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산테에게 당신이 기억을 얼추 되찾았다고 온 마탑에 알리라고 했어요.”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까?”
“왜 거짓말이죠? 얼추 되찾은 건 사실이잖아요. 본명도 알고, 원래 신분이 뭐였는지도 아는데.”
태연히 대꾸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오필리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거짓말 따위가 대수가 될 수는 없다.
“마탑의 사람들이 얼마나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한둘쯤은 있겠죠. 확인하고 싶어 할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들을 혼란시켜서, 날 찾아오게 하려는 셈입니까.”
“맞아요. 그럼 그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기억을, 나는 마탑의 위치를 알아내면 되는 거예요.”
알레이는 그제야 오필리아가 산테의 깃털을 준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이렌의 수장만큼이나 마탑주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알레이의 생각을 알기라도 했는지, 오필리아의 손끝이 조금 전 그녀가 건넨 깃펜을 향했다.
“여차할 땐 산테를 불러요. 날 불러도 되지만 산테가 빠를 거예요.”
“……분명 들통날 겁니다. 이런 조악한 거짓말로는.”
“알레이.”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두어 발짝 떨어져 있던 오필리아가 가까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품에 닿을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벽안에 비친 멍청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당신이 거짓말에 능숙지 못한 것을 알아요. 들통나도 상관없으니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오필리아의 손이 깃펜을 든 알레이의 손을 감쌌다.
그 서늘한 온기가 잡은 것은 손뿐이었는데, 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인지.
그녀의 벽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알레이는 다만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건 내 거짓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을 속이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를 옭아맨 목소리는 여전했다.
“알레이, 나는 마탑으로 가지 못하면 최악과 차악 중에 골라야 해요.”
최악과 차악. 오필리아는 일부러 듣기 나쁜 단어들을 골랐다.
알레이는 이 단어들이 무슨 선택지를 의미하는지 결코 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떨어지는 오필리아를 이미 한 번 정원에서 받아 낸 적이 있었으므로.
그녀를 피한 금빛 눈동자가 갈등에 젖은 것이 보였다. 평소에도 종종 수려하다 여겼던 낯은 괴로워 보였다.
그렇겠지. 이런 일은 별로 내키지 않을 테니.
하지만 오필리아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들이 대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절박하지 않고, 그녀는 절박했다.
오필리아는 그 차이를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도덕이 내 생존에 우선하나요?”
“……알겠습니다.”
결국 알레이는 백기를 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덕분이었다.
“일단 그들이 온다는 전제하에 연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들이 올 거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마탑에서 사람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얕은 생각이 훤히 보여서,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분명 올 거예요.”
내 심부름꾼은 더 재미있는 상황을 원하니까.
분명 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해 줄 것이다.
* * *
“……그래서, 알레한드로가 기억을 얼추 되찾은 것 같다는 얘기다.”
원탁에 올린 손을 까딱이며, 산테가 말을 맺었다.
그의 입술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금방이었다.
산테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마탑의 원탁 회의실이었다.
마탑의 고위 직급들이 사용하는 회의실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둘의 차이는 모양으로 나뉜다.
사각과 원형.
사각의 길쭉한 테이블은 상석이 존재하고, 원형은 그렇지 않으니까.
마탑의 주인이 있는 회의는 사각 테이블이 있는 회의실을 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원탁 회의실을 쓰는 것이다.
산테의 시선이 술렁거리기 시작한 좌중을 훑었다.
“말도 안 돼. 마탑은 아무 말도 없었어.”
“왜? 그분이시라면 귀환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했잖나.”
“그건 그렇지만, 마탑은 가장 빨라야 5년이랬는데.”
“이제 5년 거의 다 되어가지 않나? 누구 날짜 아는 사람?”
“이럴 때 마탑이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수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영 믿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내젓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산테가 가지고 있던 신용 덕분이기도 했고, 알레이가 그들에게 여태 보여 주었던 마법 실력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산테가 상황을 의뭉스럽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산테, 당신이 본 게 정말 맞습니까?”
“그래. 디안이 어린 세이렌들을 불러서 날 데려오라 했다고. 그래서 내가 깃털도 줬다니까.”
“그럼 대체 왜 마탑으로 직접 오지 않으시는 거지?”
“그걸 모르니까 얼추 되찾은 게 아닐까 하는 거지. 내 몫은 전달까지였으니 그만 물어라.”
산테가 딱 잘라 말하자, 마법사들은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기억을 되찾았으면 응당 마탑으로 뽀르르 돌아와야 할 텐데, 어째서 번거로운 방법으로 산테나 부르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오필리아가 의도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 암컷, 통찰력이 있다니까.’
산테는 혼란스러워진 회의실을 배부른 눈으로 바라보며 낮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알레이는 알 턱이 없겠지만, 사실 산테 역시 같은 질문을 했었다.
감히 마탑 전체를 속이겠다는 발상이 가소로워서.
-다 좋아. 다 좋은데, 내가 알리고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말을 모호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뭔가 이상이 생긴 걸까, 의아하게.
-난 말솜씨가 좋지 못한데. 내 말에 속아 주지 않으면?
물론 말솜씨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거짓말이다. 오필리아 역시 그를 아는지,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뻔뻔하기로는 산테를 이길 수 있는 자가 몇 없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결국 으쓱했다.
-그땐 당신이 노래라도 불러서 홀려 보는 게 좋겠네요.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물론, 산테가 노래를 할 일은 없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다면 이 회의실의 사람들뿐 아니라 한 층을 전부 홀려 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했던 것도 있고.
산테가 노래 없이도 훌륭한 바람잡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짝, 짝. 산테가 두 번 박수를 쳐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자, 자. 뭘 그렇게 떠드나. 난 오늘 둥지를 오래 비워서 이만 돌아가 봐야 하니, 빠르게 마무리를 짓자고.”
그의 말에 회색 머리칼을 가진 마법사가 인상을 썼다.
“급하면 당신은 먼저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분에 대한 건 우리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
“아니, 나도 디안에게 말을 전해야 하지 않겠나? 기껏 소식을 전해 줬더니 중요한 사안에서는 날 쏙 빼놓으면 섭하지.”
안 그런가? 하고 되물은 산테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 마법사들은 다들 뭐라도 한마디 반박하고 싶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산테가 얼마나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주인이 없는 지금, 산테와 말을 쉽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마탑에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나오면 통제할 수 있는 이가 없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산테는 모두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상황에 활짝 웃었다.
“좋아, 반대 의견은 없는 듯하군. 다들 혼란해 보이니 내가 도움을 주지. 이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라.”
원탁에 둘러앉은 마법사들은 목숨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좋아, 다들 이렇게 고분고분하니 참 좋군. 그럼 내가 발언하지. 사실일지 아닐지 탁상공론은 그만두고, 직접 가 보는 게 어때?”
“아까부터 제가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원탁 끄트머리에서 밀빛 그림자가 불쑥 튀어 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밀빛 머리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 소리쳤다.
“마탑의 주인께서 곧 돌아오신다는데, 가서 상황을 보고 맞아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저 수컷 참 열정적인데. 이름이?”
“코르넬리 듀랑입니다!”
“코르넬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산테는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는 왠지 익숙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 때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