

    표정이 어떤지 볼 길은 없었으나,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울지 못해 굳어 버린 꼴일 거라.

    그러나 오필리아는 지금 이안을 마주하고 있었고, 등불은 줄어들 낌새 없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안의 낯이 우그러들었다. 구겨졌다는 말 외에는 달리 무엇으로 표현할 수도 없을 것처럼.

    반듯한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당신을 닮은 붉은 머리 인어 공주. 당신에게 비늘을 주고 죽었던…….”

    “그만.”

    “오필리아.”

    호명에 오필리아는 소스라치듯 한 걸음 물러섰다. 떨리는 손에서 등불이 툭 떨어졌다.

    침상에서 남자가 일어섰다. 그녀는 허둥거리는 꼴로 두어 걸음 더 물러섰다. 그러나 아무리 벌려도 거리가 멀어지질 않았다. 파도와 꼬리잡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벽에 등이 붙고서야 오필리아는 차마 들 수 없었던 시선을 들었다.

    그들이 등불을 두고 온 탓에, 역광을 등진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 두 발짝 거리를 벌린 채.

    오필리아는 그것이 이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양심은 고작 그 정도 크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시선이 다시금 맞닿았다. 묘한 정염이 담긴 눈빛.

    “보고 싶었어.”

    달싹이는 입술, 저 차분한 목소리와 눈빛까지도 모두 제가 알던 것 그대로였다.

    오필리아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던 그의 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이제 그의 눈빛은 마냥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후회와 비탄의 빛에 가까웠다.

    애정과 비애는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던가.

    그 표정이 익숙했다. 그 사실이 소슬해 오필리아는 묻고 싶었다.

    당신. 왜.

    “왜…….”

    나를 그렇게 봐?

    불쑥 튀어 나가려는 물음을 도로 삼키며, 오필리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미친 것이 아니냐 의심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기실 따져 물을 것이라면 그것이 가장 먼저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당신도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냐, 언제부터 그랬던 것이냐는 물음이 먼저 나와야 옳았을 텐데.

    숨 허덕이는 꼴로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 그것이라는 게 우스웠다.

    우습고 서러웠다.

    근간을 짚을 수 없어 더욱 그러했고, 근간 없이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에 더욱 그러했다.

    어느 순간 웃음은 흐느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울며 웃었다.

    과거로 돌아와도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그림자가 짙었다.

    이제 와 저딴 낯으로 보고 있는 그가 싫었다.

    아리엘은 대체 죽으면서 무엇을 바랐던 걸까.

    분명 낮까지만 해도 그것이 비단 제 죽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필리아는 이제 더는 확신할 수 없어졌다.

    그냥 차라리 악몽이라고 하자. 내가 감히 청운의 꿈을 꾼 것에 대한 형벌이라고 하자.

    제발 그가 내게 무릎을 꿇는 이따위 현실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자…….

    오필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낯을 내렸다. 그 앞에는 무릎을 꿇은 이안이 있었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 현실이.

    “당신을 정말, 만나고 싶었어. 오필리아.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 제발.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

    꿈이라고 이따위 말 좀 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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