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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1화 (11/118)
  • 제11화

    밤이 깊게 물든 방 안.

    알레이의 손끝에서 깃털이 느리게 회전했다.

    그것은 세이렌의 깃털이었다.

    조금 전, 세이렌들은 각자 자신의 깃털 하나씩을 주고 돌아갔다.

    세이렌의 깃털에는 마력이 담겨 있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를 부르고 싶을 때 깃털을 부러뜨려. 어디 있든 금방 찾아갈 수 있어!”

    세이렌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던 세이렌, 아셀로가 한 말이다.

    그러나 아셀로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필리아가 바랐던 것은 고작 그들을 언제고 부를 수 있는 깃털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깃털은 고마워. 하지만 내 부탁은 다른 거야.”

    뭔데?

    “너희들 수장, 산테. 그를 내일 이곳으로 데려와.”

    “산테? 그 산테를? 하지만 산테는 잘 움직이지 않아.”

    세이렌들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오필리아는 완강했다.

    “그걸 데려오는 건 너희 몫이지. 데려오면, 육지 음식을 좀 가져다줄게. 어때.”

    “육지 음식?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데!”

    “이참에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잖니?”

    “좋아!”

    어린 세이렌들은 정말로 다루기가 쉬웠다. 물론, 오필리아가 그런 세이렌의 성격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능숙하게 협상했기에 더욱 그래 보였던 것도 있겠지만.

    그랬기에, 알레이는 의아했다.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마수를 부르고, 다루는 것까지도 능숙해 보인다니. 황실에서 나고 자랐을 오필리아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은 알레이 본인의 기억에 대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앞서 물어볼 만한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오필리아가 어떤 관계였는지. 그런 것을 물어 어디다 쓴다고.

    오필리아가 어떻게 이런 지식들을 얻게 되었는지, 또 그녀가 자신을 도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성적으로, 그런 것들이 우선순위에 올라올 수 없었다.

    오필리아의 정보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면 또 모를까. 지금 알레이는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레이는 세이렌들이 돌아가자마자 우선순위의 최상단에 있는 질문을 꺼내 들었다.

    “저들이 내 기억을 찾는 걸 도와줄 이들입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묻는 것이 우습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선을 돌리면 오필리아가 손목에 묶었던 손수건을 끌러 젖은 발을 대강 닦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마도 허벅지를 내보일 만큼 올려 묶은 데다, 암초에 앉아 있으니 자세가 영 엉거주춤했다.

    그게 또 묘하게 알레이의 심기를 거슬렀다. 아마도 그가 본디 어설픈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인 탓이었으리라.

    “불편해 보이십니다.”

    “음, 생각보다 수건이 작네요.”

    사실 수건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았고, 알레이에게는 그녀의 몸에서 물기를 단숨에 날릴 수 있을 만한 능력도 있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냥 돌아가시는 건?”

    “릴리스한테 나갔다 온 걸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서……. 아, 그때 같이 라딘으로 이동했던 부관 있잖아요.”

    “아하.”

    그 떽떽거리던 여자.

    오필리아의 직속 부하인 주제에 그녀를 제 인생의 방해물처럼 쳐다보던 여자를 떠올린 알레이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어설프게 움직이고 있는 오필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 품새를 보면 해 뜨고 나서야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할 테니 앉아 계세요.”

    “……이런 허드렛일을 시키려는 건 아니었는데.”

    “당신은 시킨 적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는데.”

    마법을 쓰면 더 간단하겠지만, 오늘 마력을 광범위하게 쓸 일이 워낙 많았더니 이제는 그도 조금은 피로했다.

    오필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민망해서 그랬는지.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었지만, 알레이는 수건에만 집중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그녀의 흰 다리가 전부 보이는 위치였던 탓에.

    그녀가 조금 전 발을 담갔던 깊이가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종아리가 반이나 젖어 있었다.

    알레이는 한 손으로 발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살갗을 느리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것을 가만 지켜보던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탑 출신이라고 했잖아요.”

    “그러셨습니다.”

    “세이렌은 마탑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연락망이기도 해요. 그러니 당신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요.”

    “그럼 수장은 왜 데려오라고 하신 겁니까.”

    “아마, ……그가 당신을 알 테니까.”

    잠깐 말이 끊겼다. 건드린 곳이 민감했던지 발끝이 바짝 돋아 있었다. 가지런히 돋아난 발끝이 다리만큼이나 하얬다.

    하얬다.

    알레이는 무심코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단어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마탑은 결계로 둘려 있다고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어요. 바다 한가운데 있고, 그 주변에 세이렌의 군락지가 있거든요. 배를 타고서는 어지간해서는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

    “……알레이?”

    호명에, 알레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문득 고개를 들면, 제가 발을 받치고 있는 여자의 시선이 맞물렸다.

    또 그 시선이다. 저 호의. 저 표정.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파란 눈동자가 선명했다. 달이 밝은 것도 아니건만, 알레이는 그녀의 입술 달싹임까지도 볼 수 있었다.

    검은 밤, 검은 암초에 올라앉은 오필리아가 지독하게도 선명해서.

    “내 말 듣고 있어요?”

    알레이는 무심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듣고 있었습니다. 조금 놀라서.”

    “그럴 수 있죠.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거든요. 설마하니 탑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알레이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필리아는 더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덕분에 더 변명할 필요는 없어졌다. 알레이가 변명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다행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잠깐 사이 제 머릿속을 스쳐 간 단어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나 오필리아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저 자신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그는 자신이 건조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므로.

    떳떳하지 못한 밤이었다.

    밤이 그를 벌하기라도 했던지, 겨우 잠든 그 날의 꿈에는 오필리아가 나왔다.

    아니, 붉은 머리 파란 눈 여자가 나왔다.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붉었던 머리와 파랬던 눈만 기억이 난다.

    머리색마저도 오필리아와 똑 닮아 있었지만, 꿈에서 깬 알레이는 그것이 오필리아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꿈속의 여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고, 명랑했으며,

    “정말요? 그럼 나도 육지를 걸을 수 있는 거예요?”

    물고기 꼬리로 된 하반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 * *

    그건 제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인 걸까.

    꿈에서 깨어나고도 한동안 알레이는 멍하게 있었다.

    단순한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면, 대체 그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붉은 머리에 파란 눈 여자.

    황녀가 인어일 리 없으니 당연히 오필리아가 아니겠지만.

    그렇게까지 닮은 구석이 많은데 과연 오필리아와 연관이 없는 사람일까?

    부정하기에는 오필리아가 보여 준 의아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드문 세이렌을 능숙하게 대한다거나, 세간에 알려진 게 없는 마탑의 정보를 아주 잘 알고 있다거나.

    어제 해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필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모로 도움 받은 게 있으니 대답 하나 더 해 줄게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그 선심이야말로 알레이의 양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알레이는 주는 기회를 양심을 이유로 걷어찰 만큼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목적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목적이라 하면?

    -내 기억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당신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세이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알레이는 오필리아가 기억에 대한 정보를 내걸며 한 ‘부탁’이 결국 또 제 기억을 되찾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통 거래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하면 편하다.

    -기억을 되찾은 내가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기에 내 기억을 찾아 주려는 것이 아닙니까.

    당장은 알레이를 위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오필리아 자신에게 이득이 가는 행동이라는 뜻이니까.

    오필리아는 정곡을 찔렸던지,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리고는 실토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해 줄 수 없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알레이가 본 오필리아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미리 목적을 밝히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더라면 진즉 밝혔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알레이가 여태 묻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대로 찾아온 기회를 날리기에는 아깝다.

    알레이는 고민하다, 우선순위 아래쪽에 있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고르고 골라서, 최대한 사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럼,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세이렌이나, 마탑 같은 것들이요?

    -예. 어렵겠습니까?

    -어려울 게 뭐 있어요. 그보다,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게 놀랍네요.

    -눈치채다니, 무엇을?

    -당신은 마탑 출신이고, 나는 당신을 알고 있는걸요.

    오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지척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당신이 알려 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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