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역설적이게도, 정확히 그 순간만이 아리엘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깃털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아리엘이 오필리아에게 정신이 팔려 암초 위에 자신이 널어 둔 것을 깜빡 잊었을 때.
산테의 손에 혼절한 이안이 덜렁 들렸다.
“아!”
뒤늦게 산테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엘이 단말마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미 창공으로 날아오른 뒤였다.
그리고 해변에 남은 것은, 꼭 닮은 붉은 머리칼의 두 여자.
“안녕, 아리엘.”
드디어 오필리아는 내내 듣기만 해 왔던 아리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침대 밑의 괴물은, 상상하던 것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 * *
반투명한 커튼이 휘날리는 오필리아의 방 안.
“오필리아.”
원래대로라면 평생 입에 담을 일도, 그럴 수도 없었을 이름을 입에 담으며.
알레이는 인상을 썼다.
그는 진녹색 깃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알레이가 오필리아를 방문한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오필리아, 계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일부러 부름에 신경을 써 가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들였더니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오필리아가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고 들어 찾았는데 말이다.
‘찾을 때마다 자리에 있길 바란 건 아니지만.’
찾을 때마다 만날 수 없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토록 바쁜 사람과 엮이게 된 제 운을 탓해야 할는지.
심지어 그가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그녀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손에 들린 진녹색 깃털.
이런 크기에 색을 가진 깃털이면 답은 뻔했다.
‘산테.’
그녀의 외출과 이 둘을 연결 짓는 것은 손쉬웠다.
덕분에 오필리아의 몸에 걸린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알레이는 김이 새 버렸다.
아니, 속이 상할 것일지도.
‘어느 쪽이든 어쩔 수 없지.’
알레이는 착잡해진 속을 외면하며 깃털을 도로 내려놓았다.
열린 창을 닫고 바람에 날린 서류들을 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거세, 자칫하단 종이 한 장쯤 잃어버려도 영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이 위에는 익숙한 달필이 적혀 있었다.
황족들이 사용하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장식적인 서체.
일정한 각도로 누운 세로획들이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그녀처럼.
곧고 우아하고. 또 그만큼 자유로운 사람.
그런 사람이 제게 눈길을 둬 주길 바라는 건 역시 과한 바람일까.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이러는지.’
답잖고 같잖군.
이럴 시간에 마법 연구나 더 하지.
‘어차피 오필리아는 날 신경 쓰지도 않을 텐데.’
생각이 그에 닿자 기분이 끔찍하게 더러워졌다.
알레이는 인상을 쓴 채 모은 종이를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알레이?”
제 이름이 저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도 있었나, 귀를 의심할 만큼 가볍게 떨어지는 발음.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낯이 보였다.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상대를 불렀다.
부를 때마다 과분하게 여겨지는 이름을.
“……오필리아.”
왜 당신은 내가 가장 보여 주기 싫은 모습일 때만 만나게 되는 건지.
그러나 올라가는 입꼬리만큼은 막을 수가 없으니,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해변에요. 마침 잘됐네요. 봐 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산테, 이리 와 볼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레이는 미소를 잃었다.
오필리아의 부름에 다가오는 한 사람이 보였던 탓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었다.
짧은 금발의, 유혹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 남자가 비슷한 체구의 다른 남자를 들고 다가왔다.
초라한 차림이 얼핏 보면 사용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그리고 구역질이 치밀 만큼 거북한 마력이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안녕, 디안.”
척 보기에도 분명했다. 어제 오필리아가 준 깃털의 주인, 산테.
산테는 잔뜩 인상을 쓴 알레이와 달리 서글서글한 모양으로 웃었다.
손에 든 남자를 손짓으로 가볍게 부유시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가 이 남자를 치료해 달라던데, 나는 남에게 거는 치유 마법은 못 써서 말이야.”
알레이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한층 더 짙어졌다.
“이 남자가 누구기에 대뜸 초면에 치료를 부탁하는 겁니까?”
“로넨 대공이에요. 난파를 당했고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필리아가 받았다. 경악한 알레이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로넨 대공? 내가 아는 그 사람입니까?”
“흑발이잖아요. 더 있겠어요?”
“그럼 설마 해변에서 이야기한 그게 로넨 대공에게 일어난 일인 겁니까?”
자신이 해류를 바꾸어서 누군가 난파를 당할 수도 있다던 오필리아의 말.
알레이는 당시 그것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로 넘겼지만, 그런 그의 불신이 무색하게도 오필리아는 태연히 긍정했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알레이는 사탕을 훔쳐 먹은 말썽쟁이 아이를 보듯 오필리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치료는 하겠습니다. 죽게 둘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설명은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지.”
“그럼요.”
오필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레이는 확신했다.
‘정말로 신전 놈들이 믿는 신이라는 놈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고.
* * *
조금 전, 해변.
오필리아는 아리엘을 붙들었다.
오필리아를 본 순간 아리엘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유감스럽지만 공주님. 도망은 못 가.”
“세이렌! 이거 풀어요!”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어. 우리 쪽 아가씨가 대화를 원하거든.”
산테의 훼방으로 실패했다.
그러니 만났다기보다는 붙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정말로 만났네.’
막내 인어공주 아리엘.
오필리아는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지난밤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보는 것은 굉장히 기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자신과 똑 닮은 태양 같은 머리칼. 벽해가 비친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동자.
물기가 가시지 않은 흰 피부는 햇빛 아래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웠고, 당혹으로 물든 낯은 생기가 넘쳤다.
마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젖어 있는 것이 꼭 옷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런 사람을 간단히 수식할 수 있는 말을 알았다.
“사랑스럽네요, 당신.”
“……정신을 잃은 사람을 납치해 놓고 그게 무슨 인사치레죠?”
물론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던 탓에, 돌아온 대답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 음성마저도 하프 연주를 닮아 있었으니, 인어에게 홀리는 사람이 종종 설화에 나오는 것 또한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기이할 상대.
기이한 명제였다.
단 한 번도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오필리아가 곱씹기에는 더더욱.
정말 기묘한 기분이었다.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조개 속 진주를 발견한 소년처럼 잠시 해야 할 일도 잊고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가 마주하고 선 상대는 당장이라도 몸을 숨기지 못해 안달이었으므로.
아리엘은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오필리아를 영문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나 당신을 알아요. 아까 해변에 왔던 사람이죠. 저 남자를 보고도 그냥 돌아갔던.”
“맞아요.”
“어떻게 조난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돌아갈 수 있죠? 내가 없었으면 저 인간은 죽었을 거예요!”
“당신이 있었잖아요? 결과적으로 죽지도 않았고.”
“설마, 처음부터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요?”
오필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리엘은 이 함정이 얼마나 교묘한 것인지를 깨달았던지, 조금 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거기에 내 이름도 알고, 거기에 세이렌의 수장을 이용하기까지……. 도대체 당신은 뭐 하는 인간이죠?”
“그거 나도 여러모로 궁금했는데, 도저히 안 알려 주더군.”
나무 하나 정도 높이로 내려온 산테가 허공을 유유히 유영하며 웃었다.
“우리 같은 인간 외의 존재들보다 비밀이 많은 인간이라니, 흥미롭지 않나?”
“흥미라니! 나는 당신처럼 제약 없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인간의 눈에 띄다니, 언니들이 이걸 알기라도 하면 난 끔찍한 형벌을 받고 말 거예요!”
“그럼 서둘러 도망치는 게 어때. 공주가 도망치면 이 남자가 대신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