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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23화 (23/118)

제23화

다행히 세이렌의 기억력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월등했기에, 지난날 알레이와 대화했던 것이 떠올랐다.

-디안. 요즘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냐?

-이번에 새로 상급에 올라온 코르넬리라는 놈이 사고를 쳐서……. 마탑의 유리란 유리는 전부 깨 먹었다.

-그거 대단한데? 뭘 했기에?

-모래를 유리로 단숨에 바꾸는 공식을 만들어서 실험했다는데, 범위 설정을 안 해 놨어. 심지어 공식도 조금 잘못되어 있어서 유리가…….

-설마 전부 모래로 바뀌었다거나?

-왜 아니겠냐…….

덕분에 잔뜩 웃은 산테가 눈물을 닦으며 다시 물었다.

-그거 완전 또라인데? 범위 설정은 기본 중의 기본 아냐? 그런 놈이 어떻게 상급으로 올라오냐? 마탑 관리 안 해?

-아니, 했어. 했다. 코르넬은 상급 마법사가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해. 어쩌면 더 위도 조만간 가능할 거다.

-도저히 안 믿기는데. 범위 설정조차 안 하고 마법을 구현하는 놈이 어떻게?

-정말로, 덤벙거리긴 하지만……. 그 애는 마법식 만드는 데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해.

아마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최연소 간부 자리도 노릴 수 있을 거다, 당시 알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저 코르넬리라는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 어려 보였다.

설마?

이번 혼란의 몫은 산테에게 돌아갔다.

산테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수컷, 내가 듣기로 몇 년 전에 마탑에서 어떤 놈이 실험을 잘못해서 모래를 유리로 바꾸려다가 마탑의 유리를 죄 깨 먹었다고 했는데,”

“아, 알고 계셨나요? 그거 제가 했던 건데.”

“그래?”

이 애가 딱 좋겠군.

산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서렸다.

구경하기 딱 좋은 판을 짤 때면 산테가 으레 짓는 미소였다.

“다들. 이 수컷이 굉장히 열정적인데, 디안의 상태를 살피러 이 수컷을 내보내는 게 어떻겠나.”

“전 좋습니다!”

“이견 없지? 이견 있다면 본인이 직접 저 수컷과 동행하고.”

산테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가 정말로 이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산테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넬리가 다녀온다면 괜찮겠지요.”

마법사들의 폐쇄성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조금도 모르는지, 코르넬리는 아주 씩씩하고 투지에 찬 표정이었다.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모시고 올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뭐. 어쩔 수 없겠군.”

산테가 마지못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코르넬리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렇잖아도 코르넬리는 앳된 티가 나는 얼굴이었던 탓에, 산테는 그 뒤로 붕붕거리는 꼬리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그는 매우 즐거워졌다.

그때 알레이가 코르넬리에 대해 한 말은 저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 천재가 마탑에 있으면 좋지. 잘됐군.

-그래,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다.

-뭔데?

-날, 너무…… 존경해. 웃지 마라. 진심이야.

물론 산테는 그때 알레이에게 너무 자만하는 게 아니냐며 마구 웃어 주었지만, 지금 보니 알레이가 한 말은 오히려 축소된 것임을 느꼈다.

‘존경 수준이 아니잖아, 디안.’

이건 거의 뭐. 숭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러니 이놈을 그들에게 보내면 재밌어지겠지.

산테의 음험한 시선이 허공에 오필리아를 덧그렸다.

간만에 흥미로운 암컷이었다. 갖은 특이한 짓은 다 하면서, 반응이 극히 드물다는 것도.

‘그 암컷에게 내 둥지를 보여 주면 좀 반응이 있으려나.’

산테가 누군가를 만날 때는 대개 인간들 틈에서였다.

인간은 쉽게 질리고, 그들은 쉽게 귀찮은 짓들을 하니까.

정체를 알려 주면 두려워하거나 소유하고 싶어 하고, 혹은 선망한다.

짧은 생에 걸맞게 열심히 불타오르는 인간들.

산테는 인간들의 불꽃같은 면모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주는 상처나 성가심에 대해서는 진절머리를 내는 편이었다.

그러니 둥지로 오필리아를 데려오겠다는 생각은 정말 파격적이었지만.

‘일을 잘했다고 칭찬이나 한번 받아 볼까…….’

다른 생각에 푹 빠진 산테는 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 *

그날 밤, 오필리아는 꿈을 꾸었다.

낯선 꿈이었다.

평소 그녀의 꿈이 늘 그녀를 다그쳤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보통 그녀의 꿈은 다양한 장소를 오고 갔다.

그건 로넨 성이기도 했고, 이안과 만난 해변이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알레이가 로넨 성에서 지냈던 외탑이기도 했다.

모든 곳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어느 꿈에서 그녀는 자신과 똑같이 차려입은 붉은 머리 여인과 이안이 정원을 거닐며 웃고 있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어떨 때는 아리엘이 그녀에게 원망을 쏟을 때도 있었다.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네가! 너만 아니었더라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야!”

꿈에서 깨면 늘 알았다. 그 원망은 오필리아 스스로 가지고 있는 죄의식의 투영이라는 것을.

자신이 모든 걸 망친 게 아닐까.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며 손가락질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내가 둘 사이에 없어서 이안과 아리엘이 행복해지는 게, 그게 과연 무슨 소용이지?

결국 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 ‘모두’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건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원망에 몰리고 몰려 숨이 졸리면 그제야 꿈에서 깨곤 했다.

가끔 원망하는 것이 아리엘이 아닐 때도 있었다.

가끔은 이안일 때도 있었고, 알레이일 때도 있었다.

갖은 죄의식들은 언제고 오필리아의 숨통을 졸랐다.

그녀는 언제나 잠들기를 두려워했고, 불면에 시달렸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오필리아는 며칠 내내 아무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잤다.

그랬기에 이 꿈이 더욱 이질적인 것도 있었다.

이 꿈은 오필리아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얘들아, 이거 봐! 이 애가 소용돌이로 헤엄칠 수 있대.”

“그건 나도 하는데?”

“아냐, 이거 봐. 이 애는 가로로 헤엄친다고. 봐봐!”

파랗게 일렁이는 물이 뺨을 감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붕 뜬 머리칼들이 느릿느릿 가라앉으며 물살에 유영했다.

높은 웃음에는 기포가 샜고, 노란 해변을 적신 햇볕 그림자에는 그물 모양이 남실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오필리아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닷속이었다.

오필리아의 주위로 몇 마리의 인어들이 몰려 있었다.

그 인어들은 오필리아를 ‘아리엘’이라고 불렀고, 오필리아의 하반신에는 더 이상 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에 놀랄 틈은 없었다.

“잘 봐, 얘들아!”

남색 머리칼을 가진 인어의 손바닥 위에 있던 흰동가리가 훌륭한 나선을 그리며 쏜살같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크센트에서 나선으로 회전하며 쏘아지는 석궁을 쓴다고 했는데, 그걸 물속에서 쏘면 저런 모양이 될까.

물고기 꼬리에서 포르륵 피어오른 기포가 구슬처럼 수면으로 올라가고, 오필리아는 물고기에게로 빨려드는 수면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흰동가리는 정말로 헤엄을 잘 쳤다. 그는 산호초 끝에서부터 끝까지 멋진 나선 헤엄을 보여 주더니, 의기양양하게 지느러미를 팔락거리며 인어들에게로 돌아왔다.

머리에 엉킨 녹초를 풀던 인어가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쟤 좀 봐, 꼬리가 아주 바짝 섰어!”

“저거 한다고 며칠 내내 연습하더라고. 곧 막내 생일이잖아. 연회에서 보여 줄 장기가 필요했대.”

남색 인어는 꼬리를 아주 멋들어지게 흔들며 다가오는 흰동가리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더니, 흰동가리를 데리고 오필리아-아리엘에게로 와서는 물었다.

“자, 어떠니. 아리엘?”

“멋진데!”

그러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목소리 역시 오필리아의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건 아리엘이었니까.

아리엘이 활짝 웃으며 흰동가리를 손끝으로 간질였다.

“내 생일을 위해서 그렇게 연습해 주다니, 감동이야!”

흰동가리가 둥근 몸체를 비틀며 지느러미를 팔락거렸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며 짐짓 점잔을 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물 빠진 딸기처럼 분홍빛인 머리칼을 산호로 빗고 있던 인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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