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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31화 (31/118)

제31화 [S공금]

오필리아의 일에 적극적이었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던 탓이다.

오필리아는 그에 조금 실망했다.

‘일부러 산테의 흥미를 끌기 위해 거기 두었던 건데.’

오필리아는 충분히 주위를 물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산테가 얼마나 유용한지 경험했고, 그를 조금 더 이용하려면 흥미를 끌어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아리엘에게 전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부러 옆에 두었다.

그러나 산테는 어째서인지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미소를 잃은 채였다.

어쩌면 그는 생각이 많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날카로운 눈매가 한층 더 벼려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므로.

‘의중을 모르겠단 말이지.’

산테는 잃을 수 없는 전력이었다.그가 마음을 바꾼다면 오필리아는 계획의 여러 부분에서 애로 사항을 겪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산테가 또 마냥 비협조적으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필리아를 도와 이안을 옮겼고, 라딘성으로 변장해 들어온 이후에도 그녀가 부탁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참, 마탑에서 조사를 위해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이 났어. 조만간 올 테지. 잊고 있었는데 디안 놈을 보니 생각이 나는군.”

그 말에 한 발짝 뒤에서 썩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알레이의 눈썹이 다시 꿈틀했다.

물론 이 방에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지만.

오히려 산테는 알레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말지, 디안. 내가 뭘 했다고.”

“당신이나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내가 모르는 애칭으로 날 부르는 것이 불편할 거란 생각은 안 듭니까?”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많은 것도 바라는군.”

“짐승 취급을 바란다면 당장 목줄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내가 주인 있는 짐승은 아니라, 그건 사양하고. 그렇잖아도 딱딱하던 놈이 기억을 잃더니 아주 돌이 됐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산테는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찰나였다. 그는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지 않게 표정 관리에 능한 짐승이었으므로.

“아무튼. 내가 말해 주려는 건 누가 오게 될지에 대한 부분인데. 들을 생각 없나? 그냥 돌아가?”

“아뇨, 듣고 싶어요.”

정말 돌아가려는 것처럼 구는 산테의 팔을 오필리아가 다급히 붙잡자, 산테가 느슨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다정해 보이기도, 맹수의 관용처럼 보이기도 한 미소.

“올 놈은 코르넬리 듀랑이란 놈이야. 좀 어린 수컷이더군. 나도 마탑의 내부 인원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아는 게 두 가지 있지.”

“뭔데요?”

“하나는 그놈이 디안 얘기만 나와도 눈이 샛별처럼 빛나는 놈이라는 거고.”

산테의 손가락이 두 개 펴졌다.

“다른 하나는 그놈이 마법식을 고안하는 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제에 그 기본적인 범위 계산조차 깜빡하는 덜렁이라는 거지.”

“의아하네요. 그런 실수를 하는 사람을 이런 일에 보내나요?”

“물론 그냥 두었더라면 다른 놈이 왔겠지만, 내가 말을 잘 한 덕분이지. 너는 속이기 더 쉬울 테니 잘된 거 아닌가?”

그건 그랬다. 내심 어리숙한 이가 오기를 바랐던 것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재미있는 상황을 바라는 산테가 마냥 내게 유리하게 일을 만들어 두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세이렌이라는 종족 자체가 그랬다.

변덕스럽고, 환심을 사기 쉬운 만큼 잃기도 쉬운 상대.

재미를 쫓다 보니 내 편으로 만들어도 마냥 다루기 쉽지 않은 상대.

‘아무래도 그 부분은 코르넬리라는 사람이 와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고.’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치워야 했다.

오필리아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파티션에 걸며 입을 열었다.

“알레이. 그 사람 상태는 어떤가요?”

“탈수와 탈진, 약간의 찰과상 등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제가 의사는 아니니 제대로 된 진찰을 받아 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병동으로 가야지, 왜 나한테 온 겁니까?”

“그야 당신하고 입을 맞춰야 하니까요?”

“……뭘 맞춘다고요?”

알레이의 얼굴이 일순 달아올랐지만,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오필리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알레이의 반문이 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을 맞춰 놔야 할 거 아니에요. 나 혼자 이 남자를 옮겼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산테가 사용인인 척 도와주기는 했지만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 릴리스가 캐묻기라도 하면 좀 곤란해서요.”

“……아. 그런, 얘기였습니까?”

“그럼 또 무슨 얘기가 있는데요?”

“아닙니다.”

알레이가 인상을 구겼다.

시종일관 태연한 그녀와 달리 지금 알레이의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아니, 불만이 가득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도무지 간격이 벌어질 낌새가 없는 미간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내가 역력했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부터 그 불만을 짚어야 할지 그 스스로도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 시작은 주인 없는 빈방을 마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속이 불편하지는 않았던 게 확실하다.

산테와 마주보고 있는 오필리아를 본 순간.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산테.

-인사치레에 박한 줄 알았는데.

-해야 할 인사는 하는 게 좋죠.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알레이의 부아가 뒤틀렸으므로.

‘거기에 로넨 대공이라.’

오필리아는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 산테의 옆구리에 덜렁 들려 온 남자는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알레이는 어젯밤 해변에서 오필리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좁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흘이면 충분하다던 게 이런 뜻이었습니까?”

“당신이 한 일이잖아요.”

“피해자가 생길 줄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죠.”

오필리아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이 난파로 죽는 이는 없었다.

이안이 타고 로넨으로 돌아가려 했던 범선은 분명 난파를 당하지만, 조난자는 이안뿐이다.

마침 그 해역에는 작은 섬이 있었고, 격랑에 휩쓸린 배는 그 섬에 불시착하며, 며칠 뒤에는 그 지역에 또 다른 범선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알레이는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대체 어떻게 로넨 대공이 바로 그 난파자가 될 줄 알았던 겁니까?”

“항로와 해류를 잘 알면 계산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운이 좋았네요.”

“참 대단하십니다.”

“비꼬지 말고요. 너무 나쁘게 생각 말아요, 알레이. 어쨌든 좋은 일을 한 거잖아요.”

“……당신의 사고방식은 늘 이해하기 힘듭니다.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도 그렇고. 태연한 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몹시. 당신은…… 날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 말을 뱉고 나서야 알레이는 자신이 왜 그토록 오필리아를 마주할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부아가 치미는 건지.

그녀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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