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10화 (10/118)

제10화

빛을 발하는 라펠들이 바다 위로 꽃밭을 만들었다.

산등성이에서 보는 별보다도 많이, 어부가 꽁꽁 말아 놓은 그물 구멍보다도 많이.

그리고, 오필리아가 기대하던 이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안이 그녀에게 바다 위 작은 꽃밭을 보여 주었던 날, 오필리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바다를 자주 다녔으니 이것도 자주 봤겠네요?

-아니, 바다 위에서는 라펠을 볼 수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라펠이 불길한 징조라고 해야겠지.

-이렇게나 예쁜데, 불길한 징조라니. 왜죠?

-라펠이 빛을 발한다는 건, 라펠을 사냥하러 나온 놈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조심해야 하거든.

마력이 담긴 아름다운 목소리로 라펠을 밝혀 잡아먹고, 뱃사공을 홀려 암초에 배를 부딪히게 하는 이들.

마탑의 이름이자, 그 자체로 마탑의 상징이기도 한 이들.

세이렌.

바다 위로 날아드는 새의 인영을 보던 오필리아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알레이, 마력을 거둬들여요. 저들이 이쪽으로 올 수 있게.”

그녀의 말에, 알레이가 인상을 썼다.

“대체, 저건 뭡니까?”

“뭐긴 뭐예요.”

당신 기억 찾는 걸 도와줄 이들이지.

* * *

뱃사공들의 이야기 속 세이렌은 대개 두 가지로 묘사된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외양은 흉측하게 생긴 새 모양의 괴물.

혹은, 아름다운 목소리에 비견할 만큼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사람.

직접 세이렌을 봤다는 사람조차 이토록 의견이 분분하니,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도 왕왕 나올 정도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이들의 외양에 대한 진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물론, 지난 생에서의 경험으로.

과거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은 이후, 그는 마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탑이 애타게 찾고 있던 마탑의 주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알레이가 기억의 부재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또 기억을 되찾는 것에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기 때문에 오필리아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마음이 가는 대로 허락했더라면 오필리아는 분명 그를 붙잡았을 터다.

그가 사라지면 다시 실어증이 오진 않을까, 다시 누구에게 자잘한 일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끝없는 설원에 홀로 남겨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서.

그러나 어떻게 제 욕심만으로 그를 붙잡겠는가?

그는 이제야 겨우 제자리를 찾았는데.

그래서 오필리아는 그를 붙잡는 대신, 조금 더 자주 알레이의 방에 드나들었다. 그의 벽난로 앞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냈고, 자잘한 것을 선물했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은 모처럼 자두 파이가 잘 구워진 날이었다.

알레이가 단것을 꽤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오필리아는 자두 파이 두 조각을 들고 알레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찾아간 알레이의 방에는, 오필리아보다 앞선 손님이 있었다.

뒷머리가 목을 덮지 않을 만큼 짧은 길이의 곱슬머리에, 기묘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날카롭고, 매혹적인 인상. 그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뚜렷하고 유혹적인 느낌이 났다.

“디안, 이 암컷은 뭐야?”

그리고, 아주 무례했다.

알레이가 인상을 쓰며 제 낯을 짚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 산테.”

“왜? 아무리 봐도 수컷은 아닌 것 같은데.”

“성별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들어와도 됩니다, 오필리아.”

“……아.”

오필리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매혹적인 남자-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수컷이었다-와 암컷이라는 호칭에 놀라 잠깐 멍하니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산테라고 불린 수컷을 흘끔 보았다가, 알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계신데,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이 친구는 곧 나갈 테니 괜찮습니다. 산테,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있어라.”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그런데 정말로 ‘나’와 같이 둬도 괜찮겠나?”

산테의 물음에, 이번에는 알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스로의 결정을 되짚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네가……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미리 밝히면 되지. 오필리아, 이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현명한 결정이야.”

“산테는 세이렌의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는,”

“세이렌이지.”

“……말장난하지 말고.”

“사실이잖나.”

오필리아는 잠깐 혼란스러워졌다. 갓 구워 뜨거운 자두 파이를 한입 가득 물었어도 이것보단 덜 당황스러웠으리라.

그녀는 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마탑이라고요?”

그리고 비웃음을 얻었다. 산테는 접시를 한 상자 떨어트린 것만큼이나 시끄럽게 웃더니, 눈물을 닦아 내기까지 했다.

수습은 알레이의 몫이었다. 그는 당황한 오필리아의 손을 달구고 있는 자두 파이 접시를 조심히 빼내 책상에 내려놓고,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설명이 다소 불친절했습니다. 저놈이 방해를 해서……. 어쨌든, 저건 마탑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탑이 저들 종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런 의미였군요.”

“놀라지 않게 해 드리려 했는데, 오히려 혼란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해했어요. 저분이 세이렌이었군요.”

다행히도 오필리아가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자, 알레이는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그즈음에는 산테도 잠잠해졌다.

덕분에, 알레이는 마저 설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이렌이 새와 인간의 모습을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에 마탑에서 라펠 사냥을 도와주는 대신 연락망으로 종종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산테는 세이렌의 현 수장이라는 것 정도.

오필리아는 모든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내게 알려 줘도 되는 건가요? 인외 종족이라면 인간들이 가만히 둘 리 없을 텐데.”

만약 자신이 산테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냐고.

질문을 알아들은 산테는 크게 웃었다. 조금 전 오필리아가 산테를 마탑으로 오인했을 때보다는 작고, 보다 유쾌한 웃음이었다.

오필리아는 산테가 왜 웃는지 물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지.’

세이렌이 마탑의 보호 마법을 몇 겹이나 두르고 있는 데다,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모든 부분에서 월등해 오히려 인간을 재미로 사냥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향간에 떠도는 소문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세이렌이 암초에 배를 부딪히게 해 침몰시킨다는 것도, 새의 모습이라는 것도,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도.

그래서 다행이었다.

만약 세이렌이 인간에게 사냥당하는 처지였더라면, 이토록 만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테니.

“방금, 그거 누가 한 거야? 암컷? 수컷? 둘 다?”

“그렇게 많이 빛나는 건 처음 봤어! 또 해 봐! 또!”

오필리아는 암초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제 옆에서 떠드는 세 명의 소년-세이렌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멀리서 봤을 때는 새였으나, 가까워짐에 오필리아는 그들이 모습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알레이에게 들은 대로였다.

-세이렌은 강한 만큼 경계심이 없고 호기심이 많습니다. 장난기도 심하고요. 뱃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겐 그저 장난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 다시 만나게 되면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려운 부분은 뭐죠?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니, 어려운 것이라면 그것이겠죠. 세이렌은 참을성이 없으니까.

죽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알레이의 말을 떠올리며, 오필리아는 어린 세이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사이에, 세이렌들은 벌써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빨리 안 해 주면 바다에 빠트릴 거야!”

“암초에 머리를 으깨 버릴 테다!”

하지만 저 협박이 뭐가 무섭겠는가?

제 옆에 있는 건 바다를 밤하늘로 바꿔 버릴 만큼 막대한 능력을 가진 남자인데.

“알레이, 너무 시끄럽지 않아요?”

“동의합니다.”

알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이렌들의 입술이 위아래로 맞붙었다,

이제 좀 낫네.

오필리아는 꽉 막힌 소리를 내며 말하려 노력하는 세이렌들을 보며 사늘하게 입을 열었다.

“세이렌. 너희가 원하면 얼마든지 이 바다를 밝혀 줄 수 있어.”

“읍! 읍!”

“그리고 이보다 더 놀라운 것도 보여 줄 수 있고, 라펠은 배가 터지도록 먹게 해 줄 수도 있지.”

“……!”

“격랑이 이는 바다가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걸 본 적 있니? 비가 거꾸로 내리는 건? 바다 밑바닥이 보고 싶진 않니? 너희가 날 도와준다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오필리아가 말을 이어감에, 세이렌들은 점차 홀린 듯 말이 없어졌다.

만약 여기 있는 것들이 산테처럼 나이가 찬 세이렌들이었더라면 설득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여기 있는 건 카델리아만큼이나 어린 세이렌들이었다.

어쨌든, 운도 실력이다.

오필리아는 쐐기를 박았다.

“어때. 날 도와주겠니?”

그리고, 그녀는 훌륭한 연락책 3개를 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