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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8화 (8/118)

제8화

“너도 신분 높은 남자 꼬셔서 인생 펴 보려는 속셈이지? 딸은 어미 팔자 따라간다던데, 욕심 부리다 목 날아가는 거 아닌가 몰라?”

예전이라면 카델리아의 말에 상처받거나, 어쩌면 이토록 길길이 뛰는 카델리아를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전자가 더 유력해 보였다.

지금 그녀는 오필리아의 어머니가 오필리아를 낳고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걸 두고 비웃고 있으니까.

차라리 화가 나면 좋겠는데.

‘거슬려…….’

곧 떠날 시간인데, 이런 것에 붙들려 있을 틈이 없다.

빨리 돌려보내야겠네.

오필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딸이 어미 팔자 따라간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도 딸이라는 걸 기억해야지. 너도 누구처럼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 어쩌려고?”

“……뭐?”

오필리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카델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해? 부황께서는 내게 약조하셨어! 날 정략결혼 따위에 팔아 치우지 않겠다고!”

“글쎄…….”

하지만 난 네가 팔려 가는 미래를 아는데.

언약은 쉽다. 지금처럼 팔아 치우기 좋은 딸이 하나쯤 있을 때는 더 쉽고.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도 뒤집히는데, 겨우 딸에게 한 언약 따위 뒤집지 못할 이유가 있을 리가.

그러나 겨우 언약 따위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카델리아가 우스워서, 오필리아는 차게 웃었다.

그녀의 맹목은 꼭 과거의 자신을 닮아 있었다.

말이 그대로 지켜질 거라고 믿었던 그때의 자신을.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잘 생각해 봐라, 카델리아. 부황께서 널 아끼시는 것은 맞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나라와 딸 중에서 부황이 과연 무얼 고를 것 같니.”

“……그만해.”

“설마 너라고는 생각하지 마. 나중에 울게 될 테니까.”

“……그만! 그만하라고!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

잠깐 잠잠해지나 싶었던 카델리아가 버럭 고함을 치며 손을 휙 치켜들었다.

원래 어린아이들이란 떼를 쓰다 통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는 법이다.

나도 참 괜한 친절을 베풀었군.

그렇게 생각하며 카델리아의 손을 쳐내려 했는데,

“이건 또 뭡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알레이가 카델리아를 붙잡고 있었다.

* * *

“하도 오지 않으시기에 한 번 찾으러 와 봤는데…….”

알레이는 그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카델리아와 오필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에 이렇게 지내셨는지.”

방금 저 말의 억양이 미묘하게 억눌린 것 같다고 하면 이상할까.

오필리아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별거 아니에요. 밖은 준비가 끝났나요?”

“전하께서 오르시기만 하면 떠날 겁니다. 짐은 다 챙기셨습니까?”

“그럼요.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카델리아는 놓아 주지 않을 생각인가요?”

오필리아의 시선이 붙잡힌 카델리아를 향했다.

카델리아는 조금 전부터 알레이에게 붙잡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단지, 알레이가 그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얼굴이 시뻘게진 카델리아가 알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소리를 쳤다.

“지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이런 무례를 저질러! 이거 안 놔!”

“하는 짓 보아하니 귀족 아니면 황족이겠고. 저분하고 닮은 걸 보니 혹시 황족 되십니까?”

알레이는 걷어차인 정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카델리아의 팔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감히 황실의 적장녀인 나를 이따위로 취급한 걸 알면 부황께서 널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당장 놔!”

“그거 의아한데. 제가 알기로 적장녀는 저기 서 계신 분 되십니다. 황제 폐하의 핏줄이면 전부 적통 아닙니까.”

알레이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며 능청을 떨더니, 카델리아의 키에 맞추어 숙였던 허리를 도로 폈다.

“적장녀는 여기 계신데 적장녀라고 주장하시다니. 도통 신원을 모르겠습니다. 이런 수상한 사람을 황녀 전하 곁에 둘 수야 있나.”

“나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유일한 딸, 카델……!”

카델리아가 씩씩대며 항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조차 없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레이가 손을 튕기자 카델리아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필리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 앞에서 벌어진 일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거, 순간이동이죠?”

“그럴 겁니다.”

“국내에서도 저게 되는 사람은 몇 못 봤는데. 어디로 보낸 거예요?”

“모릅니다. 대충 어딘가 떨어졌겠죠. 황궁 안 어디쯤으로 이동시켜 뒀으니 알아서 찾아갈 겁니다.”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걷어차인 바지춤을 툭툭 터는 알레이에, 오필리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

“왜 웃습니까. 사람 앞에 두고.”

“카델리아를 그렇게 취급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아, 하긴.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더한 것 같던데.”

“그런데 그렇게 막 대해도 돼요?”

웃음기가 반쯤 걷힌 오필리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

조금 전 뺨을 맞을 뻔한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카델리아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알레이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일부러 상급 마법인 순간이동을 썼기 때문에.

단순히 외관으로 찾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상급 마법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찾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게 가능하다고 알려진 명단 중에 알레이는 없으니까.

‘뭐, 찾더라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어차피 마법사는 귀한 인력이라 잘 잘리지 않는다.

게다가 순간이동이 가능한 상급 마법사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제국에서 그를 죽일 리 없다.

물론 그런 마법사의 사정까지 오필리아가 고려하진 못했으리라.

‘그건 그렇다 쳐도, 순진한 건지 스스로에게 무심한 건지.’

보통은 봉변을 당할 뻔한 스스로의 처지를 먼저 걱정할 텐데, 오필리아는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 이유 모를 호의 가득한 시선으로.

저 시선을 받을 때면 늘 속 한쪽이 부풀어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불편하다.

“…….”

알레이는 잠깐 뜻 모를 시선을 오필리아에게 두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껏해야 죽이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죠.”

“아, 맞아. 그랬죠. 많이 지체됐나요?”

오필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라딘으로 함께 가는 그녀의 직속 부하, 릴리스는 오필리아를 영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실에서 붙인 오필리아의 감시자였던 탓에 사사건건 오필리아의 일에 대거리질을 하려 들곤 했다.

그러니 오필리아가 늦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적잖이 귀찮게 굴 것이 분명했다.

다행인 것은 그녀의 곁에 알레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염려의 기색을 내비치는 오필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지체되진 않았습니다. 궁 위치를 몰라서 모시러 오는데 길을 좀 헤매긴 했지만.”

나갈 때는 편히 갈 테니까.

“빠르게 모셔다드릴 테니, 약속대로 설명할 준비나 하고 계시죠.”

그렇게 말한 알레이가 손을 튕겼다.

덕분에,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순간이동이 얼마나 멀미가 나는 짓인지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릴리스와 한 판 하는 게 나았을지도, 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 * *

밀레세트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라딘.

오필리아가 라딘의 감찰관으로 발령받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라딘의 영주가 미혼이라는 것.

황제는 오필리아를 최대한 정략결혼으로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교역항이 딸린 라딘의 영주 정도면 황제로서도 얻을 것이 많을 테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라딘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라딘은 바닷가답지 않게 주변이 제법 폐쇄적인 지형이었다.

하필 주변에 산이 많은 것도 있지만, 원래 사람들이 사용하던 큰 길이 어느 날 내려앉은 탓이었다.

그 길은 운하를 끼고 있어 종종 강이 범람하는 시기가 되면 지반이 약해지곤 했는데, 결국 땅이 내려앉아 길이 단절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라딘은 황실의 눈을 피하기에 더없이 좋은 지형이 되었다.

약아빠진 황제가 이를 가만둘 리 없다.

라딘은 올해 운하 옆 도로를 재건하라는 황명을 받았고, 오필리아는 이를 감찰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대로 이렇게도 쓸 수 있다.

‘라딘은 밀레세트 제국에서 도망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다.’

다른 곳이라면 황실의 눈을 피하기가 여간 쉽지 않겠지만, 라딘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라딘은 오필리아가 향하려는 목적지와 가까운 곳이기도 하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길 떠나고 싶지만.’

아직은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개중 첫 번째가 제가 며칠 전 손아귀로 끌어들인 사람.

알레이.

라딘으로 향하는 마차 안, 오필리아는 이렇게 서두를 뗐다.

“설명에 앞서 먼저 이걸 짚어야겠어요. 알레이, 내가 당신을 돕는 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에요.”

오필리아의 선언에도 알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게 있으니 먼저 손을 내밀었을 거라 여겼습니다.”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 실망했나요?”

“아니, 안도했습니다. 순수한 호의였더라면 불편했을 겁니다.”

묘하게 단호하기까지 한 알레이의 반응에 오필리아는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금세 털어 내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원래 알레이는 매사에 딱딱한 편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피차 주고받는 관계일 테니.”

“어련하시겠습니까.”

알레이는 쓰게 한 번 웃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발끝으로 탁탁 마차 바닥을 두드렸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위해 뭘 해 주면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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