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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29화 (29/118)

제29화

“그, 그건 안 돼요!”

아리엘이 울상이 되어 외쳤다. 절규마저도 맑은 종 울리듯 청아한 소리였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오필리아는 문득 의아해져 물었다.

“그런데 산테. 여덟 조각이 나는데 왜 아홉 기둥인 거죠?”

“아, 그건 인어들이 받는 형벌의 이름이야. 처음 듣는 입장에서는 의아할 만하지.”

해저의 아홉 기둥에 걸린 여덟 조각.

형벌 자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 죽음을 맞이하고 난 뒤 기둥에 걸려 평안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벌이었다.

그건 인어들 사이에서 가장 흉악한 죄를 저지른 이들이 받는 처벌이라고 했다.

이때 기둥은 죄업을 의미한다.

“다만 인어들은 아무리 악인이라도 하나 정도는 분명 선한 면이 있을 거라고 믿거든. 그래서 하나는 꼭 비우지. 순진한 종족이야.”

“순진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잔인하고 자비를 모르는 종족인 거죠!”

둘 모두 맞는 말이었다. 오필리아는 어째서 인어들이 설화에서 인간을 구해 주는 입장으로 자주 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째서 아리엘이 최고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도 이안을 구했는지 역시.

‘지금도 단순히 이안을 포기하고 도망치면 될 텐데.’

그 간단한 것을 못해 이용당하는 것이 정확히 인어다웠다.

그래서 제게 비늘을 넘긴 걸까?

오필리아는 전생에서 아리엘이 알레이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편지에서는 아리엘이 목소리를 맞바꾸어 다리를 얻었다는 것과, 이안의 사랑을 얻어 내지 못하면 그녀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아리엘의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알레이와 거래하고, 이안을 찌르면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 있는 칼을 구해 주었다는 것 역시도.

그러나 아리엘은 이안을 찌르지 못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찌를 바에는 물거품이 되는 쪽을 택했다.

편지의 대목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안을 찌를 수 있겠어요? 내가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그건…….」

아리엘이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그건 분명 오필리아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아리엘의 비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오필리아는 종종 불안했다.

아리엘이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순간 다시 그 비참한 현실에 던져 놓으려는 건 아닐까…….

그녀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오필리아는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천천히 뺐다.

알레이가 끼워 주었던, 오필리아의 몸에 흐르고 있는 모든 마력을 차단하는 반지.

“아리엘. 잠깐 날 봐요. 당신이 여덟 조각이 날 만큼 오래 붙들어 두지 않을게요.”

“뭐, 뭘 하려는 거죠?”

“별것 아니에요. 스치듯 들었는데, 인어들은 탐지 마법에 능숙하다면서요. 내게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

“익숙한…… 느낌……?”

동그래졌던 아리엘의 눈이 도로 가늘어졌다가, 도로 커졌다. 얕은 파문이 수면을 스쳤다.

“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거죠? 왜 내 마력이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거예요?”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나 보군요.”

오필리아는 삼삼하게 대답했다.

역시 제게서 일어난 비정상적인 마력 충돌은 아리엘의 비늘을 삼킨 탓에 일어난 것이 맞았다.

동시에 이것은 지금 그녀가 딛고 선 곳이 아리엘이 만들어 낸 변화라는 증명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대체 이 마법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력을 차단해도 마법을 풀 수는 없었다.

실마리를 가진 건 아리엘뿐이었다.

오필리아는 아리엘이 몸을 반쯤 숨기고 있는 바위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리엘은 등 털이 삐쭉 선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오필리아를 경계했지만, 도망가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엘 역시 느낀 것이다. 지금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일에 엮였다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도망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오필리아가 만나본 결과 인외 종족들은 범상치 않은 일을 기어코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짐작 가는 이유는 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일을 밀물 일 듯 마주하는 종족이니, 회피가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낳는다는 것 또한 몸으로 익힌 탓이리라.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오필리아는 몸을 낮추어 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위 위의 여인과, 바위 아래 그녀를 꼭 닮은 인어의 시선이 맞닿았다.

“왜 내게서 당신의 마력이 느껴지는지 물었죠, 아리엘. 내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약속하면 당신의 저 남자를 구해 줄게요.”

마음이 있잖아요, 그에게.

오필리아가 이안을 가리키자, 아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이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고 해도 인어인 이상 한계가 있겠죠. 이대로 밤을 맞으면 그는 체온이 떨어져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를 구하지 않을 거고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죠? 그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잘못? 있다.

문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자신뿐이며, 지금의 이안은 결백하다는 것이겠지만.

오필리아는 건조하게 답했다.

“마음대로 생각해요. 감정과 행동에 꼭 이유를 붙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괜히 세이렌과 친한 게 아니군요. 인간은 적어도 세이렌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칭찬으로 듣지.”

뒤에서 산테가 으쓱했다. 어차피 이 자리의 모두가 아리엘이 내놓을 대답을 알고 있었으므로.

“……알겠어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테니 그를 살려 주세요.”

“잘 생각했어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죠? 당신은 대체 무슨…….”

“쉿.”

오필리아가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워 말을 잘랐다.

관록이 묻어나는 무기질적인 시선이 아리엘에게 머물렀다.

설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경계가 잔뜩 오른 고양이 같은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아리엘, 나는 당신이 죽은 이후의 시간대를 살다 왔어요.”

* * *

아리엘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눈을 감고도 알아볼 수 있는 해류들을 따라가면 인어들의 궁전이 나왔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어느 섬을 마법 등으로 조경해 만든 곳.

“아리엘! 잘 다녀왔니?”

“어서 오렴, 우리 막내!”

아리엘을 물 위로 보내고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던 아리엘의 언니들이 두 팔 벌려 그녀를 환영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금방 온다더니. 언니들 안 보고 싶었니?”

“해마라도 한 마리 데려가서 소식이라도 전하라니까. 어쩜 생일이라고 훌쩍 가 놓고 꼬박 하루 동안 안 돌아와.”

“그래, 다들 네 걱정이 많았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물 위는 재밌었어? 어때, 정말 별거 없지?”

“응, 별거 없더라.”

정말.

아리엘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말에는 능숙한 편이 아니었기에, 부디 이 미소가 여상해 보이길 바라며.

머릿속에는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눈 상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인어들은 죽으면 비늘을 남긴다죠. 당신의 언니들이 내게 그 비늘을 줬어요.

밤바다 울 듯 고즈넉한 목소리. 물새 날개 안쪽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음성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우아했지.’

말투, 음성, 시선과 모든 행동이 물살에 흔들리는 구피 꼬리를 닮아 있었다.

차고 단단한 산호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구한 그 인간 남자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

만약 그 인간 남자가 짝을 찾는다면 그녀를 추천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 같아도 나 같은 인어보다는 그런 인간 여자가 더 좋을 테니까.’

제게는 없는 다리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냉철함과 우아함까지 모두 갖춘 여자.

어쩜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를 수가 있을까?

오필리아는 말했다. 자신이 죽은 이후 비늘을 그녀에게 건넸고, 그녀는 그걸 먹고 과거로 돌아왔다고.

그래서 아리엘의 마력이 몸을 타고 돌고 있다고.

이는 아리엘에게도 놀라운 내용이었다.

인어의 마지막 비늘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어도 시간을 거스르기까지 하다니.

‘게다가 내가 그렇게 일찍 죽는다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에게서는 분명 아리엘과 똑같은, 그러나 훨씬 적은 양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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