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산테가 유리창을 깨고 난입했거든요. 그 바람에 하이다르가 유리도 맞고 산테도 맞아서 벽에 처박혔어요.”
오필리아의 어조가 워낙 평이해서, 알레이는 잠깐 자신이 들은 것이 “하이다르가 자두 잼 파이를 모조리 먹어 치웠어요”는 아니었을지 의심해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해도 그의 귀는 언제나 멀쩡했다.
“……어쩐지 떨어진 샹들리에를 맞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유리창은 복구할 수 있었는데, 하이다르는 어떻게 못 하겠더라고요. 그게 최선이었어요.”
“어차피 대부분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알레이의 말에, 오필리아는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의원이 아닌 알레이조차 알아보는데, 의원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다만, 하이다르가 정신을 잃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라딘 성의 최고 권위자는 황녀이자, 황실의 감찰관인 오필리아였다.
이 시골 사람들은 황제가 두 발로 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줄 아는 이들이다.
그러니 황녀가 “샹들리에가 떨어졌다.”라고 했는데, 이곳의 그 누가 그에 반박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귀족이라면 일단 엎드리고 보는 이곳의 사용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하이다르가 날 눈엣가시로 여길 만도 하지.’
오필리아는 저녁 식사 이후 병동을 찾아갔던 것을 떠올렸다.
하이다르는 용케 죽지 않았다. 하녀장의 말로는 마법사가 유리 조각을 전부 빼 주었다고 했다.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유리 조각이라도 뺄 수 있는 게 어디에요. 이렇게 많은 건 의원도 어렵다고 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가문이 대대로 라딘 가문에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한 하녀장은, 자신의 주인이 죽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기도를 몇 번이나 올리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그 은혜로우신 주인이 그녀의 뺨을 쳤기 때문에 이 몰골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녀장이 과연 그렇게 굴까 문득 궁금해졌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도덕이 애정을 이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애정은 단 한 순간을 제외하면 온 생을 통틀어 그녀의 곁에 머물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기대하는 것이 우습다.
오필리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끊긴 대화를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오필리아.”
그리고, 알레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턱에 손이 닿았다.
손끝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턱을 받치고, 엄지가 뺨을 쓸었다.
그의 태도가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민들레 홀씨를 쓰다듬어도 그것보다는 거칠었을 것이다.
“어두워 미처 보지 못했는데…….”
아, 거친 것이 있긴 하구나. 오필리아는 조금 전 내렸던 평가를 정정했다.
마주친 시선이 거칠었다. 표정이 거칠었다.
“뺨이 부었습니다.”
목소리가 거칠다.
다른 사람이 들었더라면 화가 난 줄 알았겠다.
오필리아는 잠시 알레이와 시선을 맞댔다, 천천히 내렸다.
느리게 내려가는 눈꺼풀의 잔떨림이 고스란히 그의 시선에 담겼을 터다.
그런 지척에서도 오필리아는 태연히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잘못 본 거겠죠.”
라딘 성의 그 누구도, 하물며 병동의 사람들조차 오필리아가 뺨을 맞았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근소한 차이라면, 거짓말로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혹 산테가 당신께도 피해를 입혔습니까?”
그러나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생각보다 강경했다.
억눌린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그래서 거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자를 감싸기 위해?”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산테는 나를 도와줬어요.”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었기에…….”
알레이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차마 뱉지 못한 말이 아프게 목을 찔렀다.
분명 제 눈에 부은 것이 뻔히 보이는데 당당히 거짓말을 하는 이유라고는 산테밖에 생각할 수 없다.
불쑥 치받는 말들이 생각보다 많다. 알레이는 고르고 골라 한 문장을 내뱉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었기에.
“……당신이 그를 신뢰하는 겁니까.”
고르고 고른 것이 그 꼴이었다.
* * *
알레이의 말을 듣고,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다, 들었군요.”
이제 와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알레이가 유독 보이지 않던 시점부터, 아니, 그보다 더 전. 문을 열었을 때부터 오필리아는 알레이가 문 너머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으니까.
하지만 알레이가 함구한다면 오필리아는 굳이 그 사실을 들출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들었을 알레이에게는 다소 미안하지만, 그 이후의 선택은 오로지 알레이의 몫이었으니까. 그녀는 거기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사과할 생각도.
그래서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 피해 왔던 걸 생각하면 엿들었다는 걸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건 제가 엿들었습니다, 라고 실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의문한 순간 알레이가 실토했다.
“들었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파란 밤이 내려앉은 알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응당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그에게서는 언제고 그런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에게 공격성이 없는 탓이 아니다.
그의 공격성이 스스로를 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찌른 남자가 변명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성에 갔다 돌아왔는데, 당신 방의 샹들리에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주가 크게 다쳤다고. 그래서 당신이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당신 방으로 갔는데.”
“내가 산테와 대화하고 있었군요.”
그는 지금 자신이 그래서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알까. 사흘 굶은 걸인의 식사도 저렇게 대중없진 않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제 낯에 닿은 손을 잡았다. 그 위에 뺨을 기댔다. 말마따나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부기 때문에 조금 따끔거렸지만, 오필리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이 내색하면 제 앞의 남자가 이번에는 또 무슨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할지 채 짐작도 가지 않아서.
알레이와 눈을 맞추고 나서야 오필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질책할 생각 없으니 진정해요. 당신이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들었을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고.”
“……죄송합니다.”
“우연에 사과할 필요는 없죠. 그보다, 어디서부터 들었나요?”
“당신이 나를 알레한드로라고 부르며 내가 마탑에서 기억을 잃고 쫓겨났다는 얘기를 했을 즈음.”
거의 처음부터잖아.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다.
알레이가 엿들은 내용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산테에게 놀아난 셈이군.’
자신이 새카맣게 모르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산테는 분명 처음부터 알레이가 온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별수 있나. 조심하지 않은 제 잘못이다.
오필리아는 고개를 들고 알레이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지 이제 알겠네요. 우선, 난 산테를 신뢰하지 않아요. 대체 왜 그런 발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알레이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자신에게는 해 주지 않는 얘기를 해 주었으니 그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기에는 다소 염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눈치가 좋았다.
“……내가 산테에게 그 얘기를 해준 건 그를 신뢰한다기보다는, 그때는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에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산테가 협력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알레이에게는 기억이라는 아주 훌륭한 협상 거리가 있지만, 산테에게는 내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오랜 친구인 알레이를 데리고 왔다는 정도가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용이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반지를 끼우는 데 성공했지만.’
다음에도 반지를 끼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협상할 만한 것이 없다면, 그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호기심.
다행히 이것은 오필리아가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주제에 기억을 잃은 마탑주를 데리고 있고, 마탑으로 가려 하며, 심지어는 세이렌들 수장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여자.
이런 흥미로운 대상을 산테가 또 언제 만나 보겠는가.
그래서 오필리아는 반지를 껴서 무력해진 산테를 앞에 놓고 미리 못을 박았다.
자신이 어떻게 이런 기밀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지는 대답해 주지 않겠다고.
가장 호기심을 느낄 질문들의 가치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야 산테가 쉽게 호기심을 잃지 않을 테고, 훗날 훌륭한 협상 소재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방법은 아주 잘 먹혀들어서, 오필리아는 부러진 깃펜의 심을 산테의 것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