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93화 (93/95)
  • 두 번째 신혼 93화

    세인이 웅얼거리며 살짝 눈을 피했다. 이런 유치한 질투를 하면 분명 이한이 눈을 뒤집고 달려드니까…….

    두려운 반면 기대도 되고.

    “그냥 룸 하나 더 잡을까?”

    “좀.”

    “그럼 보내기 싫게 자꾸 이러면 안 되는 거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세인을 밀어 넣은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딱하게 인사했다.

    “조심히 가.”

    절절 끓을 땐 언제고 이럴 땐 또 냉정한 이한의 모습에, 세인은 공연히 아쉬워졌다.

    몇 시간 뒤에 집에서 만날 거면서도 왜 이리 떨어지기 싫은 걸까. 아직도 연애하는 것처럼 안달 났다.

    문이 닫히며 이한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 갔다.

    다급히 열림 버튼을 누른 세인이 다시금 열린 문밖으로 달려 나가 이한을 꼭 끌어안았다.

    “세인아, 진짜 환장하게 만들래?”

    “2초만.”

    “좋은 방법이 있어. 그냥 내가 백수 할게.”

    서로 바빠 시간을 나누기 어려워지자 이한은 말버릇처럼 백수가 되겠다고 했다.

    ‘내가 쉴게. 내가 내조할게.’

    이한의 말이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섣불리 이한이 가꾸고 일군 걸 내려놓게 할 수는 없었다.

    이한을 사랑하기에 그의 세상도 사랑했다. 이한이 세인을 지키듯, 그녀도 그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한쪽만 희생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고,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진짜 갈게요.”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세인이 되돌아서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한의 목울대가 유독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인아, 주말에 잊지 마.”

    “응. 너도 잊지 마.”

    세인의 반말에 이한이 조금 허탈하게 웃다가 마른세수했다. 그가 좁은 틈새로 사라지고 세인은 혼자 남았다.

    주말여행을 위해서 힘내야지.

    ***

    토요일 오후 6시.

    사무실에서 나온 세인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렸다.

    늦었어.

    세인은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로비를 가로지르다가 결국 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오늘과 내일, 이한과 단둘이 1박 2일의 여행을 계획해 놨는데 물거품이 되기 직전이었다.

    아이들은 시부모님께서 맡아주기로 해 이한과 보내는 오랜만의 시간이었는데, 오늘 아침 급한 호출을 받고 출근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한 게 지금 이 시각.

    세인은 미안함에 머리를 바삐 굴렸다. 지금이라도 떠나면 되지 않을까.

    여행지가 강원도 한적한 별장이기에 조금 서두르면 될 것도 같았다.

    뛰던 세인의 두 다리가 멈칫했다.

    회사 로비 한쪽, 익숙한 인영이 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한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한의 존재감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세인의 구두 소리가 다시금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한이 뒤돌아섰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세인이 급히 말을 꺼냈다.

    “미안, 미안해요.”

    “일은 다 끝났어?”

    “응. 다 마쳤어요. 언제 온 거예요? 계속 기다린 거야?”

    “한 시간 전쯤.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세인아, 뛰지 마.”

    이한이 미간을 좁히며 성큼성큼 다가와 세인이 뛰지 못하게 막았다.

    얼마 전에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염좌가 생겨 고생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신발장의 모든 하이힐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한이 모조리 치워 버린 터다.

    하이힐과 사업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못한 세인은 얼마 전까지 낮은 슈즈만 신어야 했다. 그냥 예뻐서 신는 건데.

    어쨌든 겨우 사들이기 시작한 하이힐을 또다시 잃을 순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뭐가 그렇게 미안해.”

    “여행을 또 망쳤어요.”

    “망치긴. 지금부터 함께 보내면 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땐 아예 집에 돌아오질 못했다. 지방까지 내려가 며칠이 지난 후에 올 수 있었다.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는데도 직접 발로 뛰는 건 습관이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건 아니었다.

    직원 몫의 일까지 상사가 도맡는 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최종 결재만 꼼꼼히 확인하는 편인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얼른 가요.”

    세인이 이한의 팔을 당겼다.

    간단히 씻고 여행 가방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향한 세인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놀랐다.

    거실 한가운데에 커다란 캠핑 텐트가 놓여 있었다. 주변엔 반짝이며 포물선으로 늘어진 예쁜 전구와 소담한 테이블이 이벤트처럼 마련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이동하긴 피곤할 테니 집에서 여유롭게 쉬어.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

    “정말, 예뻐요.”

    세인이 환하게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설렌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다 혼자 한 거예요?”

    “응. 마음에 들어?”

    “완전 좋아요.”

    아이들이 크면 캠핑 가려고 사 모은 용품을 오늘 개시했다. 이런 식으로 쓰게 될지 몰랐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우리 그럼 지금 연습해서 나중에 윤우랑 정우랑 캠핑 가면 되겠다.”

    “그러려면 우리 꼬맹이가 두어 살은 더 먹어야 할 건데.”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직은 조금 힘들어.”

    캠핑하며 정우를 감당하기엔 아무래도 힘에 부쳤다.

    “세인아, 사람 도움 더 받는 거, 조금은 생각해 봐. 혹사하다 건강 잃으면 그게 아이들에겐 더 독이야.”

    “알았어요.”

    세인이 의외로 쉽게 수긍하자 이한의 고개가 기울었다.

    “뭐지?”

    “나도 슬슬 이한 씨랑 시간이 부족해서 금단 현상 날 것 같아요. 이렇게 다정한 남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일찍 퇴근해야지.”

    “말은 잘하는데, 영 신통찮아. 정말 일 줄일 거야?”

    “응.”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었다. 이한과의 사랑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성과도 이뤘고 아이들도 엄마의 손을 아직 필요로 했다. 명예욕이나 성취감을 좇기에 치우쳐 이한을 등한시할 순 없었다.

    다만 이미 그러고 있었단 생각에 미안해져 그녀는 옅게 웃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휴식기를 가질까 해요.”

    “말만 들어도 좋네.”

    씻기 위해 복도 쪽으로 향하던 세인이 멈칫했다.

    정원이 보이는 구석의 창 앞에, 세인보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자 이한이 뒤로 다가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껴안았다.

    “작년 겨울에 정우 아파서 못 봤잖아.”

    지난 크리스마스 때 정우가 폐렴으로 입원했다. 작은 몸이 열에 올라 끙끙대는 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갈 여유란 없었다.

    그런데 이한이 잊지 않고 준비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큰 걸 대체 어디서…….”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진짜 나무였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으로 이와 비슷한 나무가 조화롭게 펼쳐진 정원이 지나갔다.

    충명원, 서 회장의 애정이 담뿍 담긴 산책길.

    “설마, 아니지?”

    “설마가 맞을 수 있어.”

    “못 살아, 정말.”

    “괜찮아. 어차피 네 거야. 서 회장님이 그 집 정세인이 거라고 했고.”

    세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한이 이렇게 종종 철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헛숨이 나오면서도 그가 밉지 않았다.

    “세인아, 나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파. 이거 하느라고 몸살이 났나. 같이 목욕하면 나을 것 같은데.”

    “점점 능글맞아지는 거 알죠?”

    이한은 타박을 듣고도 세인이 예뻐 어쩔 줄 모르겠단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조금은 어둡고 깊은, 그래서 변함없이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이한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세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건, 역시 무엇보다 이한이었다.

    반짝이는 전구보다, 예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보다, 그걸 준비한 서이한.

    “정말 고마워요.”

    세인의 미소가 번진 뺨에 이한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세인은, 두툼하고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먹고 향이 진한 와인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마셨다.

    텐트 앞 조그마한 접이식 식탁을 두고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려니 불편했지만, 이한과 함께 나누니 이것도 추억이 되었다.

    식사 후엔 푹신한 러그 위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영화를 봤다. 커다란 화면에서 멜로 영화가 시처럼 흘러나왔다.

    첫사랑의 설렘과 가슴 아픈 이별, 격정적인 재회가 꼭 이한과 세인의 러브 스토리를 닮아 있었다.

    이한도 그걸 느낀 것 같다. 세인이 뒤에서 끌어안은 그를 슬쩍 올려다보자, 자잘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뺨과 목덜미에 눈꽃처럼 수놓였다.

    “큰일이야. 눈이 감겨요.”

    “누우면 되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두 사람은 텐트 안의 푹신한 침낭에 나란히 누웠다.

    이한이 준비해 준 거품 목욕을 할 때부터 세인의 몸은 노곤하게 퍼져 있었다.

    “꼭 그거 같아.”

    “응?”

    옆으로 팔을 괴고 누운 이한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는 한 손으로 세인의 뭉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효도 여행.”

    “뭐?”

    “나 호강하잖아.”

    “그럼 난 정세인 씨 아들 역인가?”

    그의 날렵한 눈썹이 불편하게 올라서는 게 우스워 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뜨거운 밤을 보낼 차례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세인은 자꾸만 목덜미를 주무르는 이한의 팔을 붙들었다.

    “나 잘 것 같아, 그거 그만해.”

    “눈에 졸음이 가득해. 일찍 자.”

    “……이대로 자라고요?”

    세인은 무거워지는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잘 자. 사랑해.”

    그 어떤 자장가보다 달콤하고 아늑한 고백에 세인의 눈꺼풀은 의지를 잃고 말았다.

    오늘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더 놀고 싶은데.

    그런 바람을 전하지 못하고 세인은 깊게 잠들었다.

    세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따끈한 이한의 품속이었다.

    장작불이 타는 소리까지 켜둔 이한은 미동 없이 곤히 잠든 채였다.

    시계를 살피니 새벽 3시. 아직 아침이 밝지 않은 시간이었다.

    급한 대로 피로감이 해소되어 몸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그러니 이만 움직여도 되겠다 싶었다.

    세인은 꼼지락꼼지락 이한의 팔 하나를 치워내고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오늘을 위해 세인도 준비한 게 있었다.

    퇴근부터 지금까지 이한이 집착적으로 따라붙은 터라 차마 개시하지 못한 이벤트용 속옷이 있었다.

    큰마음을 먹고 그걸 입을 작정이었다. 세인은 조용히 드레스룸으로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