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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94화 (94/95)
  • 두 번째 신혼 94화

    “좀…… 과한가…….”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낯부끄러워 용기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본래 선명한 색감과 과감한 속옷을 선호하는 편인데도 그래도 이건 좀, 아니, 많이 그랬다.

    허벅지에 달라붙은 가터벨트는 속옷이라 말하기엔 끈에 불과한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의도 마찬가지였다. 뭘 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닌 건 확실했다.

    헐벗은 것보다 더 남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세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벗을까.

    우선 거울에서 눈부터 거뒀다.

    이한이라면 뭐든 예쁘다고 해줄 게 분명한데도, 아직은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욕심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괜찮을 거야.”

    이 속옷을 권한 점원의 말론 아주 인기가 많은 아이템이라고 했다.

    권태기를 극복하는 필수 요소가 바로 이런 것이라며 빠른 속도로 세인을 홀려 놓았다.

    결국 세인은 이와 같은 속옷을 다섯 벌이나 사버렸다. 그러니 지금 포기하면 남은 네 벌의 속옷도 옷장 행이 되고 말 터였다.

    오랜 경험으로 이한은 기뻐할 게 분명한데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세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실크 가운을 여미는데, 복도 끝에 긴 그림자가 얼룩졌다.

    커다란 형체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인이 잘 아는 듬직한 형태가 그녀에게로 가까워졌다.

    “이한 씨?”

    “거기 있었어?”

    “이한 씨, 일어났어요?”

    급히 다가온 이한은 조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던 거야. 드레스룸? 창고?”

    “찾았어요?”

    “그걸 말이라고.”

    이한이 참았던 호흡을 몰아쉬었다. 옅은 간접 조명 아래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세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취침 중에 세인이 사라지면, 잠에서 깬 이한이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요즈음 하도 평화로워서 이한의 불안감을 간과한 것이다.

    부부의 침실엔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밤중에 목이 마르거나 출출할 때, 세인이 침실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또한 욕실을 갈 땐, 중간의 불을 켜두고 움직였다. 그건 세인이 욕실에 있단 신호였다.

    이한이 찾지 않게, 이한이 놀라지 않게. 그게 부부간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수면 환경이 바뀌어 미처 이한을 배려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세인이 다가가 이한의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안쓰럽게 묻어났다.

    “미안해. 나는…….”

    세인이 울 것처럼 말하자, 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쥐며 웃었다.

    “괜찮아. 찾았으니까 이제 괜찮아.”

    볼우물을 보이며 애써 미소를 보이는 이한의 맨가슴은 여전히 가쁘게 오르게 내리고 있었다.

    사라진 아내를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였을 이한을 그려보면 가슴이 아픈 건 오히려 세인이었다.

    수영장에 세인이 빠졌던 그 예전의 일로, 아직도 이한은 그녀가 사라진 침대를 보는 걸 두려워했다.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두 사람을 갈라놓은 이별에 대한 불안감일 터다.

    “나 어디 안 가요.”

    “알아. 아는데…….”

    말을 끊은 이한이 어쩔 수 없는, 빠져나오지 못한 구덩이에 갇힌 것처럼 무력하게 말했다.

    “내가 미안해. 아직도 이렇게 겁이나 먹고 등신같이…….”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한 씨가 왜.”

    갑자기 없어지면 이한이 놀란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세인은 자책감에 입술을 씹으며 이한의 뺨을 어루만졌다.

    웃으려고 노력하는 이한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서로가 함께하지 못한 과거를 되돌릴 순 없었기에, 이렇게 종종 함께 상처를 발견했다.

    하지만 보듬는 것도 둘이 같이했다. 그래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한 씨, 나 봐요.”

    세인이 가운 매듭 끈을 풀어내자 이한의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실크 가운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그의 턱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거 보여 주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마음이 앞서서 이한 씨 생각 못 하고 자리 비운 거야.”

    “너…….”

    말을 잇지 못한 이한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는 걸까?

    “이상해요?”

    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을 때에 맞춰 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 줘.”

    “응?”

    “뒤돌아, 세인아.”

    평소 이한보다 약간 고압적인 말투였다. 말릴 수 없을 만큼 흥분에 도취된 그가 내는 목소리였다.

    세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그의 지시대로 뒤돌아섰다.

    그러자 작은 욕설이 세인의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세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튀어 오르듯 신음했다.

    이한이 갑자기 그녀의 골반을 잡으며 뒤로 몸을 꽉 맞붙인 터라 그 충격에 고개가 젖혀졌다.

    이한이 놓치지 않고 세인의 턱을 틀어쥐며 그 상태로 고갤 돌려 입을 맞췄다.

    난잡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부부이기에 자연스럽지만, 그래서 더 뜨겁고 은밀한 애정으로 서로를 탐했다.

    입술이 뜨겁다 못해 한껏 달아오른 열기가 식고 또다시 데워질 때까지.

    묵직한 양감이 세인의 좁은 입속을 꽉 틀어막아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세인은 그를 더 졸랐다. 채워 달라고,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주길 바라듯.

    머리가 터질 것처럼 과열되었다.

    “침대까지 못 가.”

    이한의 말에 세인도 동의했다.

    “이렇게 할래.”

    세인이 근처의 벽 아무 곳에 두 손을 붙이자 그가 시큰하게 웃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 거지.”

    세인은 그의 팔을 당겨 여유 부리는 이한을 부추겼다.

    후엔 늘 그렇듯 버겁게 그를 받아냈다.

    벗을 필요 없는 속옷을 젖히고 몸을 이어갔다. 이한이 속옷을 찢어버렸을 때 세인은 발끝을 겨우 지탱해 울고 있었다.

    그가 아랫배를 누르며 만족스럽게 탄식했다.

    “네 속에 살고 싶어. 그럼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그의 탁한 고백에 세인은 절정을 맞으며 흐트러졌다.

    젖은 바닥을 지나 침대로 이동했다.

    이한에게 안긴 몸은 걸음걸음마다 강한 자극에 움칠댔다.

    그럴 때마다 이한을 더 꽉 끌어안았고, 빠듯한 애정이 몸집을 불렸다.

    격한 밤이 계속되었다. 침대 시트가 주름져 반쯤 벗겨졌다. 이미 한 번 교체한 침대가 비싼 값을 하지 못하고 끼익끼익 출렁였다.

    세인의 작은 몸이 부서지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겨우 잠시 숨 돌릴 틈을 내어준 그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아 침대 밖으로 달아나는 세인의 발을 잡아 끌어왔다.

    “어딜 가. 그럴 기운 있으면 이리 와야지.”

    이한이 얇은 발등에 입을 맞추며 부추긴 대가를 톡톡히 갚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

    정오를 넘어서 깼다. 세인은 전신을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끙끙대다가 겨우 물을 한 잔 넘겼다.

    이한은 웬일로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하긴, 그에게도 바쁜 한주였다. 하루 수면 시간이 4시간도 되지 않는 이한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았다.

    남편이지만 그를 존경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관리에 투철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경영자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한의 볼을 쿡쿡 찌르고 살짝 돋은 수염을 손끝으로 가지고 놀았다.

    곧 잠에서 깬 이한이 한쪽 팔로 세인을 휘감아 제 몸 위로 올렸다. 그러곤 능숙하게 세인의 척추 주변과 허리를 마사지했다.

    아직 이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였다. 세인이 꿍얼거렸다.

    “이런다고 뭐 얼마나 나아지겠어요.”

    “아파?”

    “적당히란 건 모르는 건가요?”

    “어제 충분히 적당했어.”

    이한이 눈을 떴다. 당당함과 약간의 억울함으로 얼룩진 이한의 표정이 기가 막혔다.

    턱으로 그의 가슴을 콕콕 찌르던 세인이 웃었다.

    “왜.”

    “서이한 귀여워서.”

    “아침부터 세인아, 사람을 적당히…….”

    세인이 갑자기 느껴지는 무언가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더는 건강한 남편을 받아낼 여력이 더는 없던 터라, 세인은 슬금슬금 옆으로 움직여 일어났다.

    “커피만 마시고 식사는 나가서 해요. 오늘 백화점 갈래.”

    “그래, 그전에.”

    “아, 씻어야겠다.”

    혼잣말처럼 말을 흘린 세인이 침대를 재빨리 벗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지끈거렸으나 이한에게 붙들렸다간 2차전, 3차전까지 벌어져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야 쉰 목소리로 윤우와 정우를 데리러 갈 게 뻔했다.

    침실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인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짧은 비명을 지른 세인이 빠르게 도망쳤고 그 뒤를 이한이 웃으며 쫓았다.

    그녀는 뛰고 이한은 걷는데 어째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러다가 다쳐. 뛰지 마.”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그녀를 잡아 세웠다.

    “위험하잖아.”

    순간 넘어질 뻔하던 세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게 뭔 줄 알아요?”

    이한은 그 답을 아는 것처럼 곤란하게 웃었다. 그가 세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같이 씻을까?”

    세인은 절대, 절대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

    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백화점에 들를 수 있었다.

    부부는 보통 퍼스널 쇼퍼가 준비한 옷을 입기에 직접 쇼핑을 나서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한의 경우엔 사복까지 전담 쇼퍼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데이트 겸, 소소한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다.

    “조금 많나?”

    세인이 다섯 번째 구두를 포장하며 약간 머쓱하게 이한을 돌아보았다.

    “발목만 조심하면 돼.”

    “조심할 거야.”

    “말은 잘하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이한이 옅게 웃었다.

    어머, 하고 숙덕이는 직원들의 작은 탄식이 세인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한이 웃을 때 보이는 볼우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세인도 잘 아는 바라 그녀들의 감탄을 이해했다. 세인도 아직 이한이 웃을 때마다 심장이 고무공처럼 뛰어댔으니.

    “이제 당신 것 보러 가요.”

    당신이란 말을 잘 하지 않는 터라, 이한의 짙은 눈동자가 세인에게 가만히 내리 닿았다.

    세인은 모르는 체하며 그의 팔을 잡고 끌었다.

    이한의 손에 들린 수북한 종이 가방을 몇 개 달라고 손을 뻗었으나 그는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 마.”

    “그냥 이한 씨가 짐꾼 같아서 싫어요.”

    “그러려고 온 건데. 뭐든 사주고 짐 들어주고.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거야. 다음은 어디로 갈까.”

    “이한 씨 것 살 거예요. 넥타이 어때?”

    “잠깐.”

    이한이 이너 포켓을 더듬었다. 진동으로 해둔 그의 핸드폰이 열렬히 울리고 있었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받아요. 난 여기 둘러보고 있을게.”

    “금방 올게.”

    “응.”

    세인은 잠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비우는 이한을 두고 먼저 매장으로 향했다.

    이한에게 넥타이 몇 개쯤은 직접 골라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잘난 남편을 둔다는 건 어딜 가나 내 남자를 눈독 들이는 시선이 많다는 뜻이었다.

    세인이 사준 넥타이란 걸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의 목줄을 내가 채웠다, 안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유치해도 별수 없었다. 실제로 이한이 유부남이란 걸 알면서도 몸부터 들이미는 작자들을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많이 봐왔다.

    세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세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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