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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3화 (13/118)
  • 제13화

    반지를 알아본 오필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했다.

    “이 반지는 어제 당신이 가져간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마력 친화력을 올려 주는 반지는 내게 필요 없을 테니 도로 가져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하루 만에 다시 돌려주는 거지?

    오필리아의 물음을 알아들은 알레이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책상에 올려놓은 반지를 집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앉은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몸을 낮추고 손을 청했다.

    오필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일전 그가 손을 청했을 때 으레 그러했듯이.

    오필리아보다 마디 하나는 큰 손이 매끈한 살갗을 건드리고, 오필리아보다 배는 낮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흘러나왔다.

    “반지에 걸려 있던 마법을 지우고 새로 걸었습니다. 이걸 끼면 무리 없이 다른 마법을 받아들이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원리가 뭐죠?”

    “마법의 거부 반응은 대체로 두 개보다 많은 개수의 마력이 충돌할 때 생깁니다.”

    알레이는 이어 설명했다. 모든 생물에게는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마력이 있고, 평범한 사람은 그것이 늘 줄줄 새고 있다고.

    “당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 수 없다면, 새어 나오는 걸 막아서 충돌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오필리아의 몸에 기본적으로 흐르고 있는 모든 마력을 차단한다는 뜻이었다.

    알레이가 느리게 오필리아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오필리아의 손가락을 타고 들어오자 다시 점점 크기를 줄였다.

    처음 그녀의 손에 들어왔을 때처럼, 꼭 알맞게.

    “다만 이것도 임시방편입니다. 너무 오래 막아 두면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 잘 때는 빼 두세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마도구를 뺄 방법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이례적인 상황이니 마도구의 성질을 바꾸었습니다.”

    반지를 낀 오필리아의 손을 놓아 준 알레이가 낮추었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당신과 나만 이 반지를 뺄 수 있게.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저 목소리가 퍽 다정하게 들리는 것은, 이 반지를 다시 제 손에 끼워 주기 위해 그가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느껴진 탓일까.

    반지를 보던 오필리아가 드물게 미소 지었다.

    “어제 피곤했을 텐데, 언제 이런 걸 한 거예요.”

    잠은 제대로 자긴 한 걸까? 오필리아는 잠시 걱정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지금 그녀가 해야 할 말은 걱정이 아니라 감사 인사였으므로.

    감사 인사를 들은 알레이가 마주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금안이 보기 좋았다. 대리석을 깎아 둔 것처럼 매번 딱딱하기만 하던 얼굴에 모처럼 낯선 온유함이 찾아드는 것은 오필리아로서도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이른 봄 아침처럼 미소 지은 남자가 꼭 그만큼 유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오필리아는 문득,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과거의 오필리아와 알레이는 적당히 데면데면한 사이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적인 교류가 아주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필리아는 한때 친구라고 명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알레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알레이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시 로넨 성에서 마음 둘 곳 없었던 오필리아에게는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이가 데면데면하게 끝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이안에게 한 번 데인 오필리아가 더 이상 마음의 문을 일정 이상 열지 않았던 탓이다.

    두 번째는 오필리아가 남에게 기대는 것을 익숙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이렇게 두 가지는 오필리아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으나, 마지막 세 번째 이유만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진실 때문이었다.

    로넨 성의 사용인들은 오필리아와 이안이 어째서 사이가 나쁜지 알지 못했다.

    다만 겉보기에도 이안이 오필리아를 멀리했고, 오필리아가 이안에게 매달리는 입장이었으니 눈에 보이는 대로 떠들고 웃었을 뿐.

    오필리아에게 비늘을 남기고 죽은 인어 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안과 오필리아의 비밀이었다.

    애초에 인어의 존재 자체가 그리 보편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이안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굳이 떠벌려 좋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이안이 오필리아에게 금방 질려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뿐, 누구 하나 그의 냉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때문에 오필리아는 당연히 알레이 또한 그럴 것이라 믿었다.

    만약 그녀가, 알레이의 방에서 우연히 발신자가 ‘아리엘’인 편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 * *

    편지를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알레이를 기다리며 집어 든 책 사이에 편지가 끼워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의 편지를 함부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덜덜 떨리는 손이 편지를 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악몽 같던 이름이 새겨진 종이는 보존 마법이라도 걸려 있었던지, 바로 어제 쓴 것처럼 말끔했다. 접힌 종이의 모양대로 난 세모꼴의 자국만 뺀다면.

    오필리아의 시선이 단숨에 활자를 먹어 치웠다.

    아리엘.

    그녀의 글씨체 역시 세로로 휘어 있었다.

    「알레이. 내 새가 제대로 편지를 물고 갔나요? 이 편지가 아마도 유언이 될 테니 그의 부리가 건조하길 바라야겠어요.」

    아마도 말끔한 편지를 유일하게 더럽힌 세모꼴의 자국은 새의 부리 자국인 모양이었다.

    그 문장이 그나마 이 편지에서 가장 가벼운 내용이었다.

    그 아래로는 오필리아가 몰랐던 아리엘의 상황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므로.

    「내일이면 벌써 그의 결혼식이에요. 당신이 다리를 만들어 준 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시간이 겨우 그만큼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내일 동이 트면 나는 물거품이 되겠죠. 이안이 사랑하는 건 다른 여자니까.」

    그즈음에서는 글씨가 잠시 흐트러져 있었다. 짓이겨진 잉크도 몇 방울 보였다. 그것은 눈물방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어요. 내가 그날 사람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이안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 여자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사실 나, 아주 먼발치에서 그녀를 봤어요. 멀리서도 한눈에 그녀가 이안의 신부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나처럼 붉은 머리였으니까. 그제야 당신이 왜 그녀에게 관심 가질 생각조차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아리엘은 오필리아를 먼발치에서 본 게 다행이라고 했다. 가까이에서 봤더라면, 자신과 닮은 점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냈더라면 더는 참아 낼 자신이 없었을 거라고.

    「목소리까지 맞바꿔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 시간이 너무 빨라요.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 보는데, 이게 언니들이 말했던 슬픔일까요. 내일을 생각하면 자꾸만 볼이 젖어요. 언니들이 너무 슬프면 내가 바다가 된다고 했는데, 이게 그런 거였을까요. 바다를 누가, 왜 만들었을까 한때 궁금했는데 이제 알 것만 같아요. 분명 그도 무척 슬펐던 거겠지요.」

    겨우 한 뼘을 넘는 글을 읽는 데 호흡이 몇 번이나 끊어졌는지 모르겠다.

    열지 말라는 방의 문을 열어 본 여자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니, 그녀는 애초에 문을 열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라도 했다.

    오필리아는 악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공포의 실체를 본 기분이었다.

    침대 밑의 괴물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언니들에게 보낸 칼을 받았어요. 언니들의 머리가 전부 짧아졌기에 나도 머리를 잘랐어요. 언니들에게 뭐라도 하나쯤은 남겨 주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우리 자매들은 서로를 따라 하는 게 습관이거든요.」

    차라리 편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아리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벌써 종장에 다다라 있었다.

    「알레이, 인어들과 한 거래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이안을 찌를 수 있겠어요? 내가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그건…….」

    그 이후는 잉크로 한 줄가량이 뒤덮여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사설이 길어 미안해요.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는 편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때마침 내 새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정보를 알아 왔거든요. 5년도 더 전에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가 라딘에 있다고 하네요. 만약 내가 알려 준 이들에게서 소득이 없다면 이 사람에게도 한 번 가 봐요.」

    부디 기억을 되찾을 수 있길 바랄게요.

    그 문장을 읽자마자,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필리아.”

    고개를 들면, 당황한 얼굴의 알레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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