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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92화 (92/95)
  • 두 번째 신혼 92화

    오늘 일정의 마지막 미팅을 마친 세인은 바이어를 배웅하고 술기운이 녹아든 숨을 흘려보냈다.

    “하아…….”

    주말에도 일거리를 집에 들고 오지 않으려면 평일에 최대한 업무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오늘 하루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인이 일군 것과 다름없는 더블에이치 호텔은 국내에 3호점을 성공리에 오픈했고, 곧 해외 진출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 시작은 대만이 될 터였다. 해외여행을 떠난 내국인을 타깃 삼은 터라,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리란 확신이 있었다.

    모든 과정에 세인의 노력이 자수처럼 꼼꼼하게 수놓였기에 가질 만한 자신감이었다.

    오늘 미팅은 고급 클럽에서 이뤄졌다. 바이어를 배웅하고 다시 룸에 들러 짐을 챙긴 세인의 뒤로 진 비서가 따라붙었다.

    “대표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더블에이치 대표 이사 사장으로서 벌써 몇 년이다. 세인도 비서진의 보위를 받는 일이 이젠 익숙했다.

    “오늘 진 비서님 먼저 퇴근하셔야겠어요.”

    “대표님은요?”

    “저는 회사에 잠깐 들를 거예요. 기사님 차 타고 이동할 거니 가는 길은 걱정 마시고요.”

    회사에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었다.

    “대표님, 그럼 저도…….”

    “아니요. 진 비서님은 들어가세요. 내일 6시 출근인데 컨디션 관리하셔야죠.”

    세인이 9시 출근을 칼같이 지키는 탓에 진 비서가 움직일 일이 더 많았다.

    그녀의 과중한 업무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터라 더 붙잡아두기 미안했다. 효율도 떨어졌고.

    “대표님,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더 고집부리기 어려운 분위기를 깨달은 진 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했어요. 먼저 나가세요. 난 바람 좀 쐴게요.”

    “네.”

    진 비서가 물러나고 세인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5분 정도만 숨을 고르고 술기운이 조금 옅어지면 그때 나갈 작정이었다.

    바이어의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신 터라 조금 알딸딸한 게 사실이었다.

    한국까지 내방한 귀한 손님을 홀대하긴 싫어 평소보다 조금 과음했다. 뺨을 손등으로 눌러보자, 술기운이 도는 부위가 따뜻했다.

    혼자 남으면 가족 생각이 짙어졌다. 윤우랑 정우는 잠들었겠지.

    조금 전에도 영상통화를 했는데도 벌써 보고 싶었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찾지도 않고 잘 놀았고 그게 참 짠했다.

    오늘처럼 부부 모두가 늦게 퇴근해 잘 자란 인사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날이면 더 씁쓸했다.

    하지만 세인의 손에 달린 수천 명의 일자리를 생각하면 나태해질 겨를이 없었다.

    그만 갈까. 자는 모습이라도 빨리 보려면, 그게 나았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 몇 개를 검토해야 했다. 보안이 걸린 문서라 세인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세인이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룸으로 이뤄진 이곳 고급 클럽은 세인처럼 거래처를 접대하거나 조용히 술을 즐기기 위한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회원제로 이루어져 철저하게 사람을 가려 받는 시스템이었다.

    차별과 격차는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었고, 그 격리된 사회 속에서 그들은 특권층의 우월감을 즐겼다. 세인이 보고 겪은 재벌의 생태는 대개 그랬다.

    하나 더블나인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수시로 일어났던 걸 생각하면, 이곳도 그리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에서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라도 일어난 걸까. 아니면 주정?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테라스를 흘긋거렸을 때였다.

    “걸음걸이가 영 불안한데, 우리 정 대표님.”

    “……어?”

    “업무 중에 술 많이 마시지 않겠다고,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지?”

    “이한 씨?”

    세인이 놀라 눈을 키웠다. 이한이 테라스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인은 단번에 눈을 휘며 웃었다.

    “뭐야. 이한 씨도 여기서 일하는 중이었어요?”

    그러나 대답 대신 이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집에서 볼 때도 심장 뛰었으나 이렇게 가끔 밖에서 일하는 이한을 마주칠 때면 묘한 긴장감과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누군가 일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했던가. 아침에 본 슈트 차림인데 배경이 달라져서 그런지 이한의 분위기도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나 안 반가워요?”

    “어떻겠어.”

    성큼 다가온 이한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세인의 가는 손목을 움켜쥐고 당겼다.

    세인은 힘없이 그에게 끌려가 폭 안겼다.

    “뭐예요. 정말 놀랐어. 나 있는 거 알았어?”

    “응. 들어오는데 지배인이 말하더라고. 정 대표님 여기 계신다고.”

    두 사람이 부부란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제문의 황태자 서이한의 신데렐라.

    신데렐라라는 민망한 타이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인은 남모르는 곳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와 대등한 곳까지 가는 길은 아직도 진행형이었고,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경영인으로서 세인이 이한과 겨우 어깨를 맞댈 수 있다고 해서 그의 배경까지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이런 곳에서 이한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세인은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연락해 주지. 못 만날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기다리면 되는데, 굳이 그럴 것 있나.”

    세인이 그의 허리를 잡고 조금 웃었다.

    “응. 좋아.”

    “애교야? 만취한 걸 겨우 이거로 때울 생각 마.”

    “무슨 만취라고 그래요. 순 억지야.”

    세인이 조금 더 이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뺨을 기댔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테라스였다. 그래서 편히 그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오면 뭐 어떨까. 부부인데.

    “아이들이랑 통화는 했어요?”

    “한 시간 전에 했어. 윤우가 피노키오를 읽었다고, 그 얘길 해.”

    “으, 귀여워.”

    “자꾸 말을 바꾸는 동생의 코가 길어질까 봐 걱정이더라.”

    “그래서? 잘 달래줬어?”

    이한이 노련하게 윤우를 다독였겠지만, 상황이 웃겨 세인은 궁금증을 내비쳤다.

    “정우는 아직 아가라서 거짓말을 모른다고 해줬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고. 그럼 우리 정세인 씨 코는 얼마나 길어졌을까.”

    이한이 턱을 틀어 세인의 코를 가볍게 깨물더니 속삭였다.

    “술 냄새.”

    “……많이 나요?”

    “사람 환장하게 하는 향. 너 이렇게 약간 흐트러진 게 얼마나 꼴리는지 모르지.”

    이 사람이 또 선을 넘나들고 있다. 세인이 얼른 주변을 살핀 뒤 이한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러나 세인의 손을 거둔 이한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붙여왔다. 늘 그렇듯 불이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흐응…….”

    세인보다 조금 온도가 낮은 입술이 달큼한 숨을 뭉개며 포개졌다. 각도를 달리하며 입술을 붙이는 동안 이한의 몸이 바짝 밀착했다.

    매서운 기세에 강습 당한 그녀는 테라스의 한구석 어딘가로 깊숙하게 밀려났다.

    어두운 구석에 세인을 세워두고 그가 골반을 쥐며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를 은밀하게 접붙였다.

    “흣, 그만…….”

    세인이 단어를 흐리게 내뱉었다.

    “싫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짙은 흥분과 애달픔, 그리고 애원, 감추지 못한 욕망을 다분히 담고 있었다.

    “안 돼?”

    “누가 오면 어떻게 해.”

    “누가 왜, 이런 델 와.”

    이한은 무릎까지 닿는 스커트를 반쯤 걷어 올리며 침입이 자유로워지도록 수를 썼다.

    입술을 집어삼키며 세인의 혼을 빼는 건 이한이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세인은 대꾸조차 못 하고 그가 넘겨주는 쾌락을 삼켜내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답답한 것 같은데.”

    부풀어 오른 블라우스 단추를 내려다보며 이한이 낮게 말했다.

    세인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웃음이 걸린 입술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단추 위로 닿았다. 키스하듯 붉은 혀가 단추를 모양대로 덧그렸다.

    야한 남편을 지켜보는 세인의 호흡은 점차 가빠졌다.

    “풀어줬으면 하잖아.”

    “흐응…….”

    “키스할 때마다 답답해하는 거 내가 아는데.”

    세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이한의 뺨을 감쌌다. 허락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어낸 그는 거침이 없었다. 단정한 손가락으로 단추를 젖히고 열감을 손에 넣으며 다시 혀를 얽었다.

    세인이 한쪽 다리를 들어 그의 허벅지 뒤를 감쌌다. 흥분으로 경직되는 그의 육체를 그녀 또한 원했다.

    어쩌면 이럴까. 원해도 원해도 끝이 없는 갈망에 세인은 매일 속수무책이 되었다.

    아마도 상대가 이한이라서 가능한 거겠지. 세인은 점점 욕심쟁이가 되어가는 스스로를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늘 안달 난 마음을 이한에게 들키고 말았고, 그에겐 좋은 먹잇감이 되어 삼켜졌다.

    “제대로 먹어야지. 응?”

    흘러내린 묽은 애정을 입술 안으로 쓸어 넣는 이한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손길은 못된 짐승처럼 성급했다.

    “그만, 진짜. 그만……!”

    여우 같은 이한에게 홀딱 넘어가 이런 곳에서 큰일을 치르기 직전이 되어버렸다.

    예전 오픈 준비 중이던 호텔을 살피러 갔다가 휴게실에서 몸을 섞은 적이 있는데, 어쩐지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그 뒤로 밖에선 이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서이한, 그만, 흣……!”

    이한은 기어코 부드러운 눈밭에 진한 자국을 남기고서야 천천히 물러났다.

    불만족스럽게 입술을 핥는 이한의 눈빛은 아직도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잊은 게 분명한 그의 본분을 세인이 챙겨야 했다.

    “얼른 들어가 봐요. 사람들이 찾겠어.”

    “아직 괜찮아.”

    “나도 이젠 가봐야 해요.”

    “보내기 싫네.”

    이한이 웃으며 세인의 옷을 꼼꼼하게 다시 입혀주었다. 그러곤 이마에 쪽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더한 행위를 수도 없이 했으면서 이런 가벼운 접촉에도 번번이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 세인이 웃었다.

    “당해낼 수가 없어.”

    “그래, 사랑해.”

    이한이 자연스레 손깍지를 끼고 앞장섰다. 가닥가닥 여린 살점에 맞물려 오는 커다란 손의 온기가 안정감 있었다.

    “그런데 이한 씨.”

    “응.”

    “그거 안 가려도 될까요?”

    말을 마친 세인이 근심스럽게 그의 하의를 바라보았다.

    흉흉하게 기상한 그것이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한은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의 태평한 얼굴이었다. 늘 부끄러운 건 세인뿐인 듯했다.

    “어두워서 괜찮아. 다니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본다고 닳겠어?”

    “내가 싫어서 그래요. 누가 보는 거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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