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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95화 (특별 외전 완결) (95/95)
  • 두 번째 신혼 95화

    “어? 박 팀장님.”

    세인이 알은체하는 남자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미소와 온도였다.

    그는 화훼 업체 박용운 팀장이었다. 세인의 호텔에 단기 납품 계약을 맺은 바 있었다. 용운은 언변과 매너가 좋은 이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네요.”

    “감사해요. 그렇지 않아도 전에 김 대표님 뵈었는데, 그때 함께 안 계셔서 궁금했어요. 많이 바쁘셨나요?”

    안부차 가볍게 물은 건데, 용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인은 어렵지 않게 그에게 깃든 불편함을 읽어 내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저 고향에 내려간 지 꽤 되었습니다. 두 달 정도 됐고요.”

    “그러셨구나.”

    “네. 잘렸거든요.”

    “유감이에요. 죄송해요.”

    “아뇨. 대표님이 뭐가 죄송합니까.”

    매끈하게 웃는 용운은 부당한 해고를 당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았으나, 그런 걸 캐물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말을 아꼈다.

    속된 말로 용운을 볼 때 뒤가 구리단 느낌을 종종 받았다.

    혹시 그와 관련된 건 아닐까, 넘겨짚으며 더는 마음 쓰지 않기로 생각을 마무리했을 때였다.

    “세인아.”

    마침 뒤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당기며 용운을 눈짓했다.

    “누구.”

    이한을 발견한 용운이 눈에 띄게 사색이 되었다.

    왜지? 세인이 의문을 품었다.

    누구냐고 묻는 걸 보니 서로 아는 눈치는 아닌데…….

    용운이 슬쩍 뒷걸음질을 치며 이한의 눈을 피했다.

    이한이 워낙 유명하니 알아볼 수 있다곤 해도 이런 반응은 조금 과하다고 여겼다.

    세인이 웃으며 이한을 보며 용운을 가리켰다.

    “이한 씨, 박 팀장님이라고 거래처 팀장님이셨어요.”

    “그래, 인사 다 나눴으면 이만 볼일 보죠.”

    세인이 민망할 정도로 이한은 용운에게 고개만 까딱여 내치듯 인사했다.

    반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용운은 급히 자리를 떴다. 도망가는 것 같은 모양이 어딘가 이상했다.

    세인은 미심쩍게 이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용운의 뒤꽁무니를 주시하는 이한에게서 정확한 연유를 읽을 수는 없었다.

    ***

    저녁은 예약해 둔 이탈리안 식당에서 이뤄졌다.

    세인과 단둘이 조용한 룸 안에서 식사하는 동안, 이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박용운 그 자식을 거기서 만날 줄이야.

    이한이 용운을 알게 된 건, 세인의 귀가가 늦은 어느 날 밤이었다.

    이한은 직접 세인을 데리러 회식 자리로 마중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용운의 개 같은 짓거리를 목격했다.

    술을 많이 마신 세인이 벤치에 앉아 쉬는 틈에, 용운이 그 뒤에서 그녀 몰래 머리칼을 쥐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용운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이한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다음 날, 박용운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이한이 직접 용운을 찾아가 전했다.

    용운이 세인의 손수건을 몰래 빼돌리는 모습, 세인의 차 주변을 얼쩡거리는 모습, 그녀가 마신 물컵을 가방에 넣는 모습 등.

    단 하루 만에 증거를 수집해 용운을 추궁했다.

    그리고 세인의 목소리를 녹음한 핸드폰을 눈앞에서 으깨 주었다.

    법적 해결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세인이 아는 건 원치 않았다.

    누구든 자기가 모르는 사이 그런 일이 벌어졌단 걸 알면 끔찍할 테니까.

    다신 눈에 띄지 말란 경고로 용운을 처리했는데, 백화점에서 마주칠 줄이야.

    이래서 불온한 것들은 싹을 자근자근 밟은 뒤 뿌리까지 뽑아야 했다.

    이한은 돌멩이 같은 파스타를 씹어 삼킨 뒤 슬쩍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세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이 있으면 청소해 왔으면서,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자 속이 켕겨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지금 세인의 눈빛이 모든 것을 내다본 듯 예리하게 이한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포크를 내려놓은 세인이 팔짱을 턱 꼈다.

    “서이한 사장님, 할 말 없어요?”

    이한은 입가를 닦고 물을 넘겼다. 모래를 탄 물을 마시듯 속이 따끔거렸다.

    박용운 그 새끼를, 죽일까.

    “있어.”

    “해요.”

    세인이 빙긋 웃었다. 대외적으로 짓는 저 미소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든지 가차 없어질 수 있는 여자란 것도.

    솔직해지면 제 무덤을 파는 짓이었으나, 세인을 이 이상 속이는 건 기만이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한은 세인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이 한 번의 기회를 마땅히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착해도 너무 착했으니까.

    “박용운 일이라면 그래, 내가 그랬어. 해고하도록 손썼어.”

    “왜?”

    “잦은 사내 성희롱 때문에 내부에서 조사가 나왔단 소리를 들었거든. 알아보니까 죄질이 좀 나빠야지.”

    세인이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을 했다.

    어째 꺼림칙하다 했더니 그런 쪽으로 쓰레기였던 모양이다.

    “조사하다 보니 횡령에 뇌물 수수에, 불법 겸업까지. 영업직이 아무리 편법을 다양하게 부린다지만 주변이 너무 더럽더라고. 자칫 호텔에 해가 될까 싶었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인이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결 좋은 머리칼이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이한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 건 이한 씨가 나보다 정보가 빠르니까.”

    “똥물 튀기기 전에 잘라낸 거야.”

    “좋아. 다음, 박 팀장 말고 또 있죠?”

    세인은 더 추궁하지 않고 이한이 용운을 의심한 걸 믿어주었다.

    이성 문제는 세인보다 이한이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고마워 이한은 묻어두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조금 열었다.

    “윤 부장, 김 관장, 성 원장, 이 부사장, 고 본부장.”

    이한의 입에서 술술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세인이 놀라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정말…… 정말이야?”

    “더 있는데 잔챙이까지 말해야 할까?”

    “잠시만요.”

    세인은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사실 그동안 조금 이상하다곤 생각했다. 방해꾼이나 느낌이 나쁜 이들이 그녀의 곁에서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이한이 이렇게까지 관여했을 줄이야.

    그간의 일들과 오늘의 일까지 조금 느낌이 싸해져서 떠본 건데, 이한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술술 이름을 읊고 있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이름이 더 있는 모양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그의 표정이 어둑했다.

    철저한 사람. 그러면서도 세인 앞에서 허술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이한은 어떻게 보면 여우 같았다.

    차라리 이한이 마음먹고 잡아뗐다면 세인은 알지 못했을 터다.

    일부러 이때다 싶어 잘못을 시인하는 그는 영악했다. 세인이 화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이런 거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요. 나랑 약속했잖아. 우리 전부 다 말하기로 했잖아.”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인이 앉은 자리까지 이동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썩은 것들 천지야.”

    “그래서?”

    “네가 괴로울 게 뻔해서 일부러 알리고 싶진 않았어.”

    이한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출신이 빈약한 세인에게 날을 세우는 자들은 많았다.

    물론 세인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는 시댁과 이한이란 든든한 배우자가 있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나, 은근한 무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기인한 추접한 신경전과 술수는 간혹 세인을 버겁게 했다.

    이한이 거론한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세인을 방해하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단순히 어느 순간 부딪히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티 안 나게 처리했어. 박용운은 유일하게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한 놈이라 오늘 나를 보고 얼어붙은 거고.”

    “비밀 만들지 않기로 약속한 거, 그걸 안 지킨 게 더 나빠.”

    “미안해. 하지만 또 이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못 해, 세인아.”

    이한이 낮은 곳에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그녈 향한 마음이 가득 고여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널 괴롭게 하는 일이 많아질 거야. 여기가 그런 곳이야. 그런데 나는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는 게 아니라, 몰라도 되는 걸 몰랐으면 해.”

    그의 방식이 옳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혹독한 길 위에 선 세인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이한의 도움이 필요한 건 맞았다.

    이제 와서 그의 도움을 뿌리치자니, 세인은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한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세인은 어쩌면 뒤에서 이한이 도와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설마 하는 느슨한 마음으로 넘긴 건, 뒤에서 닿는 도움을 어느 정도 묵인했단 뜻이었다.

    그의 사랑을 알고 있으니까.

    그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한동안 이한을 바라보던 세인이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웃었다.

    두 사람이기에 방식이 달랐고, 두 사람이기에 서로 끌렸으며, 둘이기에 하나가 되고 싶었다.

    세인은 이한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숙여 그의 코에 키스했다.

    “좋아. 당신 기준을 믿을 테니 적당히 해줘요.”

    이한의 눈가가 천천히 휘었다.

    “분부대로.”

    ***

    세인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화장실을 간 사이 옥외 주차장에 선 이한이 고개를 젖혔다.

    그녀를 지키는 방법엔 정답이 없었다.

    욕심대로 움직이면 세인이 싫어했고, 그녀의 세상이 흔들렸다.

    그러나 손에 쥐고 싶고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을 해갈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열렬히 사랑하는 수밖에.

    필요하다면 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애원해서라도 사랑을 받아낼 것이다.

    “이한 씨.”

    세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감겨들었다. 이한이 하늘을 눈짓했다.

    “저기 봐, 토끼 구름.”

    “구름?”

    “귀엽지 않나.”

    “귀여워요. 그런데 이한 씨가 구름 같은 것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어.”

    “네가 솜사탕 좋아하잖아. 몽글몽글한 것도 좋아하고.”

    세인이 웃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요? 티 안 낸 것 같은데……. 너무 어린애 같아서 민망해.”

    “구름을 안겨 주진 못하지만, 솜사탕은 사줄 수 있지. 할머니가 돼도 그건 해줄게.”

    아마 그때도 세인을 사랑하고 있겠지.

    이한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춘기 소년처럼 욕망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은 여유롭게 그녀를 보듬을 수 있을 거다.

    세인이 부단히 노력했던, 정혜인이란 불쾌한 덩어리를 위해 영혼을 쥐어짰던 그 세월이 과거에 있다면.

    이젠 세인의 웃음을 위해 이한이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날만 남았다.

    구름 하나에 미소 짓던 어린 세인에겐 의견에 동조해 줄 따스한 품이 필요했을 터다.

    이한은 비열하게도 세인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그들에 조금은 감사하며, 그녀의 유일한 위로가 된 것에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틀려먹은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이한은 멈출 방도를 몰랐다.

    깍지 낀 손에 차마 힘을 주진 못하고 세인을 제 곁으로 끌었다.

    “갈까.”

    ‘언니, 저기 구름 좀 볼래? 토끼 모양이야.’

    ‘넌 아직도 저런 게 좋니?’

    ‘언니 솜사탕 좋아하잖아. 몽글몽글한 게 솜사탕 닮았지?’

    그날, 이한은 어린 세인을 보며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혹시 너도 좋아하는 게 있냐고.

    그렇다면 내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나랑 같이 있을래.

    <특별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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