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27화 (27/118)

제27화

산테의 입가에 미소가 서리고, 그는 오필리아의 손을 잡아 가볍게 제 쪽으로 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싼 산테가 지척에서 시선을 맞댄 채로 느슨하게 속삭였다.

“이 빚은 제대로 달아 두지.”

“도와주는 건가요?”

“그래.”

산테는 그대로 오필리아를 한 팔로 안아 들더니,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뭘 하려는 거죠?”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것.”

이렇게 말하면 싫어할 줄 알았더니.

오필리아의 눈망울이 커졌다. 그 안에 든 것은 명백한 기대감이었다.

이런 반응이면 맹숭하게 보여 줄 수 없지.

그다음 순간, 산테의 날개뼈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금빛 깃털로 뒤덮인 날개에서 깃털이 두어 개 빠져 바람에 흩날렸다.

놀랍게도, 날개를 떠난 깃털은 더 이상 금색이 아니었다.

금빛 찬란히 빛나는 날개를 보던 오필리아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산테, 내게 준 깃털은 금색이 아니었잖아요.”

“속인 건 아냐. 내 원래 깃털색은 진녹색이니까.”

금빛 날개는 수장의 상징이다.

하지만 산테는 그런 것까지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러고 있으면 들키기도 쉽고.

은신을 쓴 산테가 오필리아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새들과 시야를 공유했다.

창공을 마당 삼은 이들의 너른 시야가 오필리아의 발아래 놓였다.

오필리아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야를 즐기느라 바삐 눈동자를 굴렸다.

산테에게 부탁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해 줄 거란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테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느슨하게 미소 지은 산테가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하며 물었다.

“하늘을 날아 보니 어때. 즐겁나?”

“즐거워요. 당신들은 늘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겠군요.”

대답하는 오필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즐겁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표정.

정말 겁 없는 암컷이었다. 자신이 여기서 붙든 손을 놓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보통은 쉽게 겁내는데 말이지.’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하물며 세이렌들 중에서도 종종 고공을 두려워해 비 없는 날에도 낮게 나는 이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산테는 지금, 일부러 높게 날고 있었다. 당황하거나 위축된 오필리아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조금도 겁내지 않는 모습을 보니, 반대로 의아해졌다.

저 무모함은 두려울 것이 없어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인지…….

의문을 머금은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산테는 이것이 썩 좋지 못한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질문은 꺼내 놓았을 때 언제고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판 다른 대답을 했다.

“뭐, 그렇지. 새삼 부럽기라도 한가?”

“아뇨.”

돌아온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난 가질 수 없는 걸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산테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오필리아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고, 여전히 그녀는 발아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필리아가 평소 걸어 두는 빗장의 걸쇠가 느슨해져 있었다.

산테는 동물적인 육감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에 대한 저 대답이,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전 자신이 의문했던 것에 대한 해답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오필리아가 평소라면 내보이지 않을 근간을 엿볼 기회라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럼 네가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이기에?”

“내가 부러워하는 건,”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던 오필리아의 말이 우뚝 멈추었다.

새삼스럽게 빗장을 다시 여미느라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시기가 나빴을 뿐.

두 사람은 해변에 거의 도착해 있었고, 내내 아래를 보던 오필리아가 때마침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산테, 저기 봐요. 저 붉은 머리. 보여요?”

“……잘 보이는군.”

염병하게도. 산테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좋은 기회였는데. 일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나.

산테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표정이 미비하게 구겨졌다. 다른 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변화였지만, 오필리아는 산테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기분이 갑자기 나빠진 것 같은데.’

문제는, 기민한 촉으로 그 이유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산테의 기분이 나빠진 이유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세이렌이 인어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

썩 사이가 좋지 못한 종족에게 다가가야 하는 상황이니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하다.

오필리아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채로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산테, 혹시 가까이 다가가기 싫다면 그냥 날 내려 줘도 돼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인어공주에게 다가가기 싫어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나요?”

오필리아의 물음에, 이번엔 산테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그는 찡그리듯 웃더니, 대답했다.

“……분명 인어들하고 우린 사이가 썩 좋지 않긴 하지만, 오필리아. 난 수장이야.”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거지.

그렇게 말을 마친 산테가 인어 공주, 아리엘에게로 다가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개 끝을 흔들었다.

금빛 날개가 물결치듯 부드럽게 흔들리고, 그 끝에서 깃털이 하나 빠졌다.

진녹색 깃털은 살랑살랑 아래로 떨어지더니,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아리엘의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암초에 앉은 갈매기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던 아리엘의 시선이 깃털로 옮겨가더니, 물에 젖은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리엘이 고개를 휙 치켜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필리아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붉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인어가 허공을 향해 발랄하게 소리쳤다.

“세이렌!”

“그래, 공주 정도면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지.”

그와 동시에, 산테가 해변으로 내려앉으며 은신을 풀었다.

그는 금빛 날개로 오필리아를 감싸 그녀를 아리엘의 시야에서 가려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산테의 날개를 본 아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금색 날개. 들은 적이 있어……. 세이렌의 수장이군요, 당신?”

“알아봐 주니 고맙군. 막내 인어공주가 명민하단 소리는 들었는데.”

“칭찬은 고마워요. 날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잠깐.”

인간의 것과 비슷하지만, 한결 톤이 높고 노래하는 듯 부드러웠던 인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수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날 찾아왔나 했더니……. 날개 아래 뭘 감추고 있는 거죠?”

아리엘의 추궁에, 산테가 건조하게 끊어 웃었다.

“이런, 막내 공주님이 지나치게 명민하신데…….”

“같잖은 마법 쓸 생각은 말아요.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내 눈에 다 보이니까.”

“설마. 인어들이 탐지 마법에 능한 걸 내가 모를 리 있나.”

산테가 손을 내저으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여유로워 보이는 건조한 웃음 기저에는 당혹이 깔려 있었다.

굳이 마력 덩어리인 날개로 감추기까지 했는데, 대면하자마자 들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리라.

오필리아는 그것이 산테, 알레이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있는 자들은 언제고 상황이 제 능력 아래 뜻대로 흘러갔기 때문에,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다소 무방비한 것이다.

늘 여유롭다는 것은, 늘 무방비하다는 뜻도 되니까.

‘그래서 내가 첫 만남에 반지를 끼우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물론 산테 역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이런 상황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나.

상대의 약점부터 파악할 것.

그것이 아무 능력 없는 오필리아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산테에게 속삭였다.

“산테, 저기 암초에 있는 남자를 낚아채 와요. 저 인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산테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어이가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상황이 우습다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산테가 날개를 거두어들였다.

뱀의 동공처럼 짙은 녹빛의 깃털이 바람결에 유사처럼 흩어지고, 해변을 딛고 선 오필리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