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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5화 (15/118)

제15화

오필리아는 패색이 짙은 하이다르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하이다르는 다소 다혈질인 면이 있으니 이쯤에서 압박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더 초대장을 들이밀 것 같지도 않고.

하이다르 또한 최소한의 이성이라는 게 있을 테니 제 앞에서 그 욱하는 성질머리를 그대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 무례는 눈감아 줄 테니, 다음부터는 조심,”

“사생아 주제에, 이젠 로넨의 대공 정도가 아니면 어울리기 싫은가 보지?”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이 모양이다.

오필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또 그만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군.

하이다르가 어떻게 이안과의 소문을 알게 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리 소문이 빠르다고는 해도 수도에 퍼진 소문이 며칠 만에 이 폐쇄적인 곳까지 알아서 도달했을 리는 없고.

‘뒷조사를 했겠네.’

이유는 안 봐도 뻔하다. 견제겠지.

오필리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하이다르의 건장한 체격을 가까이에서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이다르가 이렇게까지 망나니처럼 굴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과거의 오판을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엇할까.

오필리아가 벌린 거리를 한 발짝에 좁힌 하이다르가 짐승 으르렁대듯 낄낄댔다.

“동생의 남자를 뺏으셨다며, 황녀 전하. 사생아 주제에 고귀한 남자는 탐이 나던가?”

“글쎄. 일단 고귀하다고 하기도 힘든 남자를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건 확실한데.”

저 말을 뱉고 나서는 휘청했다. 뺨을 맞았다는 것은 그다음에 깨달았다. 입안이 비릿한 걸 보니 볼 안쪽이 터진 것 같았다.

심기 좀 거슬렀다고 바로 폭력부터 휘두르는 놈이라니.

머리에 구멍이라도 났나.

“봐줄 건 그 반쪽짜리 핏줄밖에 없는 게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로 혀를 놀리니 그 꼴이 나지.”

아, 생각해 보니 구멍 난 건 저쪽 머리가 아니라 제 처지였던 것 같다.

이럴 때 내세울 만한 뒷배도, 제 체구의 배는 되는 남자를 때려눕힐 만한 능력도 없는 제 처지.

오필리아는 이죽거리며 제게 다가오는 하이다르를 보며, 뒤로 책상을 짚었다.

하이다르는 폭력을 쓰고 나니 승기를 잡은 기분이라도 들었던지, 그 커다란 몸집에 걸맞게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다.

“황녀 전하니 뭐니 떠받들어 주니 전부 네 발아래 같았지? 네 주제를 알아야지. 네가 여기서 변을 당하면 누구 하나 신경이나 쓸 것 같나?”

오필리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그가 사납게 킬킬댔다.

“감찰관이니 뭐니 말은 좋지, 네 아비가 널 내게 팔아넘기려 하는 걸 누가 모르냐고. 어? 그나마 얼굴이 좀 반반해서 봐주려 했더니만. 주제도 모르고 같잖게 굴어?”

“……주제를 모른다는 소리를 많이 듣긴 했지.”

반면, 오필리아는 차분했다.

그녀는 이런 유형을 아주 많이 겪어 봤다. 이 알량한 수준에 맞게 알량한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제일 잘나기라도 한 것처럼 우쭐대는 이들.

그러니 조금만 자존심을 긁어 주면 바로 불이 붙는 거고, 남들을 찍어 누를 때조차 그 저열함을 버리질 못한다.

아마 이런 식으로 오필리아의 구멍 난 처지를 긁어 대면 오필리아가 저처럼 분노하거나, 비탄에 젖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구멍 나 있던 채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것이 이제 와 타격이 될 리 있나.

주제를 모른다는 말은 로넨에 있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하이다르는 상대를 잘 보고 덤볐어야 했다.

그녀가 자신 같은 유형을 얼마나 겪어 왔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야 했다.

뒷배도, 특별한 능력도 없이 그녀가 여기까지 어떻게 버텨 왔을지를.

하긴, 그런 걸 생각할 만한 머리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자신이 주제를 모른다고?

“하이다르 라딘. 너는 상황을 몰라.”

뺨 한 대 쳤다고 의기양양해진 꼴이란.

“하이다르 라딘. 너는 상황을 몰라.”

오필리아는 팔꿈치를 들어 있는 힘껏 하이다르의 팔 안쪽 꺾이는 부분을 가격했다.

“악!”

잠깐 힘이 풀렸던 팔이 맥없이 꺾이고, 오필리아를 붙잡았던 손이 반사적으로 풀렸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금 전부터 봐 두었던 것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잉크가 다 마르지도 않은 깃펜.

벌써 이 기회를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망할 년이!”

“뒤 조심해, 쓰레기 자식아.”

“뭐?”

와장창!

벽면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하이다르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밖에서 커다란 것이 방 안쪽으로 날아들어 하이다르에게로 돌진한 탓이었다.

여기까지는 오필리아가 의도한 바가 맞았지만, ‘커다란 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오필리아는 조금 놀라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셀로의 깃털이 부러졌다기에 한 번 와 봤더니.”

하이다르를 벽에다 메다꽂은 ‘커다란 것’이 유리 조각들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유리창에 그렇게 날아들었으니 온몸이 만신창이인 게 맞는데, 그는 흠집 하나 없이 말끔했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과, 맹금류의 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을 담은 녹색 눈.

그리고 몸에 두른 커다란 망토를 빼면 거의 헐벗은 남자를 보던 오필리아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안녕, 산테.”

* * *

이름이 불린 순간, 산테는 저 암컷이 자신을 찾는다던 바로 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젯밤, 무리에서 말썽이란 말썽은 죄 부리고 다니는 세이렌 형제들이 법석을 떨며 그를 찾아왔었다.

-산테, 그 암컷이 온 바다를 밝혔어! 라펠이 그렇게 많이 빛나는 건 처음 봤어!

-그래서 우리 깃털을 하나씩 줬어. 다음에는 육지 음식을 가져다준대!

세이렌들은 어릴수록 장난기가 심하고 잔혹하다.

최근 있었던 많은 난파들이 그 형제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들이 갑자기 인간 암컷에 대해 떠드는 것은 꽤 이례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잖아도 시끄러운 놈들이 넷이나 몰려서 와글와글 떠들어 대니 자비고 뭐고 일단 바닷속에 네 놈 전부 메다꽂고 시작할까 싶은 마음도 좀 들었지만.

어쨌든 산테는 세이렌의 수장다운 자비를 발휘해 그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그것은 확실히 현명한 행동이었다.

-참, 산테. 그 여자가 산테를 데려오라고 했어.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후에야 겨우 영양가 있는 내용을 듣게 되었으니까.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 아셀로. 인간 암컷이 날 보자고 했다고?

-응. 산테가 아는 암컷이야?

-어떻게 생겼는데?

-일출 때처럼 빨간 머리. 적도 바다처럼 파란 눈. 얇고 하얬어.

하얀 건 대체로 귀족 암컷인데. 내가 만났던 암컷들 중에 그런 여자가 있었나?

아셀로의 설명은 다소 알아듣기 힘든 면이 있었지만, 아주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산테는 제 기억을 한 번 되짚어 본 뒤에, 별 볼 일 없는 사이였음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을 부를 만큼 친하거나 중요한 사이였다면 제 깃털을 가지고 있을 테니. 어린 세이렌들을 불러서 자신을 찾는 걸 보니 아마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이리라.

세이렌에게 홀린 이들이 헤어지고 나서도 그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제법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산테는 이 일에 신경을 끄려 했다.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지. 이미 깃털을 줬다고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거기에 나까지 끌어들이지는 마라. 별것도 아닌 일로.

-그런데 산테, 그 암컷이 산테를 불러오라고 했어.

-그러니까 거기에 날 끼워 들이지 말라고 방금 말한 건 대체 어디로 들은 거냐?

-아니, 산테. ‘산테’를 불러오라고 했다니까?

산테는 그제야 아셀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을 불러오라고 했다는 것이 단순히 세이렌의 수장을 불러와라, 혹은 너희의 대장을 만나야겠다는 식의 대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산테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번 가볍게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 위로 잠시 쓸려 올라갔던 머리칼이 다시 쏟아졌다.

그사이, 가늘어진 산테의 시선이 붉은 머리칼의 인간 암컷을 길게 훑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탐색을 마친 산테의 붉은 입술에서 퇴폐적이고 매혹적인 저음이 느슨하게 흘러나왔다.

“이건, 흥미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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