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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6화 (16/118)

제16화

어제 어린 세이렌들이 온 해역의 라펠이 빛났다느니, 자기들 입술을 순식간에 닫아 버렸다느니 해서 대단한 마법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평범한 인간 암컷이잖아?”

“평범한 인간 암컷이라서 실망했나요?”

“아니, 놀랍군. 대체 날 어떻게 안 거지?”

“지인을 통해서요.”

여상하게 대답한 오필리아가 바닥에 무언가를 내던졌다. 부러진 깃펜이었다.

어젯밤 세이렌들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 오필리아는 제 물품들의 깃털을 빼내고 그 자리에 세이렌의 깃털을 각기 채워 넣었었다.

위급할 때 쓰기에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는 편이 좋고, 몸에 지니고 있기에는 일상 용품으로 위장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리고 선견지명이 생각보다 빨리 통했다.

맞은 뺨을 더듬어 보며 제 몸 상태를 확인하는 오필리아 위로 산테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대화를 나누기보다 앞서 상대를 탐색하는 것은 산테의 습관이었다.

세이렌의 마력은 인어들의 마력만큼 탐색에 특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산테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마력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력은 주변, 혹은 사용자의 영향을 그 무엇보다도 기민하게 받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살펴본 저 인간 암컷은, 아주.

평범했다.

‘마탑 출신도 아니고.’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탑에 기거할 수는 있으니 처음에는 마탑 출신인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마탑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탑의 마력은 육지 인간들의 것보다 훨씬 더 순도 높고, 바다 냄새가 섞인 것이었는데. 눈앞의 암컷은 바다 냄새도 마력 냄새도 조금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 봐도 저 비스무리한 얼굴조차 기억나질 않으니 예전에 만난 인간조차 아닌 것 같고.

산테는 암컷과의 거리를 좁혔다. 걸음마다 피가 묻어났다.

물론 산테 본인의 것은 아니고, 그가 기절시킨 수컷의 피이리라.

원래 호출에 유리창을 늘 깨며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좀 급했다.

수컷이 당장이라도 암컷을 죽일 것처럼 잡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아주 비약은 아니었던지, 가까이에서 본 암컷의 뺨 한쪽이 부어 있었다.

산테의 검지가 부은 뺨 위에 닿았다. 아주 근소한 접촉이었으나, 따가운지 암컷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찡그리기는 했어도, 피하지는 않았다.

고분고분한 것도, 간만에 흥미를 돋우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든다.

산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다정을 가장한 세이렌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날 알게 된 경위를 별로 밝히고 싶지 않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날 부른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물론 용건이야 있죠.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요.”

세이렌의 농밀한 시선과 어울리지 않는 무던한 눈이 산테를 응시했다.

꼭 그만큼 건조한 목소리가 이름 하나를 뱉어 놓았다.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세이렌의 낯에서 미소가 걷힌 것은 순간이었다.

“알죠? 3년 전에 추방당한 마탑의 주인. 당신은 디안이라고도 부르던데.”

“너, 어떻게 그것까지…….”

“오필리아.”

그녀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내 이름은 오필리아요. 이름으로 부르세요.”

“……하. 싫다고 한다면?”

“강요는 못 하겠죠.”

그때, 손에 뭐가 닿는 느낌이 났다. 그 직후 산테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내뱉던 마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뭐가 마력을 막고 있는 것처럼.

손을 내려다보니, 처음 보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래도, 일부러 유혹하려 드는 건 그만두시고요.”

숨 막혀서 혼났네.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산테에게서 두어 발짝 물러섰다.

“자, 이제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볼까요.”

우선 이 난장판부터 치우고.

* * *

산테가 만든 아수라장을 치우기 위해, 오필리아는 가진 깃털을 모두 부러뜨려야 했다.

어린 세이렌들은 가진 마력을 탈탈 털어 유리창을 원상 복귀시키고, 정신을 잃은 하이다르를 병동으로 데려갔다.

릴리스가 도로 공사 현장에 나가 있느라 이 난리통에 참견할 겨를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탁. 하이다르를 들쳐 멘 소년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산테가 퍽 아쉽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왜 굳이 병동으로 보내는 거지? 저놈들 둥지로 저 수컷을 데려가면 아마 거죽이 다 뜯기도록 살아 있을 텐데.”

“지금은 안 돼요.”

물론, 오필리아는 완고했다.

산테의 말대로 그냥 내버려 두거나 세이렌들에게 처리를 맡기면 지금보다 훨씬 비참한 꼴을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렇게 라딘의 영주를 덜컥 죽이고 나면, 그 이후의 감당이 제법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릴리스가 가만있지 않을 테고.’

하이다르가 죽기라도 했으면 그 진상을 알아내겠다며 릴리스가 설치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 하이다르는 아직 살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산테도 ‘지금은’ 안 된다고 한 오필리아의 말뜻을 얼추 알아들었는지 두 번 캐묻지는 않았다.

기실 그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다가 세이렌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진 인간 수컷보다는 중요한 안건이 있기도 했으니까.

오필리아의 맞은편에 앉은 산테가 비뚜름하게 턱을 괴었다. 그는 마력을 봉인 당하고도 제법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그의 무료했던 일상에 가벼운 자극제라도 되어준 모양이리라.

“그럼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난 이 반지가 꽤 마음에 들지 않거든. 이야기가 끝나면 풀어 주는 거 맞지?”

오필리아는 잠시 산테의 턱을 괸 손에 끼워진-정확히는 자신이 끼운 반지에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레이…… 그러니까 알레한드로가 기억을 전부 잃고 쫓겨났다는 건 당신도 알 테죠. 산테, 그의 소재지를 알고 있나요?”

“아니. 마탑에서 쫓겨난 이후로는 보지 못했지. 그 정도 마법이면 분명 어디선가는 이름을 떨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초야에 묻히기라도 한 모양이야?”

“정확히 그 반대예요. 황궁에 들어갔지만, 기억 상실을 이유로 주목받지 못해서 말단직을 전전하고 있죠.”

“디안 그놈도 참.”

산테가 왜인지 요란하게 웃었지만, 오필리아는 개의치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난 그의 기억에 걸린 봉인을 최대한 빨리 풀 방법이 필요해요. 그래서 최대한 그를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고요.”

“다만 마탑에서 쫓겨난 지도 꽤 됐고, 마탑 출신인 마법사들은 극히 드무니 차라리 인외인 나를 찾아왔다는 거겠군.”

산테의 명료한 정리에, 오필리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원래는 알레이와 함께 찾아가려고 했어요. 그편이 말하기는 훨씬 수월할 테니까.”

“온 해역을 빛낼 수 있는 마법사가 디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했는데. 결국 디안 놈인 거지. 알아들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묻자.”

“뭐죠? 아까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한 질문은 안 돼요.”

대화를 시작하기 전, 오필리아는 미리 쐐기를 박았다.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이런 특수한 정보들을 얻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라고. 묻는다고 해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산테는 으쓱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안 된다고 한 걸 내가 왜 굳이 또 물어보겠냐.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왜 디안의 기억을 오필리아 네가 찾아 주고 싶어 하는 건지.”

산테의 질문은 분명 그녀가 안 된다고 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여태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입 밖으로 그녀의 소망을 발음해 보았다.

“난 마탑으로 갈 거예요.”

마탑으로 갈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니 한결 더 선명해졌다.

무형의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 소망 역시 발음할 때 가장 부피가 커지는 법이다. 내내 오필리아의 안에서 맴돌기만 하던 소망이 음성으로 굳어질 때의 감각은 제법 새로웠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필리아의 관점에서의 이야기였다.

산테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 오필리아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반지가 끼워진 검지로 책상을 툭툭 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탑의 주인을 잡은 거군? 기억을 되찾아 주고 그를 이용해서 마탑으로 가려고.”

“그렇죠.”

“그럼 이 사실을 디안도 알고 있나?”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왜?”

“아직 그를 신뢰하기는 힘드니까요.”

산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난처한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한…….

흐음, 무슨 생각에선지 가는 소리를 흘린 산테가 고개를 기울이며 느슨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만약 디안이었다면, 그 말을 듣고 꽤 속이 상했을걸.”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문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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