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간단해요. 내 부탁을 들어줘요. 그때마다 기억을 찾기 위한 단서를 하나씩 알려 줄게요.”
“예를 들어?”
“마탑 세이렌.”
오필리아의 혀끝에서 가벼운 발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게 비밀에 싸인 마법사들의 탑. 위치도 생김새도 하물며 그게 어느 소속인지조차도 알려진 게 없죠.”
“압니다. 세간에 존재가 알려진 것조차 마탑의 마법사 일부가 나오면서 알려진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알레이의 반문에, 오필리아의 무심한 시선이 비뚜름해졌다.
“알레이. 이 넓은 대륙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왜 당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은둔 생활이라도 했거나, 지나치게 운이 나빴…….”
설마.
여상히 대꾸하던 알레이의 입술이 멈췄다.
경악으로 크게 뜨인 금안이 오필리아를 향했다.
그 놀람 앞에, 오필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떠 긍정해 주었다.
“당신, 마탑 출신이에요.”
그것도 마탑의 주인이었지.
어째서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알고 있는 거라도 알려 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오필리아는 충격에 굳은 알레이를 잠자코 바라보다,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녀의 손가락은 두 사람을 이동시킬 만한 힘은 없었지만, 적어도 집 나간 알레이의 정신을 되돌려 놓을 수는 있었다.
“방금 건 맛보기.”
“…….”
“마탑 출신이라고 하면 뭔가 더 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을 신뢰하는 건가요?”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탑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허를 찔렸다는 듯 알레이가 입가에 손을 모았다가, 숨을 내뱉듯 그대로 떨어트렸다.
오필리아는 그를 충분히 이해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하죠. 마탑은…… 워낙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그 존재가 알려진 것도 겨우 백여 년 남짓.
신전이 마법사들을 이단으로 분류해 박해해 온 세월이 긴 탓에, 마탑은 바깥과의 교류를 극도로 피하고 있었다.
오죽 말을 아껴서, 세간에는 마탑의 존재조차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알레이가 자신의 출신지라 믿고 있었던 동부는 전쟁이 잦은 곳이다.
그 말은, 알레이가 자신을 ‘전쟁통에 사고로 지인, 가족을 잃고 기억마저 잊은 사람’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기억을 잃고 처음 눈 뜬 곳도 동부 연합국과 밀레세트 제국의 경계에 있는 숲이랬지.’
이렇듯 너무 척척 조건들이 맞아들어 간 탓에, 알레이는 그만 철석같이 믿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이 동부 출신일 거라고.
그러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오필리아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건 알아요. 하지만 맨입으로는 어렵고. 라딘에 도착하면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어때요. 들어줄래요?”
“……내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당신에겐 간단한 일일 테니까.”
그리고 오필리아에겐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안이 라딘의 해역으로 표류해 오는 건 지금으로부터 사흘 뒤.
크센트 왕으로부터 밀레센트 제국의 황녀를 원한다는 청혼장이 도착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뒤.
그녀는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다.
* * *
넓게 보자면, 오필리아의 계획은 이랬다.
알레이의 기억을 되찾아 주고, 그 대가로 자신을 마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
하지만 기억을 되찾아 준다는 부분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알레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기억을 봉인 당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알레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아 마탑주가 되지 않는다면 오필리아의 계획 전반이 어그러지니까.
하지만 오필리아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녀가 알레이의 기억에 걸린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녀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다만, 그 조력자가 반드시 두 발 달린 인간일 필요는 없다.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따라 붉은 머리칼이 나부꼈다.
상대를 알아본 오필리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레이, 늦지 않게 왔네요.”
“늦지 말라 하셨잖습니까.”
분명, 그렇게 말한 게 자신이긴 했다.
라딘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말한 부탁.
-라딘 성의 후원을 따라 걸으면 해변이 나와요. 소등 후에 거기서 봐요. 늦지 말고.
-그게 부탁입니까?
-그럴 리가. 나오면 알려 줄게요.
-매번 진상은 나중에 알려 주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어쨌든 알려 주긴 할 테니.
그 말에 알레이의 눈썹이 잠깐 꿈틀하는 것이 보였으나, 오필리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알레이 본인도 이렇게 약속 장소에 늦지 않게 나왔으니.
오필리아는 걸터앉아 있던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바위에 치맛자락이 끌려 허벅지가 잠깐 드러났지만, 밤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바위에서 내려와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피곤하진 않아요?”
“피곤할 이유 있습니까?”
“아까 그렇게 마력을 써댔잖아요.”
라딘에 도착한 늦은 오후, 알레이는 지난 생에서처럼 열심히 민원을 처리하고 다녔다.
개중 하나가 격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오필리아는 이번에도 놀랐다.
손짓 한 번에 바다를 잠재우다니.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놀라운 일이 아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희끗하니 별일도 없었다는 표정이고.
“난 괜찮습니다. 당신이야말로 피곤할 것 같은데.”
걱정을 했더니 걱정이 돌아왔다. 오필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알레이가 그 특유의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봤습니다. 영주가 귀찮게 굴던 것.”
“아.”
오필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라딘의 영주, 하이다르 라딘은 누가 보기에도 수상쩍은 환대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기억하기로, 그의 과한 친절은 이안을 구해 올 때까지 이어졌었다.
하이다르는 남부 특유의 활기찬 면과 다부진 몸을 가진 미남자였기 때문에, 만약 오필리아가 쉽게 친절에 혹하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에게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하이다르 같은 유형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녀의 태생이 어쨌든, 황녀라는 직위에 쉽게 알랑거리는 자들.
오필리아는 그녀에게 반한 것처럼 굴던 하이다르를 떠올리고는, 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영주가 귀찮게 구는 건 내가 황녀니까 그런 거예요. 여기 영주도 왜 내가 여기 감찰관으로 보내졌는지 알거든요.”
“왜 여기 감찰관으로 보내진 겁니까?”
“결혼 상대를 골라 오라는 거죠.”
오필리아의 대답에 알레이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지만, 정작 그녀는 신발을 벗느라 보지 못했다.
바위 옆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오필리아는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치맛자락을 잔뜩 움켜 올려, 허리춤에 묶으며 여상히 말을 이었다.
“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난 황녀고, 아버지…… 황제는 어떻게든 나를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하니까. 황실의 입김이 잘 닿지 않는 지방 귀족들은 꽤나 골칫덩이거든요. 음, 됐다.”
“……그러면, 영주도 당신과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겁니까?”
“글쎄요, 아마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 순진한 공주님이 사랑에 빠져서 바보 같은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은 거겠죠.”
오필리아는 묶은 치맛자락을 툭툭 쳐서 맵시를 잡고,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그녀가 감찰관으로 돌아다녔던 것도 벌써 해가 넘는다. 그 기간 동안 오필리아가 깨달은 게 있다면, 그녀는 어디에 가도 환영받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고귀하고 지엄한 황실에서는 그 반쪽짜리 태생이 문제가 되었고, 반대로 그 평범한 태생이 어울리는 이들에게 가면 고귀한 핏줄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도 그녀를 오필리아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시녀 태생의 사생아였고, 황녀였다.
‘그래서 이안이 특별했던 것도 있지.’
처음에는 이안도 하이다르처럼 그녀를 데리고 놀 생각인가 했지만, 이안은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만 보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분명 그녀를 사생아로도, 황녀로도 보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가 오필리아를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의 구원자.
그러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오필리아를 바로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잡담은 이만하면 됐다. 오필리아는 왜인지, 조금 전부터 잠잠한 알레이의 손을 슬쩍 당겼다.
“그보다, 이리 와 봐요.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으니까.”
“……이제 알려 주시는 겁니까?”
“알려 줘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해안선으로 사분사분 걸었다. 파도가 발끝을 적실 즈음에야 멈추었다.
“아까 낮에 한 거 있죠. 바다를 잠재운 것. 그런 비슷한 걸 해 줬으면 해서요.”
“이 바다는 잠잠해 보이는데.”
알레이는 그렇게 대답했다가, 잠깐 멈칫했다.
“……그래서 제게 피곤하진 않은지 물어보신 겁니까?”
“티가 났나요?”
“조금.”
그 목소리가 왜인지 화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오필리아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보면 알겠지만, 이 바다를 잠재워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 마력을 여기에 부어 줄 수 있겠냐는 거죠. 아주 넓게. 최대한 많이.”
“내가 여기에 마력을 부으면,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아주 작은…… 해파리 같은 것들인데, 마력을 받으면 빛이 나거든요.”
밤에만 보인다는 바다 생물 라펠.
라펠이 밤에만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빛이 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기 때문에.
마정석 가루, 혹은 마력에 반응하는 이 생물들은 오필리아가 이안에게 마음을 열었던 날 그가 보여 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도 이안도 마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니 당시에는 마정석 가루를 뿌려 담요 한 칸 크기 정도밖에는 밝히지 못했지만.
“이렇게 하면 됩니까?”
손짓 한 번으로 바다를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숨에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바다를 보며, 오필리아는 만족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이걸 위해 일부러 온 성의 소등 이후,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랐다. 자신들처럼 몰래 빠져나온 사람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한다고 해서 누가 믿어 주기나 할까?
그믐날 밤하늘만큼이나 검었던 바다가, 어느 순간 여름날 소나기를 만난 흰 데이지 꽃밭처럼 온통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이 꿈결 같은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