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나름대로 숨는다고 몸을 숨겼지만, 미숙해서 머리칼이 빼꼼히 튀어나온 것이 훤히 보였다.
저렇게까지 잘 보이는데 지난 생에는 알아채지 못했다니.
‘그땐 이안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걸까.’
문득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언니들이 생각났다.
아리엘이 저렇게까지 허술한 걸 그들이 보았더라면 지금쯤 다들 이마를 짚고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뭐, 그래도 이번에는 그런 비극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오필리아는 숙였던 몸을 세워, 해변에 쓰러진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한때 사랑했던 이를 보는 시선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싸늘한 시선.
꼭 그만큼 덤덤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구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구해 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이번 생에는 짓지 않은 죄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
말마따나 자신이 모든 걸 망쳐 놓은 게 정말이라면, 이번에는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해변을 떠났다. 왔던 걸음 그대로 아무것도 들지 않고, 아무도 부르지 않은 채.
그녀의 두 번째 삶에 그는 필요 없었다.
* * *
해변에 갔다 돌아오니 릴리스가 야단이었다.
“이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다녀오시는 거예요?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제게도 말씀이 없으셔서 내내 전하의 방 앞에서 기다렸잖아요.”
“그래서?”
“어딜 가시면 가신다고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이건 무슨 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으면 밖을 다닐 수도 없는 위치였던가, 릴리스?”
“그건, 아니지만 제게는 전하의 생활을 폐하께 보고드릴 의무가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럼 내 방 앞에서 밤을 새지 그랬니? 그게 감시하기에는 한결 편했을 텐데.”
오필리아가 날카롭게 대답하자 릴리스가 풍선 눌린 모양으로 불만스럽게 입을 닫았다.
릴리스가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제 하이다르가 오필리아를 찾아왔던 일로 잔뜩 가시를 곤두세우는 게 보였으니까.
그러니 다른 때였더라면 적당히 상대라도 해 주고 경계를 풀도록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오필리아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명령했다.
“용건이 있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다면 나가.”
“오늘 잠깐 신전에 다녀와야 하잖아요. 하루 정도 걸릴 거라, 떠나기 전에 아침 인사라도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 매정하게 구실 줄 몰랐네요.”
“언제는 우리가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던가?”
군소리 말고 나가기나 하라는 대꾸에, 릴리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탁.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릴리스는 흘긋 자신이 나온 곳을 돌아보았다. 방을 돌아보는 눈길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녀의 상사는 최근 굉장히 수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릴리스가 오필리아를 따라 감찰 지역을 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동안 오필리아는 정해진 외출 이외에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고, 구태여 누군가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와 엮이는 것을 가장 성가셔하는 사람.
‘그런데 요즘 자꾸 누군가를 만나고 다니는 것 같단 말이지.’
릴리스는 어젯밤 잠에서 깨어 오필리아의 방을 찾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시 잠들기 전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오필리아의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오필리아가 밤늦게 책을 읽느라 불을 켜고 있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도 했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릴리스는 홀린 듯이 그 방으로 다가갔다.
왠지 누군가 등을 떠밀기라도 하는 거 같았다.
어쩌면 유난히 숨죽인 기류가 낯설게 느껴진 탓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방 안에서 불빛만큼이나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분명 남자 목소리였어.’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상대는 남자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현장에 들이닥치고 싶었지만.
‘카델리아 전하께서 반드시 확실한 증거를 잡으라고 하셨지.’
릴리스는 라딘으로 떠나기 직전 카델리아의 부름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녀가 자신을 부르다니, 드디어 제가 잡은 줄이 바뀌려나 싶어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카델리아는 소문처럼 오만한 태도로 릴리스에게 말했다.
-오필리아에게 흠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잡아 와.
이제 오필리아를 따라다니며 한직만 전전하는 신세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카델리아가 요구한 것은 한 가지였다.
오필리아의 약점을 잡아내는 것.
-오필리아가 분명 추문을 만들 일이 또 있을 거야. 그 여우같은 본색이 어디 가겠니? 나랑 스캔들이 날 뻔한 로넨 대공께 꼬리친 것만 봐도 뻔하잖아.
카델리아는 로넨 대공과 자신이 잘 되지 않은 것이 모두 오필리아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필리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알리고, 약점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증거를 모아와.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나도 확실히 포상하지.
카델리아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굴 만큼, 현 사교계의 실세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오필리아처럼 아무것도 없이 지방이나 전전하는 신세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언제까지 황녀답지도 않은 황녀 뒷바라지나 하고 다닐 수는 없어.’
그래서 릴리스는 현장에 들이닥치는 대신 기회를 엿보는 쪽을 택했다.
지금처럼, 일부러 이른 아침부터 오필리아의 방을 방문한 것 또한 그의 연장선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겠지.’
릴리스는 방문 너머 있을 오필리아를 노려보듯 애꿎은 문을 한 번 노려보고는 걸음을 틀었다.
카델리아에게 전서구를 날릴 일이 그리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며.
* * *
오필리아가 이안의 표류로부터 얻으려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리엘과의 만남.
과거로 돌아온 이래, 오필리아는 언제고 아리엘을 만나 묻고 싶었다.
당신이 바랐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무엇을 바랐기에 내가 여기로 돌아왔고, 당신의 기억을 꿈꾸며, 이 마법이 풀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러나 지금의 아리엘이 저 질문들에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떠보는 정도겠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무얼 바랄 것 같은지.
여전히 명확한 대답은 될 수 없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얼추 소득은 있을 것이다.
아리엘이 죽으면서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이 마법이 풀리고 나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얼추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무엇보다 계속 반지를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이야 이 반지를 껴서 마력의 충돌을 막고 있다고 한다지만.
오필리아는 반지가 언제고 제 손에 끼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알레이가 반지를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었고, 반지를 얻어 낸다 하더라도 망가질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했다.
다른 반지로 대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도구라는 게 어디 그리 흔한 물건이던가.
오필리아는 빨리 제 몸에 흐르는 마법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해변에서 아리엘을 봤을 때 당장 달려갔겠지만.
‘경계심이 많은 인어에게 그렇게 접근할 수는 없지.’
그러니 우선은 다른 것부터 해야 한다.
탁.
오필리아가 내려놓은 깃펜이 책상을 빈둥 굴렀다.
그 깃펜은 조금 전까지 오필리아가 편지를 쓰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오필리아가 이안의 표류에서 얻어내려 한 것은 비단 아리엘과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 사람을 더 끌어들여야 했다.
알레이가 로넨으로 온 이유이자, 훗날 그의 기억을 찾는 데 큰 기여를 한 사람.
로넨 성의 마법사 예니트.
과거의 오필리아는 예니트와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지만, 종종 알레이가 그 마법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그땐 단순히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아리엘이 알레이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