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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4화 (14/118)
  • 제14화

    바다가 육지를 전부 먹어 치우면 이런 몰골이 될까.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그어 내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리엘의 사정도, 친구라고 믿어 왔던 사람이 사실 제 모든 치부를 알고 있다는 것도.

    아리엘을 도운 입장인 그에게 자신이 대체 어떻게 보였을까.

    이안의 진짜 구원자인 그녀는 죽었는데, 자신이 이안의 옆자리를 꿰차고 비참해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그러나 그 사실보다도, 더 이상 그를 제 편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하나뿐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직 제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안에게 그렇게 데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오필리아는 그날 이후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시기 좋게 그즈음의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아 마탑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만 아니라면 한동안은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 했으리라.

    ‘갑자기 그때 생각이 다 나네.’

    알레이가 마탑으로 떠난 후 시간이 꽤 지난 뒤에, 오필리아는 깃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알레이가 떠난 후 시간이 꽤 지난 뒤에 오필리아가 죽을 결심을 했으니.

    ‘편지를 본 처음엔 좀 야속했지.’

    사실 복잡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려서. 섧고 섧은 마음들이 전부 화살이 되어 알레이에게 꽂힌 것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알레이가 떠나고 난 뒤에야 오필리아는 깨달았다.

    허울뿐인 친분이라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거북하지 않은 사람이 곁에 있고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그가 곁에 있어 줌으로써 오필리아가 어떻게 연명할 수 있었던지.

    그 같잖은 온기조차 그리워지고 나서야, 그가 정말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아졌다.

    당시의 오필리아에게는 붙잡을 줄이 절실했고, 알레이는 훌륭한 줄이 되어 주었으니.

    다만 그것이 오필리아가 다시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오필리아는 아직도 알레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지 않고 있으니까.

    만약 예전이었더라면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상담이라도 했으리라.

    <신비한 인어 설화>라고 적힌 책 표지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던 검지가 일순 멈추었다. 상념에 잠긴 오필리아의 서늘한 시선이 제 손끝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 손끝을 잡았던 이의 표정을 덧그리고 있었다.

    ‘분명 그때도 그런 표정이었지.’

    오필리아가 갑자기 먼지 앉은 기억을 꺼낸 이유.

    알레이가 방을 나서기 전 일순 보였던 그 낯빛.

    조금은 당혹스러워 보이고, 조금은 민망해 보였던…….

    울고 있던 오필리아를 봤을 때 알레이가 꼭 그런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궁금해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 표정을 한 알레이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지는 궁금해지고 만다.

    그게 자신이 빠트린 무슨 열쇠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럴 리도 없는데 말이지.’

    오필리아는 시선이 머물러 있던 손끝을 그러쥐었다. 쓸데없는 상념은 이만하면 됐다.

    그녀는 <신비한 인어 설화>를 도로 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알레이가 들어왔을 때 보던 부분은 아니었다. 그 부분에서 두어 장을 더 넘기면, 숨겨 둔 오필리아의 메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한 인어 설화>는 말 그대로 구전되는 인어 설화들을 한데 모아 묶어 둔 것이기 때문에 오필리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실질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편찬된 책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릴리스 또한 오필리아가 <신비한 인어 설화>를 읽는 걸 보고 빈정댔으니 말이다.

    -인어라니, 전하께서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기왕 바다에 왔으니까.

    -느긋하시네요. 누가 보면 휴가라도 온 줄 알겠어요. 저는 도로 재건할 자재 확인하러 뛰어다니는데.

    릴리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위귀족의 적통이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고작 천출 황녀의 부하로 일하느라 온갖 번거로운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것에 늘 불만을 표하곤 했다.

    -억울하면 네가 황녀를 하지 그러니. 그러지 못했으면 내가 휴가를 잘 즐겼노라고 부황께 가서 보고나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 오필리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런 책도 살피다 보면 쓸 만한 정보를 찾기 마련이다.

    오필리아는 책을 읽던 와중 공통적으로 전달되는 부분이 몇 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화에 인어와 세이렌이 함께 등장할 때.

    ‘구조가 똑같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설화의 주인공이 세이렌-혹은 세이렌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바다의 목소리-에게 홀려 위험에 처했을 때, 인어가 그를 구해 주곤 한다.

    인어들이 박애주의인지, 단순히 세이렌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이 설화가 사실이라면 세이렌들은 인어를 썩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적어 둘 필요가 있어서 적어 둔 참이다. 나중에 해가 지면 세이렌들의 수장을 만나러 가야 할 테니.

    오필리아는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 두고 싶었다.

    적어 둘 만한 다른 내용은 또 없을까. 책장을 뒤적이는데, 문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지금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었던가?

    오필리아는 서둘러 책상을 정리해 책과 메모를 숨기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필리아는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이다르.”

    “자리에 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찾을 수고는 덜었군요.”

    라딘의 영주, 하이다르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정원사가 눈물을 흘릴 법한 모양새로 꺾여 있는 꽃 한 송이와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제야 오필리아는 자신이 알레이와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오늘이었구나.’

    하이다르가 환영식을 해 주겠답시고 자신을 파티에 초대한 날이.

    썩 좋지 않은 기억인지라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순식간에 차게 식은 오필리아의 시선이 하이다르에게 가 닿았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맣게 모르고 느물거리는 낯으로 편지와 시들어가는 꽃을 불쑥 내밀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제 별장에서 파티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때마침 라딘에 오시기도 했으니 겸사겸사 환영식을 하면 어떨까 해서, 초대장을 들고 왔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말이 좋아 환영식이고 파티지. 오필리아는 왜 하이다르가 자신을 데려가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황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겨우 저런 여자를 감찰관으로 보낸 황실도 알 만하지. 라딘에 직접 개입하긴 두려우니 여자나 보내는 거야!

    술에 취해 떠들던 하이다르의 말로 미루어 보자면 그는 친구들과 내기를 한 듯싶었다.

    아무리 라딘이 황실의 통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곳이라고는 해도 시골은 시골. 황족이 왔다고 하면 대개 우러러보기 마련이므로.

    하이다르가 황녀를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 그 증명을 파티에 오필리아를 데려오는 것으로 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하이다르로서는 피할 길 없는 내기이기도 했다.

    만약 피했더라면 그가 황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테니.

    ‘호랑이 없는 곳에서 설쳐 대는 여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꼴이겠지.’

    과거에도 이 사실을 모르고 파티에 참석한 건 아니었다.

    분명 뭔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오필리아는 기대를 걸어 보았었다.

    하이다르는 정말 친절했으므로. 정말 단순히 환영식을 하기 위해, 홀로 떨어진 자신을 챙겨 주려고 부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는 하지만, 돌이켜 보니 사람에게 생각보다 많이 기대를 걸고 살았구나.

    오필리아는 그 사실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하이다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그러시지요?”

    “아, 그냥……. 우스워서.”

    “……뭐?”

    오필리아는 웃음기가 점점 가시는 하이다르의 낯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게 식은 목소리가 비웃음을 띠고 흘러나왔다.

    “지방에 감찰관으로 다녀 본 경험은 많은데, 내 환영식을 ‘겸사겸사’ 하겠다고 말하는 영주는 처음이거든요. 그게 라딘이 보여 줄 수 있는 황실에 대한 최고 예우인가요?”

    “하, 하하. 황녀 전하께서는 수도의 사치에 익숙해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치?”

    오필리아의 반문에, 하이다르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짙은 패색이 하이다르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도대체 저 작은 체구로 이런 기백은 어떻게 내는 건지. 송곳 같은 새파란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오필리아는 하이다르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수도의 재정과 문화의 조율은 모두 부황께서 담당하시고 있는바. 이견이 있다면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다르 라딘, 다시 말해 보세요. 수도의 사치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

    말실수를 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하이다르가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분명 첫째 황녀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물렁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그 헛소문은 누가 냈단 말인가.

    하이다르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겨우 여자 따위한테 이 내가 밀리다니.’

    라딘의 영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치욕이다.

    그러나 치욕도 치욕이지만, 계획이 틀어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오늘 파티에 데려가서 기를 죽여 놓으려고 했는데.’

    첫째 황녀가 라딘에 오기로 했다는 말이 돌자, 라딘의 귀족들이 한 차례 술렁였다. 수도에 갈 일이 드문 이들에게 황족이란 한겨울 딸기 같은 존재였으므로.

    그녀가 하녀 태생이며, 황실에서 완전히 무시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둘러 퍼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오필리아의 방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라딘에서 왕과 다름없는 권위를 뽐내던 하이다르에게는 오필리아의 체면을 공개적으로 깎을 필요가 있었다.

    ‘난처한 얼굴이네. 이런 경험은 없었을 테니 당연한가.’

    그리고, 오필리아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응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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