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순간 오필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내 말이 잘못됐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 택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다면, 해 봐.”
오필리아는 반박하려 했다.
난 당신을 사랑해서 선택한 거라고. 내가 당신에게 표현한 애정이 그렇게 얕아 보였냐고.
그러나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벅거리는 수준으로 나오던 목소리가, 목이 콱 메인 것도 아닌데.
입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아서.
“……그만 가 봐. 이런 일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군.”
오필리아는 그대로 쫓겨나 한참을 울었다.
정략결혼의 일종이라니.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봐야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었는지.
제 애정이 그렇게 깊지 않아 보였던 걸까?
남들 눈에는 발목에나 겨우 오는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을 받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게 제 최선이었다.
마음을 여는 것조차 해 본 적 없는데, 어떻게 누군가를 깊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얕은 사랑에 빠져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모두가 그 정도 깊이에 익사하는 줄 알았다.
제 실책이라면 그것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충격은 가시질 않아, 오필리아는 그날 이후로 말을 잃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성안의 사용인들을 교체하고, 점차 로넨에 적응해 나가도.
그렇게 1년간 말없이 살던 오필리아가 실어증에서 해방된 건, 우습게도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오필리아, 오랜만입니다. 아, 이젠 공비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알, 레이.”
로넨 성의 마법사가 바뀐 것.
* * *
실어증은 정신적인 문제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아는 사람 하나 생긴 것만으로 그렇게 바로 호전되었으니 말이다.
‘완전히 나아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당시에는 사람을 앞에 두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적어도 로넨의 공비가 말더듬이 백치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의 경험은 괴로운 동시에 오필리아에게 한 가지 교훈을 남겼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현실을 벗어나는 건 안 돼.’
사람은 쉽게 변하고, 변하는 것에 안주할 수는 없다.
사람은 해답의 계기가 될 수는 있으나, 해답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오필리아는 그것을 몰랐지만, 지금의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상황을 바꿀 때지.’
이안을 만난 이후 이틀.
오필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내용과 상황이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생각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으로 나온 양송이 수프가 상해 있었던 것까지 완벽히 똑같았다.
단 한 가지, 그녀를 둘러싼 시선을 빼면.
‘다들 날 의식하는 것 같았는데.’
평소에도 곱지 않은 시선이라면 넘치도록 받아 왔지만, 근 며칠간 받아 온 것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다들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다.
‘역시 내가 투신한 걸 목격한 사람이 있는 거겠지.’
과거와 달라진 부분이라면 그것밖에 없으니까.
첫째 황녀가 드디어 미쳤다는 소문이라도 돌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볼이나 한 번 꼬집고 말 걸 그랬다.
오필리아는 잠깐 후회했지만, 무던한 성격답게 금세 잊었다.
어차피 오늘은 라딘으로 떠나는 날이었고, 사람들은 눈에서 멀어진 화제에는 금세 흥미가 식을 테니까.
‘아니더라도 별 상관은 없지.’
만약 제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 궁으로 돌아올 일은 또 없을 테니.
오필리아는 짐을 챙긴 가방끈을 꼼꼼히 당겨 묶고, 허리를 폈다.
밖이 소란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안이 떠나는 날이었던가.’
오필리아와 이안이 같은 날 황궁을 떠났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지난 생에는 라딘에 가느라 정신이 없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있다고 해서 별로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지만.
전생의 경험은 분명 괴로웠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웬만한 일들은 무던히 넘길 수 있는 정신력을 얻게 된 것이 그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응석받이 이복동생이 갑작스럽게 고함을 치며 등장하더라도.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차분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단출한 오필리아의 차림새와 달리, 손끝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이복동생, 카델리아가 얼굴까지 붉어진 채로 씩씩대며 서 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기는 했다.
그녀보다 두 살 어리게 적통으로 태어난 데다, 황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해 여태 응석받이로 자란 카델리아가 오필리아에게 화풀이를 해 온 것은 제법 유구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의아한 구석은 있다.
라딘으로 떠나는 날 카델리아가 제게 화풀이를 하러 찾아온다니.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혹시 내 계획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은 아니겠지?
부디 그렇지는 않기를 바라며, 오필리아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카델리아.”
“하! 무슨 일이냐고? 정말 그 소문을 몰라서 물어?”
“그 소문, 이라면……?”
“네가 주제도 모르고 로넨 대공께 꼬리를 쳤다면서! 너 때문에 내가 무슨 망신을 당한 줄 알아!”
오필리아의 반문에 카델리아가 버럭 소리를 쳤다.
밀레센트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이자, 지엄한 황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둘째 황녀 카델리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안 카를레 로넨.
로넨의 차가운 날씨처럼, 차고 단단한 흑검 같은 남자.
아버지가 결혼 상대로 그 누구를 데려와도 마음에 차지 않던 카델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버렸다.
외모도, 능력도, 심지어는 신분조차도 그는 제 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카델리아는 열심히 아버지를 졸라, 이틀 전의 연회를 마련했다.
이안과 이야기를 길게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분명 그가 자신에게 빠질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웬걸.
한껏 멋을 부리고 등장한 파티에서 카델리아는 이안의 머리끝조차 보지 못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안이 떠나는 자리에까지 배웅을 갔지만,
-만나 뵈어 즐거웠습니다, 카델리아 전하.
카델리아가 이안에게서 돌려받은 것은 오직 이 딱딱한 인사말 한마디와 가벼운 악수가 전부였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황제인 아버지가 은근히 자신과 그의 사이를 밀어 왔다.
카델리아는 이미 갖은 살롱에서 공석인 로넨의 공비 자리는 제 것이나 다름없지 않냐며 떠들었었다.
그런데, 이안이 이렇게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돌아가다니?!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떠나는 마차만을 바라보는 카델리아의 귀에, 누군가의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
-대공과 첫째 황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소문? 헛소문 아니었나?
-그저께 있었던 연회에서 둘이 몰래 밀회를 했다잖아. 본 사람이 꽤 있다던데? 그 붉은 머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에이, 그래도 로넨 대공 같은 분이 뭐하러 첫째 황녀를 만나?
-왜, 얼굴은 예쁘잖아? 그런 취향이실지도 모르는 거지. 둘째 황녀님만 우스운 꼴 됐네.
비웃는 소리가 카델리아의 심기를 쿡쿡 찔렀다.
처음으로 호감을 가졌던 상대가 제게 무관심한 것도 거슬리는데, 그 이유가 오필리아일지도 모른다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천출 황녀 따위가 어떻게 제 경쟁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된 파티용 드레스 하나 없는, 그 볼품없는 이복언니와는 동일 선상에 놓이는 것 자체가 수치인데, 뭐?
오필리아 때문에 제가 우스운 꼴이 됐다고?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있을 리 없다.
카델리아는 거의 울면서 소리쳤다.
“다들 떠들어! 너 때문에 내가 닭 쫓던 개가 됐다고! 난 심지어 그 소문을 대공님이 떠난 뒤에야 알았단 말이야!”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런 카델리아 덕분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차렸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봤던 건지.
‘내가 투신한 소문이 돈 게 아니라, 이안과 스캔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 거였군.’
그나마 별게 아니라서 다행인가.
스캔들이 아니라 소문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안이 딱히 그 소문에 대해서 첨언을 한 건 아닌 듯싶었다.
그저 같은 자리에 있는 걸 본 사람이 소문을 낸 것이리라.
그리고 그 소문을 접한 카델리아가 길길이 날뛰는 거고.
‘그러고 보니 카델리아가 이안을 좋아했었지.’
오필리아는 문득 과거 자신의 결혼식 날, 카델리아가 위엄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난리를 쳤던 것을 떠올렸다.
물론 카델리아가 이안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네가 내 모든 걸 망쳐 놨어!
오필리아의 몫이었던 정략결혼이, 카델리아에게로 넘어간 것.
카델리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남자도 빼앗기고, 오필리아의 몫이었던 결혼이 제게 넘어오니 오필리아가 미울 법도 했다.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는 당시 꽤 기분이 좋았다.
카델리아가 갖고 싶어 했던 것을 갖지 못했던 적은 없었고, 자신은 그 반대의 상황이 훨씬 많았으니까.
이렇게나마 카델리아를 이겼다는 사실이 괜히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필리아의 싸늘한 시선이 악담을 퍼붓는 카델리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