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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26화 (26/118)

제26화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5년도 더 전에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가 로넨에 있다고 하네요. 만약 내가 알려 준 이들에게서 소득이 없다면 이 사람에게도 한 번 가 봐요.」

알레이가 오기 전까지, 로넨 성의 마법사는 예니트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알레이는 실제로 예니트와 교류했고, 로넨에서 기억을 찾았다.

그러니 그 사람이야말로 알레이의 기억을 되찾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될 사람이지만, 그에게서 당장 도움을 받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여기는 라딘이고, 그는 멀리 떨어진 로넨 성에 콕 박혀 있다는 것.

그래서 오필리아에게는 이안의 표류가 필요했다.

아무리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은둔형 마법사라고 해도, 타국에서 그들의 주인이 표류당해 위독한 상황이라고 하면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오필리아가 쓴 편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로넨 대공이 표류를 당해 현재 위독한 상태이니, 처치할 수 있는 마법사를 보내 달라는 것.

‘최대한 빨리 오면 좋겠는데.’

오필리아는 편지를 집어 들어, 한 번 쭉 읽어 보고는 잘 접어 봉투에 넣고 그 위로 인장을 찍어 밀봉했다.

그리고 뒤를 돌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전서구들이 열심히 인간 음식을 축내는 것이 보였다.

“오필리아! 이거 진짜 맛있다!”

“이거 뭐랬지? 무화과? 이거 더 주면 안 돼?”

두 뺨에 잼이며 크림 따위를 잔뜩 묻힌 어린 세이렌들이 삐약거렸다.

오필리아는 제 몫으로 놓여 있던 무화과 파이 접시를 들어 그들의 앞에 놓아 주었다.

아니, 놓는 척을 했다.

그러자 접시에 달려들려고 했던 세이렌들이 순식간에 돌변해 으르렁거렸지만, 오필리아는 늘 그렇듯 단호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세이렌.”

“으으, 그거 먹고 하면 안 돼?”

“안 돼. 다녀오면 두 조각 줄게.”

“알겠어!”

세이렌 삼형제 중 제일 어린 딜로가 벌떡 일어서서는, 오필리아의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챘다.

“다녀올게! 나만 두 조각 줘야 해!”

“뭐야, 딜로! 그런 게 어딨어! 나도 갈래! 나도 두 조각 줘!”

“나도!”

저들끼리 싸움이 붙은 세이렌들은 오필리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새로 변하더니, 창밖으로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그러니까, 잼과 크림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틈도 없이 말이다.

아마 편지를 받을 사람은 웬 새들이 간식 접시 위에서 뒹굴다 왔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필리아는 농담 같은 생각을 하곤, 몸을 틀었다.

그러자 어린 세이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던 산테가 은신을 풀며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세이렌들을 아주 잘 다루는데, 오필리아.”

“당신이 있는데 어려울 게 있겠어요.”

무신경하게 던져진 오필리아의 말에 산테의 눈빛이 묘한 빛을 띠었지만, 오필리아는 이미 몸을 돌린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전신 거울 앞에서 로브를 걸치는 오필리아에게, 산테가 다가가 모자를 뒤집어씌우며 말했다.

“그보다, 놀랐어. 날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

“내가 찾은 게 아니라 당신이 온 거잖아요.”

오필리아가 도로 로브의 모자를 내리며 산테의 말을 정정했다.

아침에 이안을 버려두고 돌아왔더니 산테가 빈방을 제집인 양 차지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물론 다행히도, 이번에는 유리창을 깨진 않은 듯했다.

산테에게 물어보자 그때는 장소를 모르고 날아왔던 거였고, 이번에는 장소를 알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때의 당혹스러움을 다시 떠올린 오필리아가 전신 거울을 통해 산테를 보며 핀잔했다.

“다음부터는 사람 없는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럼 네가 있을 때는 와도 된다는 건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청해를 닮은 매서운 시선이 뱀을 닮은 산테의 것에 얽혀 들었다.

분명 핀잔의 시선이었지만, 산테는 그녀가 자신을 저렇게 뾰족한 눈길로 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입 밖으로 꺼낸다면 단순히 뾰족한 눈길로는 그치지 않을 법한 생각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발톱을 세우는 꼴이 같잖았다.

그 같잖은 청염이 꽤나 매혹적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매번 저렇게 베어 물고 싶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리라.

그러나 오필리아는 눈치가 좋고 기민한 여자였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이 유흥을 꼼짝없이 들킬 것이다.

산테는 부러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사람의 유무보다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게 관건이었겠지. 알아.”

“……그래요, 잘 아는군요.”

그의 실토에 그제야 오필리아의 시선이 풀어졌다.

다시 전신 거울로 시선을 돌린 오필리아가 머리를 땋아 내리며 말했다.

“오기 전에는 미리 연락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당신이 먼저 연락할 방법이 있나 싶네요.”

“없진 않지.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나는 깃털을 흔들 수 있거든. 다만 과연 네가 그걸 눈치챌 수 있을까 싶고.”

“그건 그렇네요. 눈치채기 힘들 테니 그냥 부를 때만 와요.”

“노력은 해 보지.”

누가 보기에도 실행 의지가 없어 보이는 대답에 오필리아의 눈썹이 도로 치켜세워졌지만, 산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내가 와 준 덕분에 네가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디안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놀라웠다고.”

“아, 그 부분이요.”

“둘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디안이 더 협조적이고 효율도 좋을 텐데, 아닌가?”

오필리아는 부정하는 대신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끈을 조였다.

“그건 맞죠. 하지만 이건 알레이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나는 도와줄 수 있고 디안은 도와줄 수 없는 문제라니. 또 무슨 난감한 일을 시키려고.”

“별것 아니에요.”

오필리아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몸을 돌렸다. 덕분에 바로 뒤에 서 있던 산테는 그녀를 어설프게 안을 뻔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접촉을 신경 쓰는 것은 산테뿐이었던지, 또박또박 몇 걸음 걸어 나간 오필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 막내 인어 공주 본 적 있어요?”

그러자 산테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날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인어까지?”

“난 그녀를 만나야 해요.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얼추 알지만, 인간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조금만 가까워져도 모습을 숨기거든요.”

“이제 알겠군.”

산테가 헛웃음을 지으며 오필리아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짐에 오필리아가 점점 고개를 들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산테가 등지고 있었던 탓에, 그녀는 머잖아 그의 그림자에 갇혔다.

“인간은 두려워하니 인간이 아닌 나를 이용해서 그 막내 인어 공주를 만나겠다는 거지.”

산테의 덩치며 역광에 위협을 느낄 만도 한데, 오필리아는 덤덤하게 긍정했다.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이렇게 성가실 줄 모르고.”

막내 인어 공주라니. 가뜩이나 인어들과 사이도 썩 좋지 않은데.

인어 왕이 가장 싸고돈다는 그 공주에게 접근했다는 게 알려지면 꽤 골치 아파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바꾸어 말하자면 제법 재밌을 거란 이야기도 됐다.

산테는 머리를 굴렸다.

원래 그가 오늘 오필리아를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자신이 일을 잘했다며 생색을 좀 내려던 것도 있었고.

‘디안과 이 암컷이 무슨 관계일지 좀 보려고 했는데.’

그가 아는 알레이는 결코 누군가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마탑의 주인이 되었으니 별수 없이 친절이 습관이 된 경향은 있지만.

그래서 산테는 처음에, 알레이와 오필리아가 굉장히 사무적인 관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말할 때 워낙 감정 없는 말투로 얘기한 탓도 있고.

그러나 지난번 오필리아와의 대화에서, 방문 너머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주저하던 알레이를 알아차렸을 때.

산테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상황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 불쑥 나타나서 살펴보려고 했던 건데.

‘이 방법도 나쁘지 않겠는걸.’

상황이 제법 재밌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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