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호명에 그가 오필리아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 고지식해 보이는 낯에 대고 오필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미리 말해 두려고요. 내겐 당신이 제일 중요해요. 당신이 기억을 찾아도, 찾지 못해도.”
“……갑자기. 말입니까?”
알레이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단순한 당황이라기보다는, 민망함을 애써 감추는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오필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 말에 저런 표정을 짓는 이상, 그는 계속 제게 친절할 테니.
여전히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묻어 두기로 했다.
* * *
나가는 길은 제법 험준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단순했다.
오필리아도 이제 순간 이동을 통해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있는 배경은 귀빈실로 바뀌었다.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니.
“새삼 놀랍네요.”
“마법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오필리아의 칭찬에도, 알레이는 덤덤했다.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놀랍지만, 알레이에게는 바람이 불고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테니.
“릴리스한테 들키면 한 소리 들을 각오는 했는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거 말인데. 릴리스 그 여자는 매번 그런 식으로 당신에게 주제넘게 구는 겁니까?”
“신경이 쓰이나요?”
“그래 보입니까?”
좀 떠볼까 싶었더니 질문이 돌아왔다.
오필리아는 시니컬한 알레이의 낯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틀었다.
“아니면 말고요.”
“신경 쓰는 것 맞습니다. 저야 내킬 것도 없고 기억하는 것도 없으니 예의 없이 군다지만 그 여자는 귀족 아닙니까? 먼지 한 톨 안 나올 리가 없는데 황족을 우습게 여기는 게 신기해서요.”
“예의 없게 구는 건 알고 있었나보군요.”
“무례를 받아 줄 줄 몰랐다는 것도 변명으로 쳐 주시렵니까?”
“고려해 보죠. 그리고 릴리스는 황족을 우습게 여기기보다는, 나를 황족으로 안 보니 우스워 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유형은 괜히 기를 꺾어 두면 나중에 더 크게 난리를 치기 마련이니.
“아예 어디론가 보내 버릴 게 아니라면 적당히 두는 게 나아요.”
“이해했습니다. 그 여자 안목이 없는 모양입니다. 차라리 독수리를 두고 참새라고 하는 게 낫겠던데.”
알레이의 말에 픽 웃은 오필리아가 테이블로 걸어가며 질문했다.
“그보다 알레이,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보십시오.”
“한 번에 얼마나 멀리까지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나요? 나라를 이동하는 것은 좀 무리겠죠?”
“마법식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다만 거리가 벌어진 만큼 식이 더 복잡하고 거대해집니다.”
“얼마나 커지는데요?”
“그려 놓으면 건물 하나 정도 면적은 될 겁니다.”
“생각보다 크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오필리아는 대화를 잠시 곱씹었다가, 되물었다.
“당신이 마법진을 그리는 것도 가능한가요?”
“그 장소를 내가 알고 있다면.”
그리고 긍정이 돌아왔다. 오필리아의 낯빛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좋아요. 그만하면 되겠네요.”
세이렌이니 마탑에 대한 것들을 잊었기에 마법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부분들이 있을까 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지.
테이블을 죽 훑은 오필리아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가 집어 든 것은 심을 갈아 끼운 깃펜이었다.
오필리아에게서 깃펜을 넘겨받은 알레이가 한 박자 늦게,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날, 시험한 겁니까?”
“맞아요. 지금 당신이 얼마나 기억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전부 아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입니다?”
“내가 아는 건 단편적이에요. 지금 당신의 상태 같은 건 알 수 없으니까요.”
오필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시인했다.
그런데 그 말이 왜 묘하게 자신을 찌르는지.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것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요.”
“후자겠죠. 당신도 시험받는 건 썩 기분 좋지 않을 테니.”
동상이몽이었다. 알레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오필리아는, 금세 깃펜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내가 깃펜을 준 이유는 알겠어요?”
“세이렌의 깃털을 끼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깃털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알레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산테의 깃털이군요.”
“잘 알아보네요.”
“처음 보는 마력이었으니까.”
그 어린 세이렌들의 것이 아니라면 답은 간단하다.
산테의 깃털이라.
알레이는 다시 심기가 나빠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세이렌의 깃털이라면 내게도 몇 개 있는데, 굳이 이걸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오해는 풀렸다고 해도, 오늘 내내 느꼈던 그 불쾌함이 완전히 지워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산테가 싫은가.’
그러나 알레이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오필리아는 눈치가 좋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필리아가 눈치가 유난히 좋았다기보다는, 알레이의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생에도 그렇게까지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긴 했지.’
그렇게까지 공손하진 않아도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예의를 갖추는 알레이였지만, 산테에게만큼은 달랐으니까.
하대도 하대고, 이놈이니 저놈이니 하지 않았던가.
‘성가셔하는 기색이 역력했었지.’
그런 싫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불쾌함을 단순한 성가심으로 치부하고, 대답했다.
“물론 필요해요. 당신은 이제부터 기억을 되찾은 연기를 해야 하니까.”
“당신은 영문 모를 소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알레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갑자기 산테의 깃털을 주면서 기억을 되찾은 연기라니.
그러나 오필리아는 그런 알레이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아까 말했죠. 내겐 시간이 많이 없고, 그 안에 당신이 기억을 찾을 가능성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고.”
“그랬습니다만.”
“당신이 기억을 찾지 못할 경우, 지금 상황으로서는 내가 마탑으로 갈 방법이 없어요.”
“산테가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부탁하면,”
“내가 왜 시도해 보지 않았겠어요?”
오필리아가 쓰게 말했다.
산테의 반지를 풀어 주기 전, 오필리아는 산테에게 자신을 마탑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 아니면 하다못해 마탑의 위치라도 알려 줄 수 있는지 떠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오필리아. 네가 뭘 원하는지는 얼추 알겠지만, 난 그에 도움을 줄 수 없어. 마탑에 대한 불문율은 그 주인 정도가 아니면 어길 수 없다.
-정말 조금의 허용도 없는 건가요?
-마법이니까. 허가되지 않은 내용을 뱉으려 하면 말이 나오지 않아.
산테는 마탑과 관련되지 않은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도, 마탑의 위치 등을 발설하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마탑으로 들어가는 건 알레이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단 얘긴가요?
-아니,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야. 마탑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니까.
하나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경우. 마탑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경우에 속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마탑의 위치를 기어코 알아낸 경우. 마탑의 위치를 아는 이들에게는 불문율이 적용되지 않거든.
-요컨대 마탑의 위치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정보라는 거군요.
오필리아의 말에, 산테는 웃기만 했다.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마탑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정보에 마법으로 금제를 걸어 두었다고 하더군요. 마탑의 위치를 모르는 외부인을 들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요.”
“그러면 나를 통해서 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금제가 걸린 주인이면 그게 주인이겠어요?”
오필리아가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겼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머리칼들이 파도가 되어 흔들렸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손이 지난 자리에는 명명한 벽안만이 남고.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는 거지, 문제는 없어요. 내가 마탑으로 갈 수 없다면, 마탑을 이리로 부르면 되니까.”
알레이는 청염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