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문제는, 지금 여기는 황궁이라는 것이다.
이안이 오필리아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아야 할 시기.
“……아니요.”
뭔가 이상하다. 오필리아는 도망치듯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안의 표정에 일순 감추지 못한 실망이 스치는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를 달래 줄 수 없었다.
기껏 이안 없는 삶을 살아 보기로 했는데, 여기서 흔들릴 수는 없으니.
나를 흔들지 마.
“……오필리아.”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당신의 구실이 되어 줄 사람이라면 조금만 눈 돌려도 많이 있을 테니.”
오필리아는 차갑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이 다급한 것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 * *
오필리아가 떠나고, 이안은 한동안 자리에 머물렀다.
“각하! 여기 계셨습니까!”
마니쉬가 결국 그의 멱살을 잡으러 올 때까지.
카델리아와 이안의 스캔들을 추진하기 위해 부단한 애를 썼던 마니쉬였기에, 그는 이안을 보자마자 펄펄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밀레세트에서까지 그러겠냐고! 그러셨으면서!”
“…….”
“각하를 믿은 제가 멍청입니다! 차라리 멍게를 부관으로 끌고 다니시지 그러십니까! 예?!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쇼!”
정말 멱살만 안 잡았다뿐이지, 기세만 보자면 이미 이안의 머리통은 성벽 앞에 효시되어 있대도 이상할 게 없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부슬부슬 웃으며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이안이 이상했다.
옆에서 아무리 닦달을 해도 얼빠진 놈처럼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모자라서,
“그런데 첫째 황녀가 연인이 있던가?”
이런 질문이나 하고 있고.
우리 각하가 드디어 미치셨나?
마니쉬는 제 귀를 의심했다가, 금세 결론을 내렸다.
“카델리아 밀레세트는 둘째입니다. 제가 옆에서 그렇게 설명했는데 다 잊어버리신 거죠?”
“오필리아 밀레세트. 종신직 시녀 태생 첫째 황녀.”
“……설마 그쪽에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겠죠.”
마니쉬는 이안이 평소처럼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아니.”라고 해 주기를 바랐지만,
“오늘따라 왜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주 묻게 되는군.”
세상일이란 게 원래 그리 녹록지가 않다.
눈도 입도 도저히 닫히질 않아 떡 벌린 채로 굳어 버린 마니쉬를 두고, 이안은 제 왼손을 기울여 보았다.
“첫째 황녀가 나가는 걸 보고 따라와 봤거든. 그쪽에서는 날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무심한 그의 시선이 제 왼손 약지를 덧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필리아가 떠나기 전 그녀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던 반지를.
이안이 그녀를 붙잡지 못한 건 순전히 그 반지 때문이었다.
‘나와 같이 있기 싫다는 내색은 다 하면서.’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는지.
만약 오필리아가 이안의 제안에 쉽게 응했더라면 하룻밤 호기심에 끝났을지도 모를 흥미였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자신과 있는 게 불편해 죽겠다는 내색을 하는 사람을 붙들고 있는 취미는 없었다.
그러나.
-멱살 잡히기 싫어서 당신을 붙잡는다고 하면…… 충분한 용건이 될까.
이안이 그녀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냈을 때 보였던 얼굴.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여, 그녀 스스로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 낯이.
“다시 보고 싶어졌어.”
* * *
오필리아는 이안에게서 도망쳐, 무작정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아니, 뛰었다. 도망치는 이가 감히 느릿느릿 걸을 수는 없었을 테니 뛰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터였다.
모든 밤 그림자가 제 치맛자락 붙드는 손이기라도 한 것처럼, 발이 완전히 땅에 붙을 틈도 없이.
그러다 문득 숨이 차올라 고개를 들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 있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 길 잃은 견습 시녀가 가끔 우연히 발 들일 때가 아니라면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제 궁.
궁이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방도 몇 개 되지 않는 단출한 건물.
로넨의 공비가 된 이후로는 겪어 본 적 없는 초라함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초라함이 위안이 되는 것은 왜일까.
오필리아는 너무 오랜만이라 이젠 생소하기까지 한 건물로 비척비척 들어갔다.
기름칠이 되지 않은 문을 요란하게 열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지듯 풀썩 몸을 묻었다.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왜.’
대체 왜 이안이 내게 이러는 걸까.
왜 이제 와서…….
물론 오필리아 또한 알고 있다. 지금의 이안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다면 세상에 복수자는 없었으리라.
로넨 공국에서 지냈던 첫 1년, 실어증을 앓은 적이 있다.
기억하기로는 그때가 가장 끔찍했다.
냉랭한 반응에 익숙한 오필리아에게도 로넨 성의 텃세는 숨 막히는 수준이었으니까.
이불에 숯 검댕을 묻혀 두고, 오필리아가 먹지 못하는 향신료를 들이부은 음식들을 내어놓는다거나.
이런 것들은 차라리 괜찮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족을 붙이는 반응들이었다.
“아, 공비님은 제국에서 오셔서 이런 수준 낮은 문화에는 어울리기 힘드신가 봐요.”
“로넨은 다 이런 옷을 입어요. 제국의 황녀님이 입기에는 격이 떨어지나요?”
“여기는 공주님 투정 들어줄 사람 없어요. 약한 소리 좀 그만하세요.”
“하녀 태생이라더니, 잡일은 또 못하시네요.”
낯선 것에 어색해하면 제국 출신이라 그렇다고.
적응하기 힘들다고 하면 황녀라 곱게 자라서 그렇다고.
실수라도 하면 사생아라 수준 떨어지는 건 못 속인다고.
그렇다고 잘했을 때 돌아오는 소리가 고왔던 것도 아니다.
제국민들은 다 야박하고 독하다더니, 꼭 그렇다고 수군댔다.
황녀로 태어나 좋은 교육 받고 자랐을 테니 이 정도는 못 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했다.
태생이 반쪽짜리면 능력이라도 변변해야 봐줄 만하지 않겠느냐고.
처음에는 한두 개의 수군거림이었지만, 여론이라는 게 으레 그러하듯 성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위에서 바로잡아 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시종장과 하녀장은 이를 묵인했다.
오필리아에 대한 이안의 냉대를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끄는 이 없으니 불씨가 죽을 리 있나.
공비 자리를 노리던 기득권층은 오필리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성안의 사람들은 외국인 공비를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상황.
목이 졸린 오필리아가 마지막으로 붙든 것은 결국, 다시 이안의 소매였다.
잡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당시의 오필리아는 이안을 믿었다.
아무도 가치 두지 않던 오필리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던 그의 진심을 믿었다.
당시 그 누구에게도 마음 열지 않던 오필리아의 빗장마저 풀어 버린 것이 이안이었으므로.
그렇게 열렬히 제게 다가와 놓고,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이안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좋은 사람이 언제까지고 좋은 연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리 알았어야 했다.
자신을 피하는 이안을 만나기 위해 종일 방 앞을 지킨 날.
“오필리아. 내 방 앞에서 기다리는 것 좀 그만하지. 사용인들이 난감해한다는군.”
오필리아는 결국 폭발했다.
“그럼 당신이 날 피하지 않으면 될 일이겠네요. 내가 당신 방 앞에서 종일 서 있었는데 내 걱정은 안 해요?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몰라요?”
“오필리아.”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물러설 곳 없을 때 내 손을 잡아 주겠다면서. 청혼하면서 했던 말은 다 잊어버렸어요?”
설움이 목구멍을 치받고 날뛰었다. 삼킨 말들이 부피를 키워 호두라도 통째로 삼킨 것처럼 목울대가 아팠다.
이안, 당신이 없는 동안 당신 친지들이 날 둘러싸고 폄하했어.
남편 없이 타국 사교계에 첫걸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다들 내가 실수 하나만 하길 바라. 내가 접시 하나만 깨트리면 당장 참새들이 모여서 입방아를 찧을 게 뻔히 보이잖아.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구하지 않은 게, 그렇게나 중요해?
내가 이렇게나 사각에 몰려서 당신 하나만 찾는 게 보이지 않는 거야?
날 사랑한다며, 이안.
제발 대답 좀 해.
제발!
“……그만. 그만해.”
아.
“……이안.”
“피곤하게 굴지 마. 당신하고 오래 말할 기분 아니니까.”
내가 지금 땅을 딛고 서 있는 게 맞을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으로, 오필리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하지. 말해 봐.”
“시종장과 하녀장을 바꾸고 싶어요.”
“성안의 일은 당신에게도 권한이 있는데, 왜 그걸 내게 청하지?”
“그들이 당신의 허가 없이는 직위를 교체할 수 없다고…… 했, 는데…….”
거짓말이었구나.
깨달음에 혀가 점점 굳어갔다.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라도 된 심정이었다.
저 말을 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이 또 얼마나 아프게 느껴지는지.
황망하게 굳어 있는 오필리아를 두고, 이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로넨에는 아는 사람도 없지 않나. 둘을 해임한다고 해도 다시 고용할 사람이 없으니 내게 먼저 말을 전하라 했던 거겠지.”
그랬을 리가.
“당신이 뭘 하든 간섭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 이런 일은 당신 선에서 끝내.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종일 기다리다니.”
“나, 난, 당신하고, 이야기를……!”
“하. 오필리아. 어차피 난 당신에게 정략결혼의 일종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