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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화 (5/118)
  • 제5화

    “무엇을?”

    “제 기억을 어떻게 찾아 주시겠다는 건지.”

    “아, 미리 말하지만 나는 찾아 주겠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지금 저랑 장난하시는 겁니까?”

    “끝까지 들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죠, 나는. 당신의 기억을 찾아 줄 만한 이를 알아요.”

    대화가 격랑 맞은 배처럼 오르내린다.

    알레이는 불현듯 이 여자와 있는 이 찰나에 몇 번이나 심장을 떨어트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격랑을 맞아도 대화는 나아갔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거짓말쟁이는 아닌 것 같고…….’

    정말로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백색에 가까운 알레이의 속눈썹이 느슨해진 눈꺼풀을 따라 내려와 뺨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조각 같은 뺨에 눈물 자국 같은 길들이 생겼다.

    꼭 그만큼 음울한 낯으로 알레이는 이어 물었다.

    “제 기억을 찾아 줄 만한 이는, 저를 아는 사람입니까?”

    “글쎄요.”

    그리고 다시 인상을 썼다.

    그러나 알레이의 인상이 얼마나 구겨지던, 오필리아는 태연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지금 전부 꺼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제게 진 빚을 갚으시겠다더니.”

    “정말로 그 이유만 있겠어요, 설마.”

    조금 전 저녁놀 일렁이듯 웃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오필리아의 표정은 꼭 그 목소리만큼이나 고요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낯인데도, 시선이 맞닿을 때면 알레이는 어쩐지 그녀가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조금 전 발코니에서 그토록 과감히 몸을 던졌던 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저 태연함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자꾸 들었다 놓는 저 목소리에 담긴 관조 때문일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창해를 닮은 여자의 새파란 눈이 자신을 향했을 때, 그는 깨닫고만 것이다.

    “모레면 라딘으로 떠나죠. 라딘에서 다시 봐요. 그때 알려 줄게요.”

    그 무심한 시선에 의아할 정도로 담긴 호의를.

    아주 오래된 지인에게 보이는 것 같은 친밀함과, 그리움 따위가 섞인 호의.

    새파란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

    그 앞에서 무슨 의심이 소용이 있을까.

    “……하.”

    알레이는 결국 인상을 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겠습니다. 한갓 말단 마법사 따위가 황녀 전하께서 하신 말씀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잘 달아 놓고는.”

    “그땐 몰라서 그랬다고 하죠.”

    오필리아에게로 성큼 다가간 알레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손바닥 위에는 똑같은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협박입니다.”

    오필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여 그를 올려다봤지만, 알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필리아에게 손을 청했다.

    헐렁하던 반지는 오필리아의 손에 들어가며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딱 맞게 변했다.

    “라딘에 가서 빼 드리죠.”

    “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반지 위로 태연히 입 맞춘 알레이가 숙였던 고개를 세웠다.

    무감해 조각상 같던 낯을 찡그려, 사납게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지금 전부 꺼낼 생각은 없으니까,”

    양해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다시 말하지만, 알레이는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 * *

    알레이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오필리아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반지라니.’

    그것도 뺄 수 없는 반지.

    알레이가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완전히 제가 했던 걸 돌려받은 꼴이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오필리아는 알레이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오필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반지 낀 손을 내렸다.

    중요한 건 그의 기억을 찾아 주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알레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순전히 알레이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이 꿈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안 순간.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필리아는 생각했다.

    ‘여기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안을 만나기 전, 오필리아의 삶에는 미래가 없었다.

    늙은이에게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도무지 나아질 낌새가 없었던 인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안과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면, 원래 예정되어 있던 대로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대륙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밀레센트 제국의 황녀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힘들 테니까.

    하지만, 대륙을 벗어난다면?

    그 어떤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외부와는 교류조차 거의 없는 곳으로 떠난다면?

    그런 곳이 있나?

    있다.

    바다 한가운데, 허가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결계로 둘러싸인 곳에…….

    “오필리아 밀레센트.”

    오필리아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면, 그녀를 망가뜨린 얼굴이 있다.

    “내 기억이 맞았군. 잘못 본 것도 아니고, 무사하니 다행이야.”

    저 웃음기 어린 낯.

    자신을 사랑했던, 자신이 사랑했던 낯…….

    “……로넨 대공.”

    눈이 마주쳤던 건, 착각이 아니었구나.

    착각이길 바랐는데.

    하긴, 언제는 세상이 제 편을 들어주었다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지.

    그나마 울지 않으니 다행이다.

    오필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제게 가까워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밝은 눈. 밤을 욕심껏 집어삼킨 그는 어린아이 울리기에 딱 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알고 있다.

    “나를 아나?”

    그가 미소 지을 때면 날카롭게 벼려진 저 낯이 봄볕보다도 상냥해 보인다는 것을.

    사나워 보이는 저 인상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다정한 그의 일면을.

    “……모를 리가요. 오늘의 귀빈이신데.”

    “그거 영광이군. 연회장에서 당신이 내게 말을 걸지 않기에 모르는 줄 알았거든.”

    지난 생에는 없었던 대화. 오필리아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숨을 죽였다.

    “제가 말 걸길 기다리기라도 하셨나요?”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실제로도 과거의 이안이 오필리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라딘에서부터였다.

    오필리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으리라.

    ‘처음부터 사실을 알았더라면 얽힐 일조차 없었을 관계라는 거지.’

    새삼 되새기자니 입맛이 쓰다.

    하필 운 나쁘게 거기서 이안과 눈이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마주칠 일은 없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이다. 탓하려면 괜히 뛰어내려서 이안을 여기까지 부른 제 탓을 해야 할 터였다.

    어차피 이안은 제 투신에 놀라서 와 봤을 게 뻔하니까.

    괜히 더 얽히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자.

    오필리아는 작게 숨을 내쉬며 가볍게 묵례했다.

    “……어쨌든, 신경 써 주신 점 감사합니다. 발코니에서 사람이 뛰어내렸으니 놀라셨을 것도 이해해요.”

    “놀라긴 했지. 여긴 죽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니까.”

    “예상하신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저는 보다시피 무사하니, 용건이 없으시다면 먼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이안이 자신을 붙잡을 리 없다. 오필리아는 건조한 낯으로 물었다.

    “나와 있는 게 퍽도 귀찮다는 얼굴이군.”

    그리고, 이안은 눈치가 빨랐다.

    사실 지금 오필리아의 태도는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기는 했다.

    대놓고 자신과 상종하지 않으려는 기색이니.

    ‘처음부터 내가 그쪽을 기다릴 이유는 없다고 한 것도 그렇고…….’

    그녀의 말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부관이 옆에서 하도 황실 주요 인사들 초상을 들이대며 인적 사항을 읊어 대니 귓등으로나마 기억할 뿐.

    먼발치에서나마 본 첫인상은 무던했다.

    ‘저런 붉은 머리도 드문데.’

    마니쉬가 열심히 들이댔던 초상을 상기하면, 화가가 인물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굳이 관심 가질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안은 안다.

    그것이 실제로 맞기도 했고.

    이안이 오필리아를 따라 온 이유는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발코니의 문이 닫히기 전에 마주쳤던 그 시선이.

    제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아서.

    그 시선을 다시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마니쉬에게 멱살 잡힐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연회장을 빠져나온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에서 본 여자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무심한 시선. 무심한 말투.

    처음 느꼈던 흥미가 무색할 정도다.

    저렇게 자리를 뜨고 싶어 하니 그냥 보내 줄 법도 하지만, 이안은 드물게 비뚤어진 대답을 했다.

    “내가 먼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리 묻는지 모르겠군.”

    “부관과 함께 오지 않았던가요?”

    “그것도 알고 있나?”

    “사람이 그렇게 모여 있는데 머리 검은 사람은 둘뿐이었으니까요.”

    북방계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로넨 공국의 대부분이 검은 머리라는 점을 짚은 것이다.

    “부관이 꽤 깐깐해 보이던데요.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겠어요?”

    “사람 보는 눈이 좋군. 목소리 들릴 거리도 아닌데 바로 알아보고.”

    “예상이었는데 맞았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사람 보는 눈이 좋다기보다는, 오필리아가 이안의 부관을 정말로 알고 있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안이 왜 자꾸 말을 거는지 모르겠다.

    태연히 대화하고 있지만 오필리아의 속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이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안의 목소리가 친근해질수록.

    “당신 말대로 그놈이 보통 깐깐한 게 아니긴 해. 지금 들어가면 분명 어딜 그렇게 나다니냐며 멱살을 잡을걸.”

    과거 그가 제게 했던 달콤했던 말과 날카로웠던 말들이 일제히 제 속을 난자한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던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의 남자가 시선을 맞댔다.

    “그래서 말인데, 오필리아.”

    불안이 엄습했다.

    “멱살 잡히기 싫어서 당신을 붙잡는다고 하면…… 충분한 용건이 될까.”

    오필리아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라딘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그가 꼭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필리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올 때의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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