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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3화 (3/118)

제3화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오필리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이게 꿈도 환각도 아니라면, 어떡하지.

정말로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떨어진 이후 닥칠 고통이나,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쯤은 인어의 비늘을 입 안에 넣을 때부터 그녀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주어질 기회가 두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안을 만났을 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웠다.

아무리 지친 사람도 새로운 기회 앞에서는 망설이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안은 오필리아에게 첫사랑이었다.

처음 가진 애정이었고, 처음 가진 행운이었다.

만약 오필리아가 이안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언젠가는 결국 정략결혼으로 팔려 갔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같은 상황이 왔을 때 과연 자신이 이안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필리아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안이 제게 고백했던 날을 기억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오필리아가 처음으로 사람을 마음에 들인 날이었으니.

이안과 오필리아의 스캔들을 두고 사람들은 오필리아가 먼저 고백했을 거라며 왕왕 떠들어 댔지만, 그거야말로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필리아는 이안을 해변에서 데려온 뒤, 그를 내내 피해 다녔으니까.

그녀는 이안과 제 이복동생 사이에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얽혀 괜히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초야에 묻혀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은 날이 있었다.

아니, 밤이 있었다.

허옇게 소금기 일은 밤.

해변가 암초에 앉은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파도 밀려오듯 부드럽게 호명했다.

“오필리아.”

해풍이 그의 머리칼을 헤집고 갔다. 오필리아를 향한 시선이 오롯했다. 그의 은안은 달빛 아래서 언제고 등대처럼 빛이 났다.

오필리아는 호명에도 대답 없이 등불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함빡 휘어지는 눈웃음이 아름다웠다. 그는 샹들리에 불빛보다 윤슬 잡아먹은 파도 위에서 더 돋보이는 남자였다.

“여기 있으면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당연하죠. 소등하러 갔더니 자리에 없으면 찾아야 하잖아요.”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성내는 통금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나오는 누군가를 잡아가지 않으면 내일 경비대 얼굴을 봐야 할 테니까요.”

남자가 웃었다. 모래 까뒤집히듯 성긴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몰래 나오지 않으면 당신과 단둘이 있기는 힘들잖아. 내 보호자 신분이면 좀 더 챙겨 주지 그래.”

“첫째, 제가 각하의 보호자가 된 건 어디까지나 제 신분이 이곳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에요. 둘째, 단둘이 있기 힘든 게 아니라 제가 각하를 피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나요?”

“왜 안 해. 진즉 했지.”

“……그런데도, 굳이?”

“그래, 굳이.”

해풍이 그의 미소마저 지워간 건지, 그는 웃음기가 거의 걷힌 낯으로 무릎에 턱을 괴었다.

시선이 오필리아를 떠나 해변으로 향했다.

“오필리아, 밤에 바다로 나온 적 있나?”

“아뇨, 없어요.”

애초에 오필리아는 라딘에 와서야 바다를 처음 보았다. 이안은 놀라지도 않고,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불렀어. 이런 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민들레 홀씨 같은 것들이 그의 손에서 날아가, 바다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 하나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등불이 무색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거야. 마정석 가루에 반응하는 것들인데, 이렇게 맑은 날에는 꼭 꽃밭처럼 보이거든.”

등불이 무색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왠지 멋쩍어 보였다. 오필리아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안이 부끄러울 때면 오히려 표정이 굳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할 수 없었다. 아니, 몰라야 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기대지 않는 것.

그것이 오필리아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빗장이 허물어질 때가 있다.

예고 없는 친절이 해일처럼 몸을 덮칠 때.

푸른 물결 위로 핀 하얀 꽃밭을 마주했을 때.

“당신에게 이걸 보여 주고 싶었어.”

이 꽃밭을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며, 낯을 붉히는 이를 보았을 때…….

“……왜요?”

오필리아는 무심코 반문하고, 바로 후회했다.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갔어야 했는데.

“왜겠어?”

그러나 후회를 곱씹기에는, 마른 파도처럼 웃고 있는 이안의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살짝 붉어진 낯, 찡그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정도로 어렵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

그리고 자신을 향한 그 오롯한 시선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 말은 그간 오필리아가 애써 이안을 피해 온 시간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안은 오필리아가 수년간 단단히 걸어 둔 빗장을 어렵게 풀었다.

그때의 이안은 알고 있었을까? 여는 것은 어려웠어도 훗날 저버리기는 쉽다는 사실을.

차라리 그렇게까지 제게 사랑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마음이나마 편했을 텐데.

이제 와서 당시 이안의 마음이 거짓이었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것밖에 안 되는 감정이었던 거다.

그리고 제게는 그것밖에 매달릴 기억이 없고.

그래서 오필리아는 내심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아니면 환각이기를.

악몽처럼 추락과 함께 막힌 숨을 터트리고 침대에서 눈 떴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꿈이 아니라면, 그냥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괜찮았다.

그러기 위해서 인어의 비늘을 삼켰던 게 아닌가.

닥칠 고통은 아무래도 좋았다. 과거로 다시 떨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물론 발코니에서 떨어진 이후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여기가 꿈속인 탓이 아니었다.

오필리아는 땅에 닿지 못했다. 누군가가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 낸 탓에.

제 몸을 움켜쥔 손이 뜨겁다. 맞닿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플 정도로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이, 추락에 바짝 졸아든 몸이 온 신경을 깨워 그녀의 생존을 알리고 있었다.

살았구나.

“살다 살다 하늘에서 여자를 다 받아 보겠네…….”

황당한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채여 숨 돌릴 새도 없이 고개를 들면, 기억 속에 묻은 얼굴이 있다.

상대를 단숨에 알아본 오필리아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당신과 처음 만났던 건 분명 라딘에서였는데.

오필리아는 자신을 안아 든 남자의 이름을 멍하니 주워 담았다.

“……알레이.”

그러자 남자의 한쪽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뭐야, 날 압니까?”

“아마도요.”

남자는 오필리아에게 인어의 비늘에 대해 알려 준 장본인이었다.

라딘에서 만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로넨 공국까지 함께 했던 마법사였고.

로넨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겨우 붙들게 해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알레이.

당신은 왜 매번.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필리아. 당신은 후회할 거라고.

왜 매번 내가 죽고 싶을 때마다 내 앞에 나타나서…….

-공비님. 이 삶을 부정하기 위해 목숨을 저울에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결국 당신이 맞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필리아는 자신이 한참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곳이 꿈도 환상도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필리아가 느꼈던 것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안도였으니까.

그녀는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기에 오필리아는 너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새로운 기회가 두려운 까닭은 변화를 맞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발코니에서 갑자기 투신한 영애까지 제 이름을 알다니 제가 제법 출세한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오필리아는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출세하다마다.

지금은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5년만 지나면 이 대륙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세계 유일한 마탑이 애타게 찾고 있는 마탑의 주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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