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요즘 다들 난리네. 어제는 가재가 꼬리로 걷는 걸 해 보겠다면서 뒤로 자빠지더니.”
“고모는 구피들을 데리고 꼬리춤을 연습시키더라. 음악도 다 준비했대.”
인어들은 주거니 받거니 아리엘의 생일을 위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떠들며 장난을 쳤다.
구피 스무 마리가 대열을 맞춰 춤을 추고, 해마가 노래하고.
흰동가리도 한마디 거들어, 생일 연회를 할 장소로 골라둔 난파선은 갖은 진주와 산호로 잔뜩 꾸며 두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사이 아리엘의 머리는 인어들의 손에 갖은 모양으로 땋아지고 풀리길 반복했다.
오필리아는 그들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언니들, 내 눈치 그만 봐도 돼.”
그들이 아리엘의 기분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결국 아리엘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언니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소원은 바뀌지 않아.”
옆에 앉아 있던 인어들이 순식간에 낙담하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서도 가장 표정이 나빠진 분홍 머리 인어가 덥석 아리엘의 손을 잡았다.
“대체 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그래, 아리엘. 그 소원이 아니더라도 빌 수 있는 건 많잖아! 성인식 생일에만 빌 수 있는 소원인데, 아깝지 않아?”
옆에서 머리에 엉킨 해초를 떼던 인어가 머리카락을 내던지고 아리엘의 다른 손을 잡으며 물었다.
“꼭 수면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겠니?”
“응. 꼭 한번 보고 싶어.”
그러나 아리엘은 강경했다.
“평소에 아버지는 수면 밖으로 머리도 못 내밀게 하시잖아.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하지만 그건 네가 은신 마법을 못 쓰니까 그런 거잖아.”
“은신 마법을 못 쓰는 건 셋째 언니도 마찬가지인데?”
반박할 수 없었던지, 다른 인어들이 잠시 말을 잃었다.
아리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언니들의 손을 조심스럽게 뿌리쳤다.
“나도 알아. 어머니가 인간들에게 들켜서 잡혀 돌아가신 거. 그래서 아버지가 수면으로는 절대 못 나가게 하는 것도 알아.”
“아리엘, 알면서 왜 그러니? 수면 밖에는 별것도 없어!”
“그건 봤으니까 할 수 있는 얘기야, 언니.”
아리엘이 벌떡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수면 밖에 뭐가 있는지는 내가 보고 생각할게.”
“아리엘, 하지만.”
“그만. 아리엘 말이 맞아.”
조금 전, 흰동가리를 데려왔던 남색 머리칼의 인어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큰언니!”
“언니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
다른 인어들이 호들갑을 떨며 남색 머리칼의 인어에게로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아리엘 못지않게 단호했다.
“아리엘도 이제 곧 성인이야. 앞길은 알아서 결정할 수 있을 때가 온 거지. 우리가 싸고돈다고 될 일이 아냐.”
“큰언니…….”
아리엘이 젖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나 싶더니,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언니, 고마워. 나 정말 조심할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게!”
“그건 가 봐야 아는 거지. 조심한다니 믿을게. 위험한 일을 하고 싶거든 우리 얼굴을 한 번만 떠올려 주렴.”
“응, 사랑해. 언니!”
아리엘이 언니를 끌어안고 헤헤 웃자, 다른 인어들이 슬그머니 포옹에 끼어들었다.
대부분은 여전히 아리엘의 결정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리엘의 결정뿐이었다.
“아리엘,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우린 널 사랑해.”
아니, 바닷속의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포옹에 끼어보고자 아리엘의 뺨에 찰싹 달라붙은 흰동가리가, 다정한 인어들의 목소리가.
겨우 한 명의 생일을 위해 온 바다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그 말들이…….
그들을 담은 모든 물이 아리엘을 위해 있는 것만 같아서 숨이 막혔다. 고개를 들면 그물 같은 물그림자가 그들을 덮고 있다.
조심하겠다는 말보다, 여섯 언니들의 얼굴보다 사랑이 앞설 미래를 까마득히 모르고 아리엘은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결국 오필리아는 울면서 잠에서 깼다.
깨고도 한참을 두 손에 낯을 묻고 울었다.
제게 비늘을 주었던 단발 인어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그 꿈과 겹쳐져서.
자신이 알레이의 책 사이에서 발견했던 편지글이 이제는 또렷한 목소리로 들려서.
분명 이건 아리엘의 기억이겠지.
아리엘이 준 비늘을 먹고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기억 한두 개가 제게 남아 있는 것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오필리아는 눈물이 말라붙어 가는 뺨을 들어 침대 옆의 달력을 보았다.
동이 터 가는 아침, 여명의 빛이 붉은 잉크로 표시한 날짜를 밝혔다.
그제야 오필리아는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꿨는지 미약하게나마 깨달았다.
‘오늘이구나.’
해변의 이안을 구했던 날이.
그때도 이상하게 아침 일찍 눈이 떠졌었다.
로넨으로 가기 전의 오필리아가 아침잠이 적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제법 의아한 일이다.
햇살에 기민한 것도 아닌데 왜인지 이른 아침 햇살에 눈이 떠져서 밖으로 나갔었다.
‘그리고 이안을 만났고.’
오필리아는 기억을 되새기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라딘의 성에 난 산책로는 해변을 끼고 성을 빙 둘러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산책을 하던 오필리아가 우연히 이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과거지.’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
이안이 제게 어떻게 다정했고, 또 어떻게 무정했는지 몰랐기에 더욱 천진했던.
‘차라리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안의 표류 원인을 아는 시점에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알레이가 해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산테에게 표류한 선박에서 사람을 구해 달라고 하기만 했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안의 난파로 얻어 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오필리아 또한 견뎌 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과거라거나, 이안에 대한 마음 같은 것들.
지난 5년간 그녀를 괴롭혔던 것들이 과거로 돌아왔단 사실만으로 씻은 듯 사라질 수는 없었다.
황궁에서 오필리아가 이안을 만났을 때 무작정 도망쳤던 것만 생각해도 그 사실은 명백했다.
때문에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오필리아의 낯빛은 점점 나빠졌다.
파도가 보일 즈음에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눈물 자국이 남지 않은 뺨을 바닷바람이 길게 쓸고 갔다.
찡그린 시선이 점차 밝아져가는 해안을 헤집었다.
그녀는 바랐다. 이안이 있기를.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리엘의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러나 현실이 오필리아에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던가?
오필리아는 결국 해안선에 도착해, 그녀가 바랐고 또한 바라지 않았던 것을 마주했다.
“이안.”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호명.
철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해안을 잡아먹은 파도가 오필리아의 발을 스치고 갔다.
그리고, 오필리아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한 남자도.
난파당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닷물에 푹 절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뜯어 먹었는지, 아니면 암초가 찢어 놓은 건지 모를 너덜너덜한 옷자락.
햇볕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흰 피부는 군데군데 긁힌 흔적이 역력했고, 심지어는 기절한 채라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모습을 보자 오필리아는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를 향한 감정에 더는 애정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애정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궁지에 몰린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이 이안이었을 뿐이다.
황궁에서 이안을 만나 도망쳤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그 길지 않은 시간이 오필리아의 시야를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그녀는 손 쓸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지도 않았고, 목표도 생겼다.
그런 오필리아에게 이안은 이제 완전한 타인이었다.
오필리아는 무감하게 몸을 숙여, 남자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얕은 날숨이 검지를 스치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오필리아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남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구조를 위해 사람을 부르러 가거나, 남자를 흔들어 깨우려 했겠지만, 오필리아는 아니었다.
그런 실수는 지난 생에 한 번 했다.
몸을 일으킨 오필리아가 해안의 모퉁이에 있는 암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붉은 머리칼이 암초 뒤로 화들짝 놀라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오필리아와 꼭 닮은 붉은 머리칼.
‘거기 있었구나.’
아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