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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8화 (18/118)

제18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원래는 자신과 약속 시간에 함께 만나려 했으나, 일이 틀어져 이른 만남을 가지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세이렌의 수장이 자신을 알 거라던 오필리아의 말은 맞았다.

산테는 자신을 디안이라고 불렀고, 어조에서는 친밀함이 느껴졌다.

자꾸 자신을 디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이상해져, 알레이는 그 이름을 한 번 곱씹어 보았다.

산테.

익숙지 못해 떫었다.

그러나 알레이가 걸음을 멈춘 것이 비단 그가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마탑으로 갈 거예요.”

방 너머에서 들려왔던 오필리아의 속마음. 그가 차마 묻지 못했던 오필리아의 사정.

“그럼 이 사실을 디안도 알고 있나?”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왜?”

“아직 그를 신뢰하기는 힘드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추었다. 신뢰받지 못한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랬을까.

그러나 그 말에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혀가 눌리기라도 한 기분이다.

줄곧 고요했던 수면에 파란이 일었다.

오필리아가 제 기억을 찾는 데 그렇게 열심인 이유가 자신을 이용해 마탑으로 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을 때조차 잠잠했는데.

제 기억을 찾아 주겠다면서, 본명과 예전의 신분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알레이에게는 감상에 젖어 있을 틈이 없었다.

안에서 들려온 산테의 목소리가 그를 낚아채 올렸다.

“내가 만약 디안이었다면, 그 말을 듣고 꽤 속이 상했을걸.”

조금 전보다 한결 커지고, 뚜렷해진 목소리.

직감할 수 있었다. 들켰구나.

잠깐의 정적 이후,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의 의자였을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레이는 그 즉시 도망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 무작정 생각나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눈을 떠 보니 넘실대는 파란 물이 보였다.

어젯밤 오필리아와 함께 왔던 해변.

그녀에게서 도망쳐 다시 그녀 앞으로 간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렇게 다시 지금.

알레이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파랬던 물이 잉크를 부은 것처럼 검게 변한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필리아에게서 도망친 이후, 알레이는 내내 오필리아를 피해 다녔다.

그는 내내 꿈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오전이 차라리 더 나았다고 할 만한 상태였으므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레이는 암초에 앉아 파도가 소란하게 해안선을 삼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녁 내내 오필리아를 피해 다니다, 결국 라딘 성의 소등 시간이 되고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자 해변으로 나온 참이었다.

사실, 방 안의 대화를 듣고 나서 이성은 제자리를 되찾았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어째서 오필리아가 그렇게 제 기억을 되찾아 주고 싶어 했는지.

그녀가 그렇게 함으로써 제게 얻어 내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마탑주 알레한드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정보는 충분히 전달해 줄 수 있었겠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필리아가 순전히 제 이득을 위해 알레이의 이름 등을 함구하고, 그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은.

오필리아는 그저 그녀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게 화를 낼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위의 모든 상황을 제치고 제 속을 뒤집어 놓을 만한 일이었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알레이는 논지를 다시 맞추었다.

오필리아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에 부아가 치민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예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알레이는 그녀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이 뭐라고.

그간 자신이 믿음직한 개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토록 부아를 돋울 수 있겠나.

‘그건 아니다.’

알레이는 논지를 조정했다.

자신이 여태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에서 청승을 떠는 건 오필리아에게 신뢰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속이 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필리아의 입으로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아요.” 같은 말을 들었다면.

아마 그저 그렇구나, 거리감을 느꼈으리라.

생각이 그에 닿자 알레이는 수많은 명제 위에 가려진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왜 그렇게 속이 상했던지.

그건 오필리아의 대화 상대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가 산테를 신뢰한다는 것이 싫은 것이다.

자신에게는 결코 보여 주지 않을 신뢰의 눈빛으로 산테를 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자신은 그녀의 호의 어린 시선에도 쉽게 인상을 찡그리고 마는데…….

“알레이, 여기 있었군요.”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필리아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낮이 아니라 눈이 부실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찡그림에 대한 핑계를 찾을 길이 없어서.

모래 붙은 벽을 쓸다 상처가 났다. 벽을 탓할 수가 없어 설웠다.

* * *

오필리아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낸 걸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피한다는 것을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그 전, 방 앞에서부터 들켰을지도.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알레이는 다가오는 오필리아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많이 늦었나?’

그래서,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표정을 보고 문득 의문했다.

그녀가 해변에 나온 까닭은 별것 없었다. 어젯밤 세이렌들과 한 약속 때문에.

그러나 산테를 이미 만났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나올 일이 없었어야 옳았겠지만, 오필리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처음 그녀는 알레이를 찾아 말을 해 주려 했다.

자신이 부득이하게 산테를 불러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래서 약속을 옮기기로 했다고.

그래서 산테와 헤어진 이후 이른 저녁부터 내내 알레이를 찾았지만, 도저히 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여기가 타지가 아니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을 수라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의 사용인들은 오필리아도 알레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분명 찾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혹 방문 너머에 정말로 알레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혼자 하는 의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결국 오필리아는 찾는 것을 포기하고 약속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해변으로 나가 알레이를 데려오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다만, 몰래 나오는 길이 조금 험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필리아에게는 릴리스라는 거머리같은 감시자가 붙어 있었으니까.

-영주님이 전하의 방에서 사고를 당하셨다니, 대체 전하께 무슨 볼일이 있었기에 방까지 찾아오는 거죠?

-방이 아니라 집무실이었고, 환영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하던데.

-정말 그 이유뿐인가요?

릴리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오필리아를 불순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황실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행위는 폐하께서 용납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보면 바로 말씀드릴 거고요.

아마 대놓고 묻지는 못해도, 남자를 끌어들이려 한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갖는 모양새였다.

황실의 사생아였던 탓에, 오필리아는 저런 시선에 익숙했다.

분명 오필리아 역시 교육은 황실이 준수하는 기준대로 받았음이 분명한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기이하리만치 오필리아에게만 비도덕을 예상하는 눈길들이 쏟아지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것에 상처 받을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꼭 부황께 말씀드리렴. 그분이 황실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행위에 가장 먼저 가담하셨으니까.

황녀가 침실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게 비도덕이라면, 침실에 시녀를 끌어들인 황제도 비도덕이지.

그런 대화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할 때는 잘하던 일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오필리아는 평소 잘 지나던 길에서 몇 번이나 휘청였고, 그럴수록 시간은 지체되었다.

그런데 와 보니, 알레이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단순히 인상을 쓰는 건가 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속이 제대로 상한 얼굴이다.

비 맞은 강아지가 저것보다는 안락해 보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많이 늦었나요?”

오필리아는 서둘러 알레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해요. 다른 일을 하다가 깜빡 시간을 놓쳤어요.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이 있었는데.”

그런데, 알레이의 표정이 묘연했다.

마치, 우리에게 약속이 있었냐는 듯.

이번에는 오필리아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잊은 건 아니죠? 우리 여기서 어제 보기로 했잖아요. 세이렌들이랑.”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알레이의 대답에 미간을 푼 오필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여서. 내가 너무 늦었나 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정말요? 한 시간이나 늦었는데.”

“생각할 게 있어서…… 시간이 그렇게 흐른 줄도 몰랐군요.”

알레이가 여상히 대답하자, 오필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거 알아요? 약속 시간은 30분 전이에요.”

이번에는 알레이의 얼굴 위로 패색이 짙어졌다.

애초에 그는 거짓말이 능숙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을 때부터 오필리아는 그것이 상황에 끼워 맞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약속도 하얗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해변에 나와 있는 이유가 뭔지는 묻지 않을게요.”

“오필리아. 나는,”

알레이가 뭐라고 항변하려 했지만, 오필리아는 가볍게 무시하며 제 말을 이었다.

“아까 낮에 산테를 만났어요. 원래는 밤에 당신과 만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세이렌의 깃털을 부러뜨렸거든요.”

그랬더니 산테가 흥미로워 보인다고 대뜸 왔지 뭐예요.

오필리아의 설명에, 알레이가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딱 붙어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그게 샹들리에가 떨어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아, 샹들리에. 사실 샹들리에가 아니고 산테한테 얻어맞은 거예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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