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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4화 (4/118)
  • 제4화

    알레이, 스물여덟.

    기억하는 거라곤 오직 제 이름과 나이뿐인 황궁의 말단 마법사.

    그가 기억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마탑의 주인일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오필리아를 포함해서.

    그녀가 알레이를 처음 만난 건 라딘에서였다.

    오필리아와 함께 좌천되어 감찰 인원에 포함되었다는 그는, 여러모로 기묘한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기억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 그러했다.

    물론 그가 스스로에 대해 체득한 자잘한 정보가 몇 가지 있기는 했다.

    예를 들자면 알레이의 철자 하나를 세로로 휘어 쓰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동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거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기억만 말끔하게 지워진 부자연스러움으로 미루어 보아 기억 상실은 사고가 아닌 어느 마법사의 소행이라는 것 정도.

    알레이는 당시 이 말을 하면서 멋쩍게 뒷머리를 쓸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어마어마하게 나쁜 놈이었던 모양이지요.

    -기억을 되찾고 싶지는 않아요?

    -없다고 불편하진 않으니까. 간절하진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서재에 기억과 관련된 마법 서적이 가장 많이 꽂혀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을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오직 기억상실증 뿐은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마법 실력이었다.

    그는 라딘에 오자마자 쌓인 민원들을 전부 처리했는데, 오필리아가 아무리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그건 결코 말단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면, 개중에는 지나치게 파도가 높아 출항할 수가 없는데,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도 있었다.

    오필리아가 알기로 마법으로 파도를 조율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염력으로 위에서 바다 일부분을 억누르거나, 해류를 건드려 그 일대를 잠재우거나.

    물론 둘 모두 쉬운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전자가 후자의 몇 배는 쉬웠다.

    그러나 바다를 억누르는 것마저도, 중급 마법사의 하루치 마력을 탈탈 털어 써야 가능했다.

    오필리아는 예전 둘째 황녀 카델리아의 생일연이 있었던 호수에서, 안전하게 뱃놀이를 할 수 있도록 호수를 염력으로 짓누르기 위해 동원된 중급 마법사들이 두 손을 넘어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레이는 달랐다.

    높은 방파제마저 전부 삼킬 듯 매서운 파도가 이는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무언가 가늠하는 듯 손을 벌려 보더니 순식간에 파도를 잠재웠다.

    당시 그의 상관으로서 함께 바다에 갔던 오필리아는 그 광경을 보고 물보라에 맞아 쫄딱 젖은 모양새로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한 거예요?

    -뭘 말씀이십니까?

    -그, 파도요.

    -꼬인 해류를 좀 풀어 줬습니다. 앞으로 한…… 3일은 멀쩡할 겁니다.

    -해류를 풀다니, 그게 가능해요? 왜 염력으로 누르지 않고……?

    오필리아가 어안이 벙벙해 물었지만, 알레이는 오히려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염력으로 누르면 배가 뜰 때까지는 계속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요. 이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해류를 움직인다는 것은, 물살을 염력으로 밀어낸다는 것과 같다.

    작은 강이나 호수라면 또 모를까, 이 거대한 바다의 물살을 밀어낸다니.

    오필리아의 상식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제 방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알레이는 그 이후로 열다섯 건의 민원을 더 처리하고도 본인 숙소로 유유히 걸어 돌아갔다.

    그 어마어마한 실력으로 말단이라니.

    오필리아는 처음에 의아해했으나,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억 상실증 때문에 출신을 모른다는 이유로 주요 보직을 배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말단으로 빠지고 나니 매번 지방만 도느라 승진할 기회가 사라지기까지 하고.

    지극히 혈통주의, 출신주의로 이루어진 황실다웠다.

    그래서일까.

    알레이는 빈말로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귀찮은 일이라면 딱 잘라 거절하길 좋아했다.

    쉽게 말해 괴짜.

    처음엔 오필리아도 그 꾸밈없는 언사에 여러 차례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자 오히려 그 성격이 편해졌다.

    적어도 그는 오필리아를 두고 이러니저러니 떠들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알레이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인 탓도 있긴 했다.

    알레이가 오필리아의 일에 먼저 말을 얹었던 것은 단 세 번.

    첫 번째는 오필리아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두 번째는 공비가 된 오필리아가 이안의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을 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없다고 우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오필리아.”

    “그럴 일 없어요.”

    그가 오필리아를 떠날 때였다.

    “벌써 눈물 구멍 두 개 뚫린 공비님 베갯잇이 눈에 선한 것 같은데, 정말 아닙니까?”

    “정말 아니에요. 당신이 어디 잡혀가는 것도 아니고. 기억도 되찾고 출세해서 간다는데 왜 울어요.”

    “확실히, 말단 마법사에서 마탑주면 출세 많이 했습니다.”

    알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하더니, 꼭 같은 말투로 재차 당부했다.

    “울지 마세요.”

    왜였을까.

    당부하는 그의 얼굴이 오히려 울 것 같이 보였던 것은.

    그는 분명 오필리아와 데면데면했지만, 썩 나쁘지 않은 지인이었다.

    우연인지, 오필리아가 절벽에 몰렸을 때면 꼭 곁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신세 많이 졌지.’

    그가 있어서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계속 있었더라면 좀 나았을까.

    비늘을 삼키겠다는 무모한 선택까지 몰리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다.

    어차피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으니.

    “구해 줘서 고마워요.”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품에서 내려와, 늦은 감사 인사를 했다.

    지금의 일과 과거의 일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부 담아서.

    물론 눈앞의 상대가 그런 것까지 알 턱은 없지만.

    알레이의 금안이 의아함에 가늘어졌다.

    “투신이 아니라 실족이었던 겁니까?”

    “투신 맞아요.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뿐이고요.”

    그리고 심경의 변화를 당신이 만들었지.

    오필리아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기며 시선을 들었다.

    집요하리만치 그녀에게 꽂혀 있던 금안과 눈을 맞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의심 많은 눈동자를 보며, 오필리아는 입을 열었다.

    “빚을 졌으니 갚을게요.”

    “……목숨값 받을 작정으로 구한 건 아닙니다.”

    “내가 뭘 갚으려는지 안다면 분명 받고 싶어질걸요.”

    “대체 뭘 갚으시려기에,”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 내가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뭐?”

    굳어진 알레이의 표정을 보며, 오필리아가 미소 지었다.

    저녁놀 일렁이듯 느리고 옅은 미소.

    “말했잖아요. 받고 싶을 거라고.”

    * * *

    제 기억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알레이는 이 명제가 너무 생소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곱씹었다.

    기억을 잃고 황실의 말단 마법사로 취직해 살아온 것이 벌써 3년째.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저 자신에 대한 정보만이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기억이 없다고 멍청해지는 것은 아니므로, 알레이는 곧바로 알아챘다.

    필히 누군가의 소행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제법 희망적이었다.

    지내다 보면 제 옛 지인 한 명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를 알아보기는커녕, 어딜 돌아다녀도 그의 이름조차 들어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옛 지인을 찾는 걸 포기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알레이.

    제 이름이 그렇게나 민들레 홀씨 흩어지듯 아스라한 발음이 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뭐야, 날 압니까?

    -아마도요.

    자신이 하늘에서 도대체 뭘 받아 낸 건지.

    어디의 영애냐며 모르는 척했지만, 알레이는 눈앞의 상대를 알고 있었다.

    밀레센트의 첫째 황녀 오필리아.

    새롭게 발령받은 근무지의 감찰관으로, 따지자면 그의 상관이 될 사람.

    그리고 바꾸어 말하자면 말단인 알레이와는 접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다는 걸까.

    아니, 애초에 왜 자신에게 이러는 거지.

    차라리 제가 이런 말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음영이 깊게 물든 알레이의 눈가가 혼란에 일그러졌다.

    “……장난이라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장난이라니.”

    “말단 따위에게 관심 가져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만, 저는 황녀님과 달라 그렇게 놀아날 여유가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오필리아의 눈이 둥글어졌다.

    “아까는 영애라고 잘만 부르더니, 연기였나요?”

    “별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부정도 않는군요. 당신답네요.”

    말투가 거슬렸다. 자신을 잘 안다는 듯해서.

    “그래도 날 믿는 게 좋을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알레이. 내가 왜 굳이 당신을 두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말마따나 말단인 마법사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서.”

    말이 거슬렸다. 반박할 수가 없어서.

    “믿는 것은 당신 자유예요.”

    높낮이가 크지 않은 조곤조곤한 목소리. 저것마저도 거슬렸다.

    암초에 앉아 뱃사공들의 난파를 유도한다는 마물의 노랫소리처럼 유혹적으로 느껴져서…….

    “강에 물 붓는 게 재밌다면 계속하세요. 굳이 말리지 않을 테니.”

    “……그럼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알레이는 결국 암초에 배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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