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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20화 (20/118)

제20화

“산테는 어린 세이렌들과 달라서 쉽게 호의를 얻을 수 없어요. 어느 정도는 그의 요구에 응해 줄 필요가 있었어요. 내 목적 정도는 그렇게 비밀스러운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알레이에게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산테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한 것인지.

다만 이런 것들은 내뱉기에는 다소 용기가 필요했다. 알레이는 한참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 역시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겁니까?”

“그럴 필요가 있었죠.”

“대체, 왜.”

“알레이. 난 당신을 신뢰하지 않아요.”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온 오필리아의 대답에, 알레이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오필리아에게서 직접 들으면 분명 덤덤했을 거라던 과거의 판단은 심히 잘못되어 있었다.

알고 들어도 아렸다. 알레이는 말문이 막혀 그저 오필리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때문에, 대화를 이은 것은 오필리아였다.

그녀는 넘실대는 검은 물을 보며 말했다.

“산테에게도 이 정도만 말해 줬지만, 당신에게는 좀 더 자세히 알려 줄게요.”

“……나에 대한 불신에, 사족이 붙습니까?”

“왜 아니어야 하죠? 모두가 모든 속내를 공개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오필리아가 시선을 도로 알레이에게 돌렸다. 그 새파란 시선이 당신도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반박할 수 없어 알레이는 눈썹 끝을 떨어트린 채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대답이 없을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던지.

도로 고개를 돌린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잠자코 이어졌다.

“난 당신이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아요.”

그렇게 알레이가 들은 것은 제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오필리아의 속마음이었다.

오필리아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알레이는 그런 오필리아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야는 거기서부터 차이가 났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왜 몰랐을까 의아할 정도다.

오필리아가 제 기억이랍시고 가져다주는 것들은 전부 마탑과 연관이 있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아요. 그러니 나는 당신의 기억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어요. 당신의 기억 없이도 마탑으로 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 방법이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내 바다를 향해 있던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안 되겠느냐면서.

“당신이 어제 바다를 잠재웠죠. 기억해요?”

“그랬습니다.”

“해류의 흐름을 바꿨잖아요. 이렇게 안쪽으로 꼬이던 걸, 바깥쪽으로 풀어서.”

오필리아가 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것은 정확히 알레이가 어제 격랑이 이는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쓴 방법이었다.

“……제가 그걸 설명해 드렸었습니까?”

“염력으로 누른 게 아니라면 이것밖에 없죠. 원리는 이미 알고.”

오필리아는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해류가 일부분의 흐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해류를 건드리면, 다른 곳까지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다른 곳에서 해류가 꼬일 수도 있다는 거고.”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겁니다. 기껏해야 사흘이나 영향이 있을 텐데.”

알레이의 항변에, 오필리아가 건조하게 웃었다.

“사흘이면 충분하죠.”

배 하나 난파하기에는 더없이.

* * *

배가 난파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고, 배에 탄 사람이 조난당하는 것은 그보다 더 흔한 일이다.

하지만 드물게도 오필리아는 이안의 조난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영원히 비밀을 지켰더라면, 아마도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오필리아 혼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알레이가 해류를 이용해 바다를 잠재웠다는 것은 오로지 오필리아와 알레이 둘만 아는 내용이었고, 알레이는 그것이 다른 해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오필리아가 그것을 알게 된 건 로넨에서였다.

로넨은 해양 무역으로 성장한 만큼 다양한 조선 기술과 건축 등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토록 정교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도개교는 로넨이 아닌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거라고 오필리아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런 국가적 배경 때문에 로넨의 고위 인사들은 어느 정도의 해양 관련 지식을 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오필리아가 로넨의 사교계에 끼기 위해서 그런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굳이 그들이 어려운 이야기로 오필리아를 따돌리지 않더라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해양 관련 단어들에는 적응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오필리아는 대화에 끼기 위해, 열심히 넓고 얕은 지식을 쌓았다. 해류의 방향, 일기를 읽는 법을 배우고 배의 종류를 익혔다.

그렇게 교양을 쌓던 중, 항로에 대한 책을 폈다가 오필리아는 우연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안이 밀레세트에서 로넨으로 돌아가기 위해 탄 항로는 해류의 방해가 거의 없어 사고가 전무하다시피 한 항로라는 것이다.

물론,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개중에는 일국의 군주가 타고 가는 거대한 범선을 씹어 먹을 만한 사고가 없었을 뿐이다.

적어도, 항로 중간에서 갑작스러운 해류의 충돌이라도 발생하지 않는 한은.

지식이 있으니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자면 예언자 흉내를 내야 하리라.

오필리아는 지평선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은 내 말이 이해가 가기 힘들겠지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예요.”

“……산테에게도 이 얘기를 했습니까?”

“한 적 없어요.”

오필리아가 재깍 대답하자, 알레이는 그제야 안정을 찾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됐습니다. 말마따나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캐묻지 않겠습니다.”

산테에게도 해 주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굳이 욕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캐묻는다고 해서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잘 느껴지기도 했고.

알레이가 묻고 싶은 게 따로 있기도 했다.

“방금 한 얘기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을 테니, 다른 것에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뭐죠?”

“산테가 도왔다는 것이 뭡니까.”

“아.”

오필리아가 다소 떫은 표정을 했다. 처음 알레이가 물었을 때도 저 표정이었다. 뒷맛이 좋지 않은 식사를 떠올리는 것 같은 표정.

다른 문제였더라면 이것 역시 캐묻지 않았겠지만, 알레이는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산테한테 얻어맞은 하이다르와, 오필리아가 말하는 그 도움이라는 것을 연결 짓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이다르가 내게 위협을 가했어요.”

그러나 진상은 대개 최악을 꿰뚫는 법이다.

“파티에 초대했는데 거절했거든요. 날 데려가서 비웃음거리로 삼으려는 게 뻔히 보여서…… 거절했는데 자존심이 꽤 상했던 모양이에요.”

“……그랬습니까.”

“미리 말하는데 난 괜찮아요. 그런 사람은 자주 만나니까.”

“그래 보입니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두 뺨이 아주 볼만 했겠습니다.”

“아, 카델리아.”

오필리아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궁에서 떠나기 전에도 카델리아에게 뺨을 맞을 뻔했지.

뒤늦은 깨달음에 눈을 깜빡이는데, 다시 턱 밑에 손이 닿았다. 가벼운 힘에 고개가 돌아가고, 시선이 맞닿았다.

명명한 금안이 조금 전보다 가까웠다. 오필리아는 그 눈에 비친 자신마저도 볼 수 있었다.

뺨을 살피려 고개를 기울이며, 알레이가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닙니다만, 지켜 드린 보람이 없습니다.”

“그건 타박인가요?”

“그런 셈 치죠.”

말을 마친 알레이가 뺨 위로 후, 가볍게 숨을 불었다. 숨결이 스치고 간 뺨의 솜털이 오소소 솟았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뺨에 내내 머물러 있던 욱신거림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붓기는 가라앉았어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욱신거리니 꽤 거슬렸는데, 없어지니 한결 편안하다.

제 뺨을 만져 보던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군요. 고마워요.”

“별일 아닙니다.”

건조한 대답에도, 오필리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알레이가 제 말을 듣고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게 불과 조금 전인데, 막상 그가 제게 베푸는 친절을 받고 있으려니 이것이 사라지면 꽤 서운하겠다 싶어서.

돌이켜 보자면 사실 알레이는 생김이 딱딱해서 그렇지 꽤 다정한 편이었다.

과거에도 그의 무심한 다정에 꽤 자주 기댔던 기억이 난다.

‘그가 정말로 나를 친구로 여겼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레이의 말마따나 하루가 멀다 하고 제 뺨이 남아나질 않는 곳에서 이 친절이 단비 같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은 그가 제 말을 듣고도 멀어지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오필리아는 그 생각을 잠시 곱씹었다가, 그를 불렀다.

“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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