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17화 (17/118)

제17화

문.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오필리아는 벌떡 일어나,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확 열었다.

“…….”

그리고,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산테를 돌아보면, 그는 그저 웃으며 으쓱할 뿐이다.

“왜 그래? 갑자기 문을 열고.”

“당신이 이 문을…….”

오필리아는 뭐라고 항의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산테는 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디안-알레이를 언급하며 문을 바라봤고, 그에 자신이 반응했을 뿐.

오필리아는 까꿍 놀이에 된통 당한 어린아이라도 된 것만 같은 심정이 되어 테이블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의 두 동강 난 깃펜만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뭐 어쨌든,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먼저 다시 입을 연 것은 산테 쪽이었다. 그는 아무리 건드려도 미동조차 없는 반지를 엄지로 툭툭 건드려 보며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내게 바라는 게 뭐지? 미리 말하는데 여러 개는 안 돼. 이 반지를 빼 주는 조건으로 응하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욕심낼 생각은 없어요. 한 가지만 해 주면 돼요.”

어차피 나중에는 전부 하게 될 테니까. 굳이 지금 제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전부 꺼낼 필요는 없다.

오필리아는 산테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그 반지를.

산테가 아무리 건드려도 미동조차 없던 반지는, 오필리아의 손이 닿자 향유라도 바른 듯 부드럽게 빠지기 시작했다.

반지를 빼내 다시 제 손에 끼운 오필리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붉은 속눈썹이 촘촘한 차양을 드리운 아래 드러난 새파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았고, 마탑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딘에 왔다고 마탑에 알려 줘요. 마탑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알 수 있도록.”

그 동공에 자리한 청염.

산테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 조악한 거짓말에 정말로 속을 거라고 생각해?”

“왜 갑자기 순진하게 굴죠?”

오필리아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산테. 혹시, 어쩌면, 만약. 이 단어들이 사람을 몇이나 넘어뜨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 그래서, 마탑에서 알레이를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리겠다고?”

“안 될 이유가 있나요?”

돌아온 반문에, 산테는 모처럼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그칠 즈음, 오필리아를 내려다보는 산테의 녹안이 뱀처럼 음험하게 빛났다.

혀 밑이 간지러운 기분. 구미가 돈다.

‘처음부터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산테는 조금 전, 방문 너머에서 느껴졌던 인기척을 떠올렸다. 당연하게도 그가 문을 쳐다봤던 것은 단순히 문의 장식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고자 함이 아니었다.

마력을 묶어 뒀어도, 세이렌의 오감은 인간보다 배는 발달해 있다.

오필리아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산테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방 앞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우뚝 멈춰 버린 한 개의 기척을.

산테는 오랜 친구의 애칭을 한 번 곱씹었다.

‘디안.’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겠다.

잠깐이라도 정신 놨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테니.

* * *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이 생소한 이름자의 남자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들은 것이 맞나 싶어서.

오후에 들은 것을 밤이 되도록 곱씹었지만, 혼란이 도저히 가시질 않는다.

오늘 오후 외근이 끝나고 공사 현장에서 라딘 성으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알레이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필리아를 만나 그를 내내 괴롭혔던 의문들을 떨쳐 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성은 이상하게 소란했다.

그가 라딘 성의 분위기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제 그들이 타고 온 마차를 맞아 주던 행렬보다도 그때의 성안이 더 소란하고 어수선했으니.

의문은 금세 풀렸다.

어제 라딘 성의 하녀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여인이 덥석 알레이를 붙잡았던 탓이다.

“마법사님! 아이고,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다른 누군가가 제 몸에 닿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터라, 알레이의 낯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 듯했다.

“혹시 치료 마법도 하시나요? 저희 영주님이 크게 다치셔서 도움이 필요한데 라딘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마법사님께서 혹시 가능하시다면…….”

“영주라면, 하이다르 라딘을 말하는 겁니까?”

“예, 예!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여자는 정말 다급해 보였다. 의원이 손을 써 보고는 있지만 최악도 가늠해야 한다고.

다른 때 같았으면 선뜻 도왔을 것이다. 아무리 알레이가 귀찮은 일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데 무시할 만큼 무심한 성격은 못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제 해변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서,

-영주가 귀찮게 구는 건 내가 황녀니까 그런 거예요. 여기 영주도 왜 내가 여기 감찰관으로 보내졌는지 알거든요.

-왜 여기 감찰관으로 보내진 겁니까?

-결혼 상대를 골라 오라는 거죠. 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난 황녀고, 아버지…… 황제는 어떻게든 나를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하니까.

고저 없는 오필리아의 어조는 듣고 있노라면 모래가 말라붙은 벽을 손끝으로 쓰는 기분이 들곤 했다.

손을 긁으며 스쳐가는 모래들처럼 거친 느낌과, 특유의 황량한 감각.

그러나 그것들이 마냥 비애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이미 단단한 벽이기 때문에.

-아마 순진한 공주님이 사랑에 빠져서 바보 같은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은 거겠죠.

그 벽을 이미 짚었다.

알레이는 내키지 않는 입을 뗐다.

“……간단한 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정말요?!”

뛸 듯이 기뻐하는 하녀장의 눈에는 거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온몸에 유리 조각이 심하게 박힌 데다 내상도 심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마법사님이 도와주신다면 한시름 덜지요.”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겁니까?”

“듣기로는 샹들리에가 떨어졌다지 뭐예요. 귀빈실을 평소에 잘 쓰지 않다 보니 관리가 소홀했나 봐요.”

“……귀빈실?”

“아까 뭔가 쾅! 하고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귀빈실이었다더라고요. 거기에 영주님이 깔리셨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귀빈실이라면, 오필리아가 있는 방이다.

그 벼락같은 사실에 발이 굳었다. 아니,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낮이라서 망정이지 밤이라 촛불이 올라가 있었으면 온 성이 불탔을 텐데…… 마법사님? 어디 가세요? 병동은 이쪽이에요!”

하녀장이 뭐라고 소리치며 자신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것을 뿌리치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라딘 성의 귀빈실 앞까지 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고풍스러운 손잡이를 보고 나서야.

지금 와 생각해 본다면 다소 의아한 일이다. 사고는 한참 전에 일어났다는데, 지금 귀빈실로 가서 무얼 한다고.

목숨이 위중한 사람이 있다는데, 왜 나는 여기에 왔지?

오필리아의 방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걱정이 돼서…….

‘오필리아만 확인하고 가자.’

영주가 그렇게 다쳤다는데 오필리아가 과연 멀쩡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걱정은 이런 사이에도 할 수 있지 않나.

오필리아가 크게 다쳐서 죽기라도 한다면 제 기억을 찾는 건 다시 요원해질 테니까.

기껏 단서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알레이는 문을 두드리려고 했고, 그때 문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레이…… 그러니까 알레한드로가 기억을 전부 잃고 쫓겨났다는 건 당신도 알 테죠.”

고저 없이 평이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레이는 도저히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들이 생소했다. 분명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 텐데.

알레한드로도, 디안도 모두 처음 듣는 낯선 이름들이었다. 저 이름들을 발음하는 오필리아의 어조 말고는 익숙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알레이는 그 이름들을 듣자마자 그것이 제 이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낯선 이름들이 익숙했다.

낯설고 익숙하다니, 무슨 이런 명제가 다 있나.

그러나 때로 이해는 무논리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기시감이 주는 시야가 있다.

반드시 머리로 알고 있어야만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필리아의 대화 상대는 낯선 목소리였다.

오필리아가 그를 산테라고 불렀다.

알레한드로나 디안보다도 낯선 이름을 어젯밤의 기억 속에서 겨우 끄집어낸 뒤에야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자신을 알 거라던 세이렌의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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